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주미 한국대사관 인턴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났다. 청와대는 이 사건이 언론에 등장하는 게 반갑지 않겠지만 1년이 지나도록 사건 처리가 이뤄지고 있지 않으니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 21일 워싱턴 검찰청에 전화를 걸었다. 2주 전 한국 언론들이 미국 검찰의 늑장 처리를 비판하는 기사들을 내보낸 이후 변화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사건을 계속 검토 중이고 말해줄 게 없다”는 것이었고, 수사팀 인터뷰 요청에는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 내 분위기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태도다.
 
일각에선 법리적 검토에 시일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 사건과 관련해 법리적으로 검토할 부분은 두가지뿐이다. 하나는 ‘경죄’인지 ‘중죄’인지를 판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교면책특권에 해당하는지 여부다. 법조인들은 이 사건은 복잡하지 않아서 경죄·중죄 여부를 판단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이 정도 사건이면 이미 법리 검토를 서너차례도 더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외교면책특권은 적용 가능성 여부를 떠나 당사국(한국)이 행사 의사를 표시해야 효력을 발효하는 것인데, 한국 정부는 이미 이것을 사실상 포기한 상황이어서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사건 처리가 미뤄지는 이유는 사건 수사나 법리 검토 이외의 다른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세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미국 정부의 수동적인 태도다. 대통령의 외국 순방 때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른 수행원을 처벌할 경우 나중에 미국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을 우려할 수 있다. 미국은 2012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콜롬비아 순방 때 비밀경호국 요원들이 성매매를 하다 들통나 미국으로 소환한 바 있다. 미국이 이번에 윤 전 대변인을 강하게 처벌할 경우 외국이 미국 관료를 처벌하는 선례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한국 정부의 안이한 태도다. 우리 정부는 당시 미국 쪽에 신속한 수사를 요청했으나 그 이후엔 사실상 나 몰라라 하고 있다. 그 이후 외교 채널을 통해 신속한 수사를 요청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미국 법무부를 통해 사건 진행 경과를 파악하는 수준인데, 미국 쪽은 뚜렷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셋째는 윤 전 대변인 쪽이 미국 검찰을 상대로 만만찮은 로비를 하고 있는 점이다. 현재 윤 전 대변인은 법무법인 에이킨 검프 변호인 4명의 조력을 받고 있는데, 이 법무법인은 워싱턴에서 로비력 1~2위를 다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피해자 가족은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20대 딸을 가진 부모의 심정상 신원 공개 등 ‘2차 피해’를 우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 언론의 감시 범위에서도 사실상 벗어나 있는 미국 검찰은 아마도 ‘시장의 논리’에 순응해 이 사건을 흐지부지해도 별 타격이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 사건이 일벌백계는커녕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흐지부지될 개연성이 높아지는 것을 보며 국가 기관은 왜 존재하는지 다시 묻게 된다. 약자 보호보다는 권력자들을 가급적 ‘불편’하지 않게 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한 탓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1년 전 이 사건과 관련해 “이 문제는 국민과 나라에 중대한 과오를 범한 일로, 어떠한 사유와 진술에 관계없이 한 점 의혹 없이 철저히 사실관계가 밝혀지도록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 정부에 다시 신속한 수사를 요청해 그 약속을 지키길 바란다.

< 박 현 - 한겨레신문 워싱턴 특파원 >


세월호 참사의 고통과 상처는 그대로다. 참사가 일어난 지 40일이 넘었지만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 그리고 생존자들은 여전히 피 흘리고 아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행태와 일부 인사의 비인간적인 망언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통과 상처의 근원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들이다. 유가족들은 자신의 고통에 앞서 실종자 가족들의 아픔과 절망에 죄스러워하며 가슴이 찢어지고, 생존자들은 희생자 가족들의 비탄 앞에 고개 숙인 채 자신의 상처는 미처 돌아보지도 못하고 있다. ‘처절한 공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고통은 마지막 한 사람의 실종자가 돌아오는 날까지 온전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은 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이 잘 안다. 세월호의 유족들이 그렇다. 유족들은 서로 챙기며 아픔을 어루만지고, 치유를 주고받고 있다고 한다. 참극의 현장에서 다친 이들이 서로 피를 닦아주고 지혈하며 상처를 감싸는 상황이다. 지금으로선 외부의 다른 어떤 상담자보다 ‘상처 입은 치유자들’인 유족이 서로에게 더 힘이 될 것이다. 아득한 터널같이 계속되는 고통의 나날을 뼈저리게 공감하고 함께 몸 비비며 견디어줄 사람이 우선 유족 자신들인 까닭이다.
그런 마당에 성급하게 치유를 서두른다면 상처만 덧나게 된다. 가족들의 심리적 외상은 현재 진행중이다. 하루하루 더 크게 부어오르고 있다. 외상후 증후군으로 잘못 알고 상처를 치유하겠다고 덤볐다가는 되레 고통이 더 커질 수 있다. 지금은 상처에 메스를 들이대기보다는 함께 울어주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일상을 챙겨줄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세월호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는 시민사회의 자발적 움직임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경기도 안산에서 나타나고 있다. 피해자들 가까이에서, 피해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공동체 안에서 아픔을 어루만져 치유하려는 민간 차원 치유 작업이다. 단시일이 아닌 안산에서 5년 이상 머물며 유가족·주민들과 긴밀하게 소통해 이들의 일상 복귀를 돕자는 ‘공동체 복원’ 혹은 ‘사회적 치유’ 모델이 추진되고 있다. 세월호 관련 기록을 모아 진상규명뿐 아니라 치유에 활용하고, 미술·건축·공연 등을 통한 다양한 심리치료와 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프로그램이 구상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껏 보지 못한 의미있는 시도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이들의 손길과 도움이 필요할 터이다.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는 27일 3억원을 기부한 시점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그런 좋은 뜻을 좋게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본인이야 ‘좋은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판단은 국민 몫이다. 앞뒤 사정을 살펴보면 꼭 그렇게만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무엇보다 안 후보자가 기부금 4억7000만원 가운데 3억원을 총리 지명이 발표되기 직전에 냈다는 점에서 국회 인사청문회 통과를 염두에 둔 ‘눈치 기부’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3억원 기부 시점은 5월19일로, 청와대의 총리 후보자 발표 사흘 전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당일이다. 사전 검증에 필요한 절차 등을 고려하면 안 후보자는 이때 이미 자신이 총리로 내정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안 후보 쪽은 그 이전인 4월24일에 유니세프 쪽에 기부 관련 문의를 했다고 하지만 당시도 총리 교체가 기정사실로 굳어진 시점이다. 여러 정황으로 미뤄 기부금 3억원은 총리 지명에 대비한 ‘보험료’ 성격이 짙다.
 
안 후보자는 기부금의 진정성 문제가 불거지자 이번엔 변호사 활동으로 증식한 재산 11억원의 사회환원 카드를 내놨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사청문회를 거치기도 전에 낙마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임을 모를 사람은 없다. 곤란한 처지를 모면하려는 궁여지책의 재산 환원은 감동을 줄 수 없다. 오히려 총리라는 직책에 기필코 올라보겠다는 일념 아래, 자신의 오점마저 돈으로 사려 하는 발상 아니냐며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안 후보자가 떳떳하지 않은 돈이라도 토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도 우려스럽다.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대법관 출신으로서 잘못된 전관예우 관행에 일조했다는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더구나 안 후보자 스스로 “내가 생각해도 수입이 많았다”며 재산 증식에 문제가 있음을 고백한 바 있다.
 
안 후보자가 이번 일을 ‘옥에 티’ 정도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하루 1000만원’은 역대 인사청문회 사상 최고 액수다. 오죽하면 ‘황제 전관예우’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청와대는 임명동의 요청서에서 안 후보자가 ‘민관유착 적폐 척결’ 적임자임을 내세웠다. ‘전관예우의 최고봉’을 기록한 인물이 전관예우에서 비롯한 악습을 일소하는 데 앞장설 수 없음은 자명하다. 위에서 흙탕물을 흘려보내면서 아랫물이 맑아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한마당] 문제는 길환영이 아니다

● 칼럼 2014. 6. 2. 16:53 Posted by SisaHan
공영방송을 장악하여 입맛대로 주무르려는 청와대와 권력의 꼭두각시 노릇을 자청하는 하수인들에 대한 분노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방송>(KBS)에선 기자에 이어 피디들까지 사장 퇴진을 외치고 나섰고, 정부의 언론통제에 대한 학계, 언론계의 비판성명이 잇따르고 있다.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정권의 시도는 알다시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권 때 부활한 언론통제의 악습은 김인규(KBS)-김재철(MBC)-길환영(KBS) 등 ‘걸출한’ 어용사장의 계보를 통해 이어졌고, 그 결과 2014년 한국의 언론자유 순위는 세계 68위로 곤두박질쳤다.
박근혜 정부의 시대착오적 언론통제는 마땅히 저지돼야 한다. 그러나 이는 공영방송 정상화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문제는 길환영 사장의 퇴진을 넘어, 이명박 정부가 짓밟고 박근혜 정권이 숨통을 끊어놓은 공영방송의 공론장을 되살리는 것이다. 공영방송은 이제 이름에 걸맞은 공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환골탈태해야 한다.
사실 정권의 방송 장악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수 기득권 세력이 수면 아래에서 줄기차게 추진해온 우민화 책략이다. 민영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공영방송마저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일에 용의주도하게 동원되고 있다.
 
공영방송의 현실을 보라. 그곳은 개그맨, 연예인, 스포츠맨의 영토이지, 다른 나라, 예컨대 독일의 경우처럼, 예술가, 학자, 정치인의 영역이 아니다. 
그곳은 연예인의 사생활 잡담, 개그맨의 객쩍은 수다, 막장 드라마의 악취, 휴먼다큐의 값싼 감상주의, 건강에 대한 끝없는 협박, 맛있는 곳과 놀러 갈 곳에 대한 유혹으로 가득하지만, 어디에서도 우리 사회가 다다른 참담한 현실과 국가가 처한 냉엄한 상황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은 찾아볼 수 없다. 
그곳은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이 완전히 소거된 탈역사의 공간이다. 세계와 사회를 인식하고, 역사와 시대를 성찰하는 지성의 공간은 오늘날 한국 텔레비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영방송이 이처럼 사회적 비참은 철저히 외면한 채 거짓 행복의 가상을 매일매일 안방에 실어 나를 때, 그것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정치적 사안에 대한 왜곡보도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다. 보도 조작은 단면적이고 주기적임에 반해, 우민화는 전면적이고 일상적이며, 왜곡보도는 목적의식적으로 이루어짐에 반해, 우민화는 부지불식간에 무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이 수행하는 이런 전면적 우민화는 본능적으로 이성적 토론을 기피하는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국 보수의 뿌리 깊은 지적 열등감과 반지성주의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을 무지상태에 묶어두어야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묘한 패배주의가 보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권력만 잡으면 빗장을 걸어 공론장을 폐쇄시킨다. 왜 그들은 열린 공론장을 두려워하는가? 왜 그들은 자유로운 공론장에서 갈등과 대립을 넘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가?
방송의 민주화를 쟁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방송의 우민화를 저지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정권의 방송 장악은 공정한 보도를 망치지만, 방송의 총체적 오락화는 대중의 의식을 잠재운다.
 
우리는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기댄 채 오락물의 부드러운 유혹에 굴복하여 날마다 탈정치화된다. 그리하여 사회적 비참은 도처에서 창궐하는데도, 사회변혁을 위한 물적 제도적 조건은 이미 갖춰졌음에도, 사회변혁의 실천은 부재한 부조리한 현실이 지속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분출되지 못하는 것이다.
< 김누리 중앙대 독문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