[1500자 칼럼] 경쾌한 행진을

● 칼럼 2016. 1. 8. 21:11 Posted by SisaHan

지난 해 이사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살림살이를 없앴다. 넓은 집에서 여러 해를 살다가 좁은 콘도로 옮기는 일은 단순히 물건만 정리하는 일이 아니었다. 가슴 안에 오랫동안 담아온 아름다운 추억과 이날까지 지탱해온 삶의 이야기를 버리는 거였다. 가끔 답답하고 무력감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마다 청량제와 활력소로 다가왔던 것들이라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정들이고 가치를 부여하며 악착같이 붙잡고 살았던 것들이 어느 새 더 이상 내게 큰 의미가 없는 현실을 맞이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을미년을 마무리하면서 여태껏 허상에 사로잡혀 살아온 내가 아닌지 되돌아 보았다.


아마도 오늘까지 내가 가장 아껴 온 물건은 단연코 책일 것이다. 흔히 여자들이 관심을 갖는 옷이나 장신구보다도 책에 노골적인 집착을 드러냈었다. 책을 구입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고, 한국에서 우송해온 책들도 책장에 가득 찼었다. 그것들은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 속이 훈훈하고 충만해졌다. 텅 빈 큰 둥지보다는 한층 아담하고 편리한 주거지를 꿈꾸고 보니 그것들이 언제까지나 품고만 있을 수 없는 큰 짐이 되고만 것이다. 3차에 걸쳐 400여권의 책을 솎아냈다. 그 책들과 맺은 관계를 생각하면 아쉽고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디.


어린 시절의 자식들이 탄 상패와 트로피를 정리하는 일, 또한 어려웠다. 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크리스마스 선물로 작은 손으로 정성껏 만든 볼품은 없으나 행복 바이러스를 듬뿍 안겨주던 카드들도 어찌 버릴 수 있을까.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엄마”라는 감동의 찬사로 구멍 뚫린 이민의 삶을 프라이드와 행복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었던 그것들은 내 인생의 크나큰 선물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상패와 트로피 본인들은 자기 자식들을 챙겨야 할 내리받이 인생들이니 어릴 적 영광은 순전히 부모를 위한 것일 뿐이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그것들이기에 비감하지만 용단을 내려야 했다. 아무리 값진 의미를 지녔다고 해도 상패들이란 바로 그 때 그 시간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오로지 그 순간을 기쁨과 자랑으로 채워주는 것만으로도 족한 것인데 영원한 기쁨으로 지속되기를 욕심냈으니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


지나간 삶의 역사가 담긴 사진첩을 간추리는 일, 역시 쉽지 않았다. 아이들의 출생부터 학창시절을 거쳐 결혼, 그리고 손주들 사진까지 넘쳐났다. 거기다 사십여 년을 함께 살아온 우리 부부 사진도 만만치 않았다. 얼만큼 버리고 간직하느냐 그 한계가 문제였다. 요즘은 테크놀로지가 뛰어나 기기(器機)를 이용한 저장방법이 다양하지만 아날로그 시대에 머문 우리에겐 인화사진에 더욱 친근감이 간다. 추억이 담긴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는 일만큼은 마치 살아온 날들을 송두리째 내던짐과 같았다. 끝내 매 사진에 담긴 추억에 빠져 바람처럼 스쳐간 인연들이 남긴 흔적을 가슴에 묻었다. 그 외 끈끈한 정에 얽히지 않은 물건들은 기부단체를 이용하면 되니 한층 수월하였다. 이토록 살아가기 위한 필수품으로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한낱 가라지 세일품목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아쉬움으로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너저분한 살림살이가 보일뿐더러, 더 나아가 새로 장만하고 싶은 물건마저 생겨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소유물이 필요한 걸까? 톨스토이는 ‘인간에게 많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에서 보여준다. 인간이 아무리 욕심 내고 피땀 흘려 엄청난 땅(재산)을 얻는다 해도 종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이 죽어서 묻힐 묘지(2㎡남짓)뿐임을. 비록 그렇더라도 아직 생명이 있는 나에겐 아무리 간소하게 살아가려고 해도 삶의 품위와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선 필요로 하는 물질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이토록 솟아나는 욕망을 억제할 수양(修養)이 부족한 나이니 어쩌랴.
 그래도 또 다시 새해의 꿈을 꾼다. 현명한 포기는 좌절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여는 법. 짊어진 짐이 무겁고 힘겨우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고, 설사 나아간다 해도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미지수일 것이다. 한결 가벼워진 기대와 잔잔한 설렘으로 유쾌한 콧노래를 부르며 원숭이 해를 맞는다. 새 노트북을 가득 채울 감동 넘치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 떠나고 싶다. 경쾌한 행진의 첫 발을 힘차게 내디딘다.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