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소망] 머니 머니 해도

● 교회소식 2014. 7. 31. 15:24 Posted by SisaHan
이번 주 인터넷에서 읽은 기사의 한 부분이다. USA 투데이가 미국 노인들을 대상으로 ‘가장 후회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했는데, 응답자의 45%가 노후를 위해 ‘더 많은 돈을 모으지 못한 것’이라고 했고, 가장 낮은 응답을 얻은 항목은 전체 응답자 중에서 21%가 말한 ‘가족과 더 친밀하게 지냈어야 했다’였다고 한다.
이 통계를 보면 가족보다는 돈이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 자식이나 친척을 의지했던 옛날과는 달리, 이제는 돈이 그 역할을 한다. 돈이 있어야 좀 더 편리한 양로원에 갈 수 있고, 돈이 넉넉해야 은퇴 후에도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명실공히 맘몬(Mammon) 시대에 살고 있다. 쉽게 말해서 돈이 제일 큰 힘을 발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돈이 없는 사람은 위축되어 살아간다는 말이다. 아, 서글픈 세상이다. 
 
2차대전 이후에 태어난 소위 말하는 베이비 부머들이 (1946-1964년생들) 대거 은퇴하면서 노후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하고 있다. 의료 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장수라는 선물을 가져다주었지만, 장수도 건강해야 그 복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다. 은퇴를 앞둔 대다수의 베이비 부머들은 자신의 건강도 챙겨야 하지만, 연로하신 부모님들도 보살펴야 한다. 그러니, 은퇴를 앞두고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제일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은 듣기 싫은 이야기다.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돈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쩌다 북미가 이런 사회가 되었나? 
 
국민 행복 지수가 꽤 높다고 말하는 부탄이라는 작은 불교 국가가 있다. 1인당 GNP가 2천$ 수준밖에 되지 않지만, 국민의 97%가 ‘나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들의 삶을 누가 조사해서 책을 냈다. 몇 가지 발견한 행복한 삶의 원칙이 있다. 

- 강대국을 지향하지 않는다. 
- 부자를 꿈꾸지 않는다. 
- 자연보호가 가장 중요하다. 
- 행복해지기 위해 서두르지 않는다. 

북미에서는 개인적 성공과 문명의 혜택을 따르지만, 물질보다 관계를 더 중요시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행복이 있다.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살지 않았나? 우리는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오늘도 우리에게 참 행복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자.

<송민호 목사 - 토론토 영락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정말 성급해서 그런가?

● 칼럼 2014. 7. 31. 13:11 Posted by SisaHan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브라질의 월드컵 경기가 막을 내린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세계만 그랬는가?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16강을 바라본다고 하면서 응원 열기가 대단했었는데 초반에 탈락되면서 그만 풀이 죽었다.
월드컵 경기는 감독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4년마다 열리는 이 경기에서 한 번 두 번 실패하면 감독은 사표를 내고 사라지거나 다른 나라의 감독을 맡기도 한다. 금년만 해도 초반에 떨어진 이태리의 프란델리 일본의 자케로니 코트비부아르의 라무시가 감독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들이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는 대단한 감독이라고 초청을 했는데 승부의 세계가 그래서 무섭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 경기의 실패를 책임지고 감독이 물러나라 하고 인터넷이나 신문 매체가 떠들썩했다. 경기를 승리로 못 이끌었으니 또는 경기 때의 감독의 용인술이나 전술이 부족하거나 잘못되었으니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하면서 퇴진을 요구하면서 결국에는 사표를 받았다.
 
나는 거기에서 세태를 본다. 한 때는 그 감독이 얼마나 대단했는가? 그래서 이제는 월드컵 경기를 맡겨야 한다면서 모두 기대를 걸고 그 자리를 맡겼다. 그러나 경기에 지니 선수를 기용함에 있어 자기가 믿는 그 선수만을 고집했기에 그리고 전술면에서 부족하여 결국에는 졌다는 질타가 쏟아졌다. 그러나 만약 한 경기라도 이겼다면 자신이 믿는 선수를 끝까지 믿어주는 그의 용인술이 오히려 칭찬을 받고 빛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칭찬과 오욕이 종이 한 장의 차이란 것을 느낄 수 있다.
가슴 졸이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월드컵 경기 이전에 어떤 분의 칼럼을 읽으면서 나도 지긋한 마음으로 관전하기로 했다. 그래도 심중으로는 이기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 분의 글은 한국의 모든 선수들이 받는 연봉의 액수를 다 합해보아도 어떤 국가의 유명한 한 선수의 연봉보다 작은데 그리 좋지 못한 조건에서 뛴 선수들을 가상하게 보자는 것이고 현재 한국 축구의 등급이 세계 축구연맹에서 하위급에 속하는데 하위가 상위급의 국가에 지는 것을 마땅하게 보고 관전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면서 운 좋게 이길 수 있으니깐. 그럴 듯한 말씀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 역시 이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듦에는 어쩌랴?
 
그러나 나는 감독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에 수긍은 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이야기를 했으면 어떨까? 언제였는지 기억하지를 못하지만 한 때 우리는 한 경기에 졌다고 감독을 바로 교체한 적도 있지 않는가?
너무 성급하지 않을까? 한 지도자 감독 코치를 키우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 갈아치우기는 쉽지만 새로운 지도자가 그렇게 쉽게 나오지를 않지 않는가? 그래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그 전란 중에도 갈아치우던 왕이나 정치 지도자들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것만이 능사가 아닌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그런 글이 있다. “그릇이 큰 사람은 되는 일은 되게 하고 안 되는 일은 억지로 하지 않으니 그 인생이 쉬울 수밖에 없고 소인은 안 되는 일은 되게 하려니 그 인생이 어찌 힘들지 않겠는가? 큰 사람은 자기 할 일을 자기 능력만큼 하면서 하늘의 명을 기다릴 따름인데 소인은 어려운 일을 하면서 요행을 바란다.”
이제 4 년 뒤에 또 경기가 있다. 그때에는 이겨보자는 심경으로 휘파(FIFA)람을 불면서 또 하루를 살아가보자.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칼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칼럼 2014. 7. 31. 13:10 Posted by SisaHan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 세월호가 4월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지 백일이 되었지만 원인조차 밝히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 고철 같은 배를 사들여와 무법적으로 운행한 회사 대표를 대대적으로 수색해 잡지 못한 것도, 또 돌연 주검으로 발견된 것도 이상하고, 마지막 실종자가 발견된 지 24일 만에야 한 구를 수습한 것도 이상하고, 국회의원들이 국정조사를 하는데 사건과 관련된 새로운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도 이상합니다.
이 나라의 미래가 암울해 보이는 건 권력자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만 골라서 장관을 시킵니다. 세월호 사건 때 구조에 바쁜 해경 헬기를 타고 진도로 갔던 해양수산부 장관은 팽목항에서 수염을 기르며 유임되었는데, ‘바른말 하는 장관’으로 알려진 유진룡씨는 후임이 결정되기도 전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서 면직되었습니다. 마침 문체부 제1차관 자리도 공석인데 뭐가 그리 급했을까요?
 
국회의원들은 시간 낭비의 달인들입니다. 지금 국회가 해야 할 일은 청와대와 싸우는 것이지만, 국회의원들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을 치른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대학에 특례입학 시키자며 정원의 1퍼센트를 특례입학 시킬 것인가 3퍼센트로 할 것인가 자기들끼리 다투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보도자료까지 내어 대학 특례입학을 원치 않는다고 밝혔겠습니까?
청와대는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가 요청한 자료 205건 중 단 7건만 제출했다고 하니 청와대가 국회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욕을 당했으면 국회의원 300명이 모두 청와대로 몰려가 시위를 벌여야 할 텐데 국회의원들은 가만히 청와대가 장관으로 불러주지나 않을까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립’은 민주주의의 요체라 하지만, 이제 이 말은 코웃음을 부르는 옛말이 되었습니다. 입법, 행정, 사법부가 권력과 역할을 나누어 갖고 상호간에 견제하고 균형을 유지하여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막는 ‘삼권분립’ 대신 대통령이 대표하는 행정부가 나머지 두 부서를 거느리는 ‘삼권불립’(三權不立)이 자리를 잡아가니까요.
 
참지 못한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은 국회에서 노숙하며 농성하고,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단원고 학생들은 안산의 학교에서 여의도의 국회까지 뙤약볕 아래 도보행진을 하며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유가족들은 ‘4.16 참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자고 하지만, 정부와 새누리당은 위원회는 구성하되 수사권과 기소권은 부여하지 말자고 하니 진실이 밝혀지는 게 두려운 걸까요?
지난 5월 국회에서 정홍원 국무총리는 청해진해운이 사고 당일 국가정보원에 세월호 사고를 보고했다고 인정했지만, 우리는 아직 왜 그 사고를 해경에 보고하기 전에 국정원에 보고했는지, 보고를 받은 국정원이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세월호 사건, 지오피 총기 사건, 4대강의 오염, 재앙을 예고하는 잠실 제2롯데월드…. 수수께끼가 늘어날수록 분노와 절망도 자랍니다.
엊그제는 제헌절이었지만 태극기를 걸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헌법이 처음 제정, 공포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삼권분립’이란 말처럼 실소를 자아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데, 국민인 우리는 조국이 자꾸 낯설어집니다. 
삭막한 거리엔 무궁화가 어여쁘지만 봄마다 벚꽃 개화를 외치던 언론은 무궁화의 개화엔 입을 열지 않습니다.
 
< 김흥숙 - 시인 >


6월12일 전남 순천의 야산 매실밭에서 발견된 변사체가 세월호의 실소유주인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으로 확인됐다고 경찰이 22일 밝혔다. 변사체 발견 때 이미 부패가 심해 식별이 어려울 정도였다니 실제 사망은 그보다 훨씬 전일 것이다. 그사이 정부는 유씨를 잡겠다며 군 병력까지 동원해 해안을 봉쇄하고 전국적인 검문·검색을 벌였으며, 반상회까지 열었다. 유씨가 머물렀다는 경기도 안성 금수원과 주변 건물 등을 압수수색했고, 유씨의 가족·친인척·측근들을 범인 도피 등의 혐의로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기소했다. 온 나라를 뒤흔든 꼴이다. 바로 전날인 21일에는 검찰이 유씨에 대한 6개월짜리 사전구속영장을 재발부받으면서 “추적의 꼬리를 놓지 않고 있어 검거는 시간문제”라고 장담도 했다. 대체 어떤 꼬리를 쫓고 있었는지 묻고싶다. 정보력과 수사력 모두 부실하기 짝이 없는 무능이 황당하고, 그 결말이 어이없다. 이런 국가기관을 어떻게 믿으라하나.
 
국가기관이 제 할 일을 못하면 어떤 참혹한 결과가 빚어지는지는 세월호 참사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경찰·검찰은 참사의 주요 책임자인 유씨를 찾는 과정에서도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 5월25일 별장에서 유씨를 놓친 뒤 대대적인 주변 수색을 벌였다지만 정작 변사체는 한참 뒤 주민 신고로 발견됐다. 변사체를 발견한 곳이 유씨가 20일 넘게 머물렀던 별장 부근인데도 경찰은 유씨와의 연관성을 떠올리지 못한 채 노숙자 변사로만 처리했다. 주검 주변에서 발견된 가방이나 옷, 신발 등 유류품을 조금만 세심하게 관찰했다면 쉽게 알 수 있었는데도 놓쳐버린 것이다. 변사사건 지휘를 맡은 현지 검찰 역시 정황과 유류품을 살피는 초동수사의 기본을 망각한 채 단순변사로 판단했다. 검-경간 공조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경찰·검찰 모두 기본 중의 기본도 무시한 채 대충 넘기는 잘못을 반복하면서 엉뚱한 ‘꼬리 잡기’에 수사력만 낭비한 꼴이다.
 
검경은 변사체 DNA와 지문 감식 결과 유씨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조차도 믿지 못하겠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유씨가 순천 별장에 마지막 흔적을 남긴 5월25일 즈음에 숨졌다고 하기엔 변사체 부패 정도가 비정상적으로 심하고, 사망 원인과 경위가 석연찮다는 이유에서다. 변사체 발견 뒤 신원 확인까지 40일이나 걸린 점 등을 들어 다른 배경이 있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이 정도면 그 자체로 위기라고 봐야 한다. 세월호 참사의 모든 책임이 유씨에게 있는 양 수사 분위기를 몰아 정부 책임을 가리려 들었다는 의심이 파다한 터에 그런 불신은 더 위험하다. 유씨 사망 경위를 제대로 밝히고, 세월호 참사 책임을 가리는 수사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