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세월은 흘러도

● 칼럼 2015. 3. 14. 17:44 Posted by SisaHan

세월의 빠름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모두에게 젊음의 시간이 있었고 오늘도 TV 에서 만나게 되는 명사들이나 왕년의 스타들을 보면 저들도 그렇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세월의 흐름과 오늘을 가늠할 수 있는 작은 가늠자로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로 말할 수도 있겠다. 책이나 문학의 내용들이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것처럼 드라마도 역시 그랬다. 적어도 내가 살아오고 기억하는 그 드라마 속에서 말이다. 드라마 ‘여로’는 일제의 수탈 속에서 겪은 우리 민족의 아픔을 이야기했었다. 그 이후 나는 이민을 나왔기에 드라마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었으나 이민자들이 늘어나고 한국과 교류가 잦아지면서 한국 음식, 한국 문화의 유입이 잦아지며 최근에는 한국 드라마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즐겨 보셨다는 드라마의 주 된 소재는 가정과 거기에 파생된 불륜의 이야기 또는 정치 재벌권력과 암흑 세계의 이야기들이었고 그리고 그에 따른 반전과 복수의 이야기였다. 그와 함께 소재는 결국 출생의 비밀로 이어지는 속에서 또 다른 음모와 복수의 이야기들이었으니 결국 세태가 그러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 오늘은 어떤 것이 소재인가?
드라마의 속성상 현실을 비껴 갈 수 없는 그대로 신문지상에 보이는 경찰과 검찰의 비리를 폭로할 때 사람들은 열광을 하고 오늘의 현실에서 무능한 인간의 치부를 슬퍼했다. 픽션이라 하면서도 현실로 받아들이는 아픔이 베어난다 하겠다. 그와 함께 슬픔을 갖는 것은 가정의 무너짐이었다. ‘가족끼리 왜 이래’ 에서 아버지는 누구며 자식은 무엇인가? 가정과 가족이 깨어지는 현실에서 어쩌면 시청자들은 가정을 세워보려는 안간힘이 묻어나는 드라마를 보고 함께 울기도 했다. 그만큼 오늘의 가정이, 부모의 사랑이 무시되고 무너졌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와 함께 이제는 드라마의 방향이 정신병의 문제를 크게 다루고 있다. 어쩌면 정상적인 드라마처럼 보고 있지는 않을까? 이중인격 다중인격자의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이 공감하고 열중하는 것은 실제로 현대인이 정신질환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문제가 크다.

그래서 사람들은 퓨전이라는 타이틀 앞에서 억지로라도 별에서 온 사람을 만나고 싶고 자신이 이중 인격자라는 사실을 정상인처럼 생각하려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확실히 드라마가 오늘의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문제는 그 처방이다. 지금은 물질이나 권력이 문제가 아니다. 갈등하고 아파하는 세대를 무엇으로 치유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길게 말할 것 없이 오직 예수님만이 그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주님이 오늘도 현대인을 부르신다. 사람이 모인 교회가 정답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순수하게 말씀이 증거 되는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 안에서 참 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저렇게 세월이 흘러간다. 사람만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그 세월 속에서 가정도 늙었고 인간사회도 인간관계도 늙었다. 모든 것이 피폐하고 무너질 때 이제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역사를 일으켜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정답이요 인류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변하지 않는 답이란 말씀이다. 그래서 나는 금년의 우리 교회의 표어를 『우리 모두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고 했다.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기고] 첫 손녀의 첫 생일에 부쳐

● 칼럼 2015. 3. 14. 17:43 Posted by SisaHan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첫 손녀가 태어났습니다. 첫째를 결혼 시킨 후 8년 만에. 우리 때와는 달리 아들내외는 친밀한 계산 하에 출산 계획을 세우면서 “늦게 할머니 되게 해 드릴 테니 염려 마시고 젊게 사시라”는 농담을 던졌지만 그렇게 영악스러울 줄은 몰랐습니다.
임신 사실을 알려 오면서, 동시에 문명의 발달을 실감하게끔 뱃속의 아이 사진을 동영상으로 보내왔습니다. 흰 볼이라는 태명과 함께.
빨리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서인지, 아님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바램을 알았는지 아이는 예정일 보다 두어 주일 빨리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저 신기하고 대견스러웠습니다. 동영상으로 보내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생명’ 한 생명이 태어나 안겨 주는 생명의 신비함-.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1: 3~4) 그랬습니다. 바로 빛이었습니다. 나날이 다른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 생명. 아이는 바로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부부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아이들 옷 가게를 기웃거리며 다니는 쏠쏠한 재미를 만끽하며 얼마나 웃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사내녀석 둘을 낳아 길렀기에 여자아이들 옷을 처음 만져보면서 돌아다니는 그 재미와 기쁨은 정말 대단합니다. 느껴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람이 늙어 간다는 게 그리 슬픈 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인생의 또 다른 묘미를 만끽하고 있으니까요. 토요일 저녁마다 동영상을 통하여 만나는 손녀의 재롱은 날로 발전되어 이젠 완연한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체’였습니다. 아직 말은 잘못하지만 다 알아 듣고 행동하는 걸 보면, 그저 신기할 뿐이지요. 감정의 변화, 싫고 좋음의 표현과 방법을 확연히 나타내 보이니까요. 아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말하고 이야기하면 아이에게 상처가 되고 아이의 인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치리라 봅니다.
부모를 통하여 아이가 세상에 나왔지만 아이는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닌,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한 인격체 임이 분명했습니다.

“아가야, 며눌 아가야!” 그러므로 너의 딸인 동시에, 우리의 손녀인 그 어린 새싹에게는 맘껏 사랑하면서 자주 집 앞 공원에 데리고 나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 햇빛에 반짝이는 개울물, 그 물속에 헤엄치며 노는 송사리 떼들, 또 떨어져 죽은 나무 잎사귀, 공중에 나는 새, 초록의 나무들과 풀, 그리고 공원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손잡고 가는 연인들의 표정도, 우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여주며 함께 산책을 많이 하도록 하려 무나. 이 모든 것들이 아이의 선생님이 아니겠나.
부디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아이를 끌고 다니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는 아이에게 사랑만 주자. 그러나 우리의 생각까지 주지는 말자. 단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가리키자. 사과 한 조각, 오이 한 조각이라도 자기 입에만 넣지 말고 “아빠도 엄마도 주세요”라고 하면서 먹이자.
공원이나 밖에 나가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밥풀 튀김을 먹으면서 옆에 앉은 모르는 친구에게도 주는, 나눔을 가리키며 욕심 없는 사람으로, 그리고 감사 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자.

늘 기도한다. 그 아이, 그리고 그 “자손 대대로 하나님 믿는 자녀 되게 해 달라”고. 우리는 기다린다. 토요일 저녁을, 그리고 맘껏 웃는다.

< 김선 - 오타와 거주 >



[사설] 리퍼트 대사 ‘위문 과공’

● 칼럼 2015. 3. 14. 17:41 Posted by SisaHan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병실을 우리 정치인과 정부 고위인사들이 줄지어 찾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여당 의원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일행, 그리고 이완구 국무총리와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일찌감치 병실을 찾았다. 어제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문병을 했고, 박근혜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마치자마자 귀국 첫 일정으로 세브란스병원을 방문했다. 그밖에도 너무 많은 사람이 주말에 방문하여 리퍼트 대사가 피로를 느낀다며, 더는 면회를 받지 않겠다고 미 대사관 쪽이 공식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흉기로 공격당해 상처 입은 피해자를 찾아 위로하는 것은 미덕이고 예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상대가 외국을 대표하는 외교사절인 만큼 위로의 형식을 정중하게 갖추는 것은 필요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각각의 문병 행차는 한 건씩 놓고 볼 때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여야 대표와 소속 의원들, 각 부처 장관과 총리, 대통령까지 한 외국 대사의 병실에 줄을 잇는 모습을 보면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질서가 없고, 외국에서 볼 때 강대국 대사에 대한 과잉 대우로 비칠 수 있다. 가령 정부 대표로 주무 장관이든 누구든 한 사람을 지정해 위문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위로 전문이나 화분을 보내는 것으로 조율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문병 때 위로의 말도 잘 골라서 할 필요가 있다. 김무성 대표는 “종북좌파들이 한-미 동맹을 깨려는 시도였지만 오히려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확인하고 더 결속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친 사람을 위로하는 데 집중하는 게 옳지, 거기까지 가서 정치적 이득을 셈하며 사건을 부풀리려는 것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리퍼트 대사는 병상에서 “김치를 먹었더니 더욱 힘이 나는 것 같다”며 ‘한국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의 주가도 날로 솟고 있다. 외교관이 위기 상황에서 소통 전략을 잘 구사하여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는 좋은 사례를 보는 듯하다. 반면에 우리 정부와 정치권의 태도에선 원숙함을 찾기 어렵고, 과공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뉴욕타임스>가 오죽하면 한국의 과잉반응을 꼬집어 “한미동맹을 오히려 훼손하는 역풍이 분다” 고 지적했을가. 이 신문은 피습사건을 박근혜 정부와 그 지지자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고 비판했다.



[사설] 일본은 왜 독일에서 못 배우나

● 칼럼 2015. 3. 14. 17:39 Posted by SisaHan

과거사 문제를 회피하는 아베 신조 일본 정부를 향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준엄한 충고를 했다. 일본 정부는 부끄러움과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군대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현안의 해결에 적극 나서는 것이 옳다.
일본을 방문한 메르켈 총리는 9~10일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것이 좋다”, “과거에 대한 정리는 (가해국과 피해국 사이) 화해를 위한 전제다” 등 진심 어린 충고를 했다. 그의 말이 큰 울림을 갖는 것은 똑같은 2차대전 전범국인 독일과 일본의 자세가 크게 대비되기 때문이다. 과거사 문제를 풀기 위한 독일의 일관된 노력은 유럽 전체의 화해와 통합의 밑거름이 됐다. 메르켈 총리도 2005년 취임 이후 기회가 날 때마다 과거사 반성의 중요성과 자국의 책임을 강조해왔다.


일본 정부의 태도는 여전히 가증스럽다. 이번에도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은 10일 ‘일본과 독일의 전후 처리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발을 뺐다. 아베 총리는 패전일(8월15일) 무렵 나올 전후 70년 담화에서 ‘식민지배와 침략’ ‘통절한 반성’ ‘마음으로부터의 사죄’ 등 이전 담화의 핵심 표현조차 빼려 한다. 나아가 지구촌의 공분을 사고 있는 위안부 문제에서는 문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몰역사적 태도를 나타낸다. 일본은 최근 외무성 누리집에서 “(한국과 일본은)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의 기본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표현을 삭제하는 몰지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가해국인 일본이 이런 태도를 고수하는 한 한국·중국 등 피해국과의 진정한 화해는 있을 수가 없다.


일본은 미국이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것으로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은 최근 ‘과거사 갈등은 한·중·일 모두의 책임’이라는 엇나간 발언을 했다. 하지만 군대위안부나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일본에 침묵한다면 미국 또한 전쟁범죄자가 될 뿐이다.(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데니스 핼핀 연구원) 미국이 아무리 중국의 부상을 우려해 일본과의 협력을 중시하더라도 이런 선택을 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일본이 가야 할 길은 하나뿐이다. 역사를 직시하고 자신의 책임을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위안부 문제는 해결이 시급하다. 올해는 2차대전 종전 70돌이 되는 해다. 일본이 올해마저 역주행을 하면서 흘려보낸다면 화해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