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장로교회 문창준·박의환 목사부부와 이·취임식에 참석한 목사들.

“남은 여생 충성다해 면류관 받기를”
“성령충만·하나님 권능으로 목회를”

호산나장로교회 (33 Pritchard Ave. Toronto, M6N 1T4) 문창준 담임목사 이임과 박의환 새 담임목사 취임 감사예배가 6월15일 주일 오후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캐나다노회(노회장 최영철 안디옥교회 담임목사) 주관으로 드려졌다. 
예배는 노회 서기인 지근우 목사(런던 안디옥교회 담임) 사회로 부노회장 송영인 목사(코너스톤교회 담임)가 기도하고 목사부부기도회 찬양에 이어 최영철 목사가 ‘목회자의 직무’(딤후 4:1~5)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최 목사는 디모데에게 역설한 바울 사도의 뜻을 전하며 갈수록 사람들이 진리가 아닌 망령되고 헛된 말에 미혹되어 가는 말세지말에 목회자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더욱 참고 기도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 예수님을 증거하고 말씀전파와 참된 가르침에 힘쓰는 전도자의 소명을 완수해 나가야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임식과 취임식이 이어졌다. 최영철 노회장이 문창준 목사에게 이임 기념패를 전한 뒤 정도령 목사(임마누엘장로교회 담임)는 축사를 통해“탁월한 문장력과 방송경력 등을 활용하는 다른 사역을 위해 시무를 마친다니 진심으로 축하하며, 끝까지 충성다해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되기 바란다”고 축원했다. 또 신임 박 담임목사에게는 “생애 첫 목회를 기성교회에서 성장 가능성을 안고 시작하며 훌륭한 신학적 배경으로 무장한 사역이기에 축하한다”며, “오직 성령충만으로 많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교회로 세워나가기 바란다”고 축사했다. 
12년의 사역을 마치고 이임하는 문창준 목사는 인사를 통해 “무대에서 늘 주연만 할 수는 없으며 조연도 해야 하기에 이제 한 성도로 돌아가 훌륭한 후임을 위해 기도하고자 한다”면서 “평생 하나의 목회철학은 외롭고 힘들고 소외된 한 영혼을 품에 안고 힘과 용기를 주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이었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여생의 각오를 밝혔다.
 
취임식은 최 노회장이 박의환 목사와 교우들의 서약을 받고 ‘서약의 불변을 위한’기도와 선포 후 취임패 전달 순으로 진행됐다. 증경노회장 이상일 목사(베리소망교회 담임)은 권면에서 “문제와 시련은 누구나 당하지만 굴복하느냐 도약하느냐의 해결은 포용력에 따라 달라진다”고 소금과 물의 비율을 예로들고 “기도로 성령충만과 하나님의 권능을 받아 도약하는, 하늘같이 높고 바다처럼 넓은 포용력을 지닌 목회자의 삶을 살기 바란다”고 박 목사를 북돋웠다.
답사에 나선 박의환 목사는 “자신감이 점점 줄어드는 나를 믿지않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성도들을 위한 눈물의 기도로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예배는 심택 집사 등 교우들의 축가를 들은 후 박 목사 축도로 마쳤다.
 
< 문의: 416-685-7461 >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항상 변화를 체험해 왔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시대에 따라 변화의 속도와 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 이 변화는 앞으로도 지속 될 것이다. 변화의 스피드가 초고속이다. 현대 변화의 방향은 예측하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변화의 속도 또한 엄청나게 빨라졌다. 사물에 대한 선호도도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모델, 새로운 방법, 새로운 패러다임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늘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변화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형화가 되어지고 있다. 현대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의 규모를 보면 엄청나게 크다.
 
각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강도가 엄청나서 사람들은 충격을 받기도 한다. 또한 지금의 많은 변화들은 특정한 패턴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변화를 예측하거나 장기계획을 수립하는데 어려움이 동반되기도 한다. 장래 어떤 일이 과거와 동일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확실하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만사가 변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혼란의 세대에서 사람들은 예측하기 힘든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역발상 기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의외의 상황 속에서 도약하는 경우도 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는 변화에 대응하는 용감성이 필요하다. 
변화는 변장된 기회라고도 할 수 있다. 변화를 막을 수 없다면 변화에 대처 하는 길을 모색하면 된다. 변화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 변화를 선용한다면 오히려 인생이 이전보다 더 보람되고 윤택해질 수 있다. 끊임없이 학습하는 태도를 가지고 누구에게서나 무엇을 배울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일상을 이어간다면 새로운 발전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밝은 마음으로 유연성을 가지고 사는 것 또한 필요하다. 태권도를 하든, 골프를 치든, 숙달이 되어 갈수록 유연해지는 자세가 나온다. 무술에서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초급일 때는 어깨에 무리한 힘이 들어가고 운동시에 흐느적 거리며 무력감에 빠져 제대로 기술을 발휘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고단자일수록 유연한 가운데 임팩트 순간 엄청난 힘으로 급소를 타격하여 황소도 제압하는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유리병이 발명되기 전에 포도주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보관되어졌다. 가죽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는 계속해서 발효하게 되고, 그에 따라 가죽부대에는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늘 새 부대 인생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변화에 직면하게 될 때 그 변화에 적응하든지 아니면 그 변화를 제압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이것이 우리가 순간순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할 인생 과제인 것이다. 
필자는 새로운 변화에 도전하면서 9월부터 동구라파에 교수로 가게 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제3의 사역인생이 크게 기대된다.

< 윤형복 목사 - 메도베일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
재단법인 자살예방협회 캐나다대표


세월호 참사를 거치며 한국에 망언을 일삼는 이들이 많음이 드러났다. 국회의원, 장관, 목사, 교수에서부터 서울시장 후보의 막내아들에 이르기까지 망언을 하는 이들의 범위는 넓고 깊었다. 이번엔 고르고 골랐을 국무총리 후보자까지도 망언 대열에 합류했다. 사회에서 일정한 권위를 가진 이들의 망언 역시 그 수준에서 결코 ‘일베’에 뒤지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상식에서 벗어난 말’이라고 다 망언은 아니다. 상식은 진리가 아니며 허상일 때가 많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사고나 말은 오히려 창조적인 사유를 위한 디딤돌이기도 하다. 니체의 독백이나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의 에세이에는 비상식적 발언이 넘쳐나지만, 깊은 공부와 독창적 시각이 낳은 이들의 비상식적 사유는 상식을 넘어서는 새로움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최근 문제가 된 이들의 망언에서 인식의 새로움을 거론하기란 낯뜨거운 일이며, 느껴지는 것은 인식의 천박성뿐이다. 세월호 참사에 대고 ‘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느냐’거나 ‘시체장사에 한두 번 당해 보았느냐’는 말을 지껄이고, 한국 현대사를 오직 신의 뜻으로만 파악하는 국무총리 후보자 앞에서는 분석이나 고민을 할 만한 ‘깊이’ 자체를 찾기가 힘들다.
망언을 한 이들은 대개 ‘사석에서 튀어나온 말’이었지 진심은 아니었다고 변명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야말로 진심임을 증명해준다. 오히려 망언은 이를 가능케 한 어떤 세계관 속에 존재하며, 이 세계관을 공유하는 담론의 공동체가 있음을 드러낸다.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은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공유한 일본인들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망언을 하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 신자들, 망언의 교과서가 된 극우논객을 따르는 네티즌들의 존재가 있다. 이 담론의 공동체 속에서 망언은 꾸준히 생산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들의 가치관, 세계관, 역사관 등이 일종의 ‘표현의 자유’로 수용된다는 데 있다. 광주학살의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는 극우논객은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언성을 높인다. 역사를 해석에 따른 복수적 서사로 보는 포스트모더니즘도 한국에 오면 이렇게 일차원적인 ‘자유론’으로 둔갑한다. 공통의 역사적 인식을 정립하지 못한 채 역사 자체가 자유와 표현의 문제로 변질될 때, 그 사회는 영원히 역사의 유령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한국의 보수적 ‘망언가’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미국이야말로 갈등을 통한 진보의 역사를 소중히 간직한다. 가령 아무리 보수적인 공화당 국회의원도 마틴 루서 킹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으며, 그의 생일은 국경일이기까지 하다.
 
우리의 광주항쟁은 어떤 대접을 받는가? 최근 애인과의 전화통화에서 인종차별 발언을 했음이 드러난 LA 클리퍼스 농구단의 구단주 도널드 스털링은 미국프로농구협회에서 영구제명을 당하고 고액의 벌금까지 물었다. 아예 트위터와 페이스북, 교회에서 대놓고 하는 한국의 ‘공적인’ 망언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 반면, 한 국회의원이 당원모임에서 했다는 발언은 순식간에 무리하게 사법처리되는 중이다.
망언은 사실 ‘자유’가 아니라 ‘권력관계’에 불과함을 여기서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망언자들, 나아가 일부 진보 지식인들조차 망언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들먹인다. 자유의 역설은 그것이 보장되기 위해서라도 자유의 규제를 요청한다는 데 있다. 실제로는 권력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로 포장되어 팔리는 망언 앞에서, 진짜 자유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따져볼 때가 되었다.
< 문강형준 - 문화 평론가 >

 
박근혜 대통령의 인적 쇄신 작업이 13일 경제부총리 등 7개 부처 장관을 바꾸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쇄신은 ‘나쁜 폐단이나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한다’는 뜻인데 아무리 봐도 박 대통령 인사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폐단’은 오히려 깊어졌고, 마땅히 물러나야 할 ‘묵은’ 사람은 여전히 버티고 있으며, 새로운 사람은 전혀 새롭지 않다.
청와대의 오만함은 ‘망언 열전’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임명을 강행하겠다는 데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여당 일부 의원들까지 공식적으로 부적격 판정을 내릴 만큼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문 후보자는 청와대의 응원에 용기백배해 언론사를 상대로 한 법적 소송까지 들먹이고 있다. 이것은 쇄신이 아니라 흙탕물 범벅이다.
 
문 후보자는 이미 ‘국제적인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내 나라가 남의 식민지가 된 것을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총리로 지명했으니 해외토픽감이 아닐 수 없다. 일본 극우파 쪽에서는 희색이 만면해 “조선을 벌한 것은 신의 뜻이었다”는 맞장구까지 치고 있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로 대한민국은 국제사회가 공인하는 ‘안전 후진국’이 된 데 이어 이제는 식민시대 찬양자를 총리로 내세우는 ‘신비한 나라’가 됐다.
문 후보자가 총리로서 부적합한 이유는 그릇된 역사관과 민족관 때문만이 아니다. 이런 망언들에 가려 있지만 ‘종교적 맹신’ 자체만으로도 총리 자격이 없다. 국가 지도자는 되도록 한쪽 종교에 치우치지 않은 사람, 종교가 있더라도 국민에게 이질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사람이어야 한다. 이념·지역·계층 등으로 갈가리 찢긴 우리 사회가 종교 문제로까지 갈등을 빚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만 열면 “신의 뜻”을 외쳐대는 ‘극우 인사’ 말고는 도대체 이 나라에 사람이 없다는 뜻인지 청와대는 새로운 갈등의 뇌관에 불을 붙이고 있다.
 
내각과 청와대 개편에서 확인된 ‘강화된 친정체제’의 정점에는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있다. 새로 꾸려진 내각과 청와대 참모진은 예전과 달리 임명 과정에서부터 김 실장의 입김이 작용한 사람들이다. 명실상부한 충성 체제가 작동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총리 후보자라는 사람은 국정 경험도 없고 이미 인준 과정에서부터 만신창이가 됐다. 설사 총리가 된다 해도 ‘부통령 실장’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허약한 총리가 될 게 뻔하다. 장관들은 청와대 지시사항을 받아쓸 더욱 두툼한 공책을 준비해야 할 상황이다.
6.4 지방선거가 끝난 뒤 청와대는 “한표 한표에 담긴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해석한 ‘국민의 뜻’과 ‘표심’은 대다수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국민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겸허’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보기 힘들다. 박 대통령이 선거 전에 흘렸던 눈물의 실체가 바로 이것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