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캐나다까지 온 세월호 유족

● 칼럼 2015. 3. 28. 13:08 Posted by SisaHan

우리에게는 2건의 끔찍한 대형 침몰사고가 기억에 생생하다. 하나는 1300톤의 군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6800톤이 넘는 여객선이었다. 5년 전에 서해 북방해역에서 두 조각이 나 가라앉은 천안함, 그리고 다른 하나는 1년 전 서남해 진도 앞바다에서 수장된 세월호 사고다.
두 선박의 침몰사고는 군함과 여객선이라는 선박의 특성과 사고의 성격에서 원래 큰 차이가 있었지만, 사후 뒤처리에서 신속히 원인을 따지고 서둘러 마무리한 천암함과 달리, 원인과 진상규명이 더디고 답답한 점에서 천암함과 세월호는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두 사고는 대형선박 사고라는 공통점 외에 둘 다 가까운 연근해에서 어이없게 사고가 났다는 점, 무고한 인명이 각각 46명과 304명이나 유명을 달리해 가족과 국민들에게 충격과 슬픔을 주었다는 점, 그리고 구조와 신속대처에 부실했던 점도 비슷했다.
그러나 가장 비슷하게 닮은 사실은, 하나는 일단 결론을 냈고 하나는 규명작업이 지지부진하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두 사건 모두 원인이 명쾌하게 납득할 만한 것은 여전히 나오지 않은 채 의혹과 미궁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암함은 북한의 잠수정에 의해 전광석화처럼 불의의 어뢰공격을 당해 침몰했다는 결론과 해저에서 건져올린 어뢰 부속품들이 증거로 제시되었다. 군과 정부, 대부분의 언론들이 이를 근거로 북한을 범인으로 단정해 비난공세와 대화단절의 압박에 나섰고, 덩달아 동맹국들도 북한비난에 가세했다. 이같은 정부와 군의 조사내용과 결론을 일부러 믿지 않으려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명확한 범행의 근거와 전후 상황, 부인할 수 없는 증거물이 나왔는데 어느 누가 의심을 할까.
하지만, 단 몇가지 만으로도 어쩐지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어뢰 표기글자가 어떻고 분말성분이 어떻고 등의 논란은 제쳐두어도 그렇다.
당시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전개되던 해역인데, 북의 잠수정이 몰래 침투해 어뢰를 쏘아 군함을 격침시키고 유유히 달아났다는 북한 해군의 세계 최상급 신출귀몰 작전능력을 과연 믿어야 하는가. 접적지역에서 적의 침투공격도 전혀 탐지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해, 꽃같은 부하장병 46명을 잃고 함정마저 폭발해 가라 앉았는데, 배와 생사를 같이 했어도 모자랄 함장과 그 윗선 지휘자들 모두가 패장들이련만 어느 한사람 책임지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고 승승장구하는 이상한 군대, 그렇게 서둘러 봉합한 정부….


1년이 다가오는 세월호 참사 당시를 회고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화면을 통해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대한 선박이 서서히 기울고 바다에 잠겨가는 그 순간에, 해경 구조선이랍시고 주변을 맴돌다 선원들만 건져 올려 사라져간 줄도 모르고 공포의 배 안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며 기다리며 또 애태우고 발버둥 쳤을 3백여명의 무고한 젊은이들과 부모 형제 자매들…, 발만 구르며 타는 가슴을 찢었던 그들의 가족들-.
그렇게 세기적인 무능과 무책임의 희생자들이 된 억울한 수장자들의 유족 가운데 단원고학생 부모 두 명이 지난 주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 초청으로 캐나다를 찾았다. 그들은 토론토와 윈저, 밴쿠버를 방문해 한인동포들을 만나, 사고 그 이후의 가시밭길을 소개하고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가시밭길’이란 은폐와 차단과 오도와 방해, 망각과 지연과 적대 등 그들 앞을 가로막은 온갖 장벽들과의 투쟁이며, 진실과의 싸움이다.


해외에 와서까지 도움을 청해야 할지 망설였다는 그들의 하소연은 우리를 더욱 안타깝고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 엄청난 사건이 1년을 맞는데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 부정과 불합리 개선의 계기가 될 것이라던 기대가 사그러들고 있다는 것, 권력이 개과천선 하기는 커녕 진실을 덮고 호도하기에 급급한 현실이 다시 분노를 일군다. 억울하게 수장된 이들의 꿈과 희생이 헛되어가고 있는 망각의 허탈감, 유족의 처절한 아픔과 트라우마가 위로와 치유를 향하는 것이 아닌 갈등과 적대의 중병으로 몰아가는 세태가 슬픔을 안긴다,
과연 세상은 진실과 정의 보다는 거짓과 눈가림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원리로 돌아가는 것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한 유족들의 몸부림을 감싸며 박수와 응원으로 마음을 전하는 소수 동포들의 뜨거운 인정 뒤에서, 역시 거대한 벽 앞에 선 듯한 답답함의 속내들을 보는 것은 동시대 우리 모두의 아픔과 숙명인 것일까.


< 김종천 편집인 >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이 세계 최저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유엔이 ‘국제 행복의 날’(3월20일)에 맞춰 세계 143개국을 상대로 행복감 조사를 한 결과, 우리나라가 118위를 기록했다. 중국·일본은 물론이고 중동의 팔레스타인, 아프리카의 가봉과 같은 수준이라고 한다. 더구나 지난해보다 순위가 94위에서 24계단이나 떨어졌다. 놀랍고 부끄럽고 한번 더 생각하면 참담하기 짝이 없는 결과다.


설문 내용을 살펴보면, ‘그런 결과가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조사 전날 많이 웃었는지, 피로는 잘 풀었는지, 온종일 존중받으며 지냈는지, 하루의 상당 부분을 즐거운 감정 상태로 보냈는지, 뭔가 흥미로운 것을 하거나 익혔는지를 물었다. 어제 하루를 돌아보며 이 물음에 자신있게 ‘네’라고 답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많이 웃기보다는 표정 없이 긴장하여 지내고, 존중받기보다는 무시당하고, 피로를 풀기보다는 피로가 거듭 쌓인 채로 허덕거리며 지내는 것이 이 시대 많은 사람의 일상이 아니겠는가. 손학규 전 민주당 의원이 ‘저녁이 있는 삶’을 구호로 내걸어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이런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이번 조사 결과를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병증에 대해 경고음을 보낸 것으로 해석하는 게 옳다. 우리는 극히 성과 지향적인 문화에서 살고 있다. 인간에 대한 존중보다는 물질로 치환되는 성과를 앞세우는 게 현실이다. 또한 우리는 극단적으로 경쟁 지향적인 문화에서 살고 있다. 낙오하지 않으려면 잠시도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늘 피로감이 누적된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피로사회’이기도 하다. 수평적인 대화 문화도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권위적이며 위계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가 많은 조직을 지배하고 있다. 우울증 환자가 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1위가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불균형 성장과 억압적 질서 속에서 우리 생활문화의 결 자체가 깊이 뒤틀려 있음을 이번 조사 결과가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몸에 병이 나면 우선 쉬어야 한다. 쉬면서 어디에 고장이 난 것인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병이 몸에 신호를 보낸 것이다. 국민 행복감이 세계 최저 수준에 그친 것은 심각한 신호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달려온 것과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더 이상 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문제로 인식하는 게 늘 해결의 첫걸음이다.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 특위)를 훼방하는 정부의 행태가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특위의 정식 출범을 한없이 늦추고, 조직과 예산을 축소하려 드는가 하면, 파견 공무원을 통해 특위 활동을 일일이 감시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무엇이 두렵고 켕기기에 이러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특위의 이석태 위원장은 23일 기자회견을 열어 “특위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해치는 일련의 사태”와 관련해 대통령 면담을 요구했다. 그가 전하는 특위의 사정은 참담하다.
특위가 공식 활동을 시작하려면 조직과 예산이 정해져야 하는데, 정부는 2월17일 특위가 내놓은 조직·예산안의 처리를 한 달 넘게 미루고 있다. 특위 위원들은 5일 임명장을 받은 뒤 조사활동은커녕 실무직원 선발도 못한 채 안타깝게 시간만 보내고 있다. 참사 1주기인 4월16일 이전에 특위가 출범하려면 이번주 안에 조직·예산안이 확정돼야 하는데, 주무 부처인 해양수산부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고 관련 부처 사이엔 협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특위 출범을 방해하고 고사시키려는 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다.


특위의 조직과 예산 축소가 검토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특위는 이미 새누리당 추천 위원들의 문제제기 등에 따라 애초 구상했던 조직과 예산을 대폭 축소한 터다. 사업비는 38%나 줄였다. 정부·여당이 여기서 더 줄이려 든다면 특위의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진다고 한다. 그렇게 특위를 파행에 몰아넣는 데만 열중한다면 비판과 저항은 피할 길 없을 것이다.


정부는 특위의 독립적 조사활동을 마뜩잖게 여기고 경계하는 모양이다. 1월에도 해수부 파견 공무원이 함부로 가공한 자료를 근거로 친박 실세라는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이 특위를 “세금 도둑”이라고 헐뜯는 일이 벌어지더니, 며칠 전에는 파견 공무원이 특위의 주간 활동 내역과 다음주 활동 계획이 담긴 내부 문건을 청와대, 새누리당, 해수부, 경찰 정보과 등에 이메일로 유출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세월호 특별법의 명문규정을 어긴 위법으로, 특위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뿌리부터 흔드는 행위다. 개인적 일탈일 수 없는 만큼 배후를 찾아 책임을 물어야 한다.


지금은 세월호 특위가 정상적으로 출범해 활동할 수 있을지가 의심되는 위기상황이다.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다짐한 박근혜 대통령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특위를 가로막는 온갖 행태를 멈춰야 한다.



답답하고 안타깝다. 고고도 미사일방어(사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문제로 불거진 우리 외교·안보팀의 수준 낮은 대응력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외교·안보 문제의 특성상, 실상보다 정부의 일방적인 홍보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많은 시민이 장차 직면할 실망의 크기를 생각하면 화가 난다.
그래도 박근혜 정부의 정책 중 일반 시민으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분야가 외교·안보라니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홍보와 의전을 앞세운 화려한 정상외교가 불러일으키는 착시현상과, 경제·사회·정치 등 다른 분야에 비해 나아 보인다는 상대평가 탓이 클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호사도 오래갈 것 같지 않다. 한반도 주변 환경의 엄중함과 정부의 안이함이, 그간 정책과 홍보의 격차에서 기인한 호시절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2년을 되돌아보면, 외교적으로 어느 하나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을 찾기 어렵다. 단지, 원칙을 높이 내건 채 상대가 그에 맞춰올 때까지 기다리는 ‘천수답 외교’를 펼쳐왔을 뿐이다. 설거지를 하지 않는 바람에 접시도 깨지 않는, 운동경기에 비유하자면 나의 득점이 아니라 상대의 실점에 의존하는, 비가 오고 나서야 비로소 삽을 들고 나서는 방식으로 일관해왔다고 할 수 있다.

북한과 일본 정책이 대표적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선 신뢰-후 문제해결’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내놓았지만, 실제로는 신뢰가 아닌 굴복을 강요해왔다. 일본에도 마찬가지다. 일본군 군대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에 진전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북한과 일본의 자책골이 제때 터져주는 바람에 홈팬을 만족시켜왔지만, 그런 상황이 후반전에도 계속된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을 두둔하고 우리나라를 헐뜯는 듯한 웬디 셔먼 미국 국무차관의 최근 발언은 이런 방식의 외교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징후다.


천수답 방식의 외교·안보 정책은 북한, 일본 정책에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1~2년 전부터 줄곧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예고가 제기됐음에도 기회주의적 태도로 소일해오다가 발등의 불이 되고 나서야 호들갑을 떠는 사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에 대한 대응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은 미국의 1급 동맹국인 영국이 총대를 메는 바람에 부담을 크게 덜었다고는 하지만, 주체적 결정에 따라올 실익은 크게 줄었다. 사드는 상황과 사람에 따라 ‘전략적 모호성’(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요청도 협의도 결정도 없다는 ‘3가지 부정’(민경욱 청와대 대변인), ‘제3국 간섭 배제’(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와 ‘국익에 최우선을 둔 결정’(윤병세 외교부 장관)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도대체 이 문제를 결정하는 주체는 누구이며, 조율된 입장은 있기나 한 것인지 헷갈린다. 5월 열리는 러시아의 승전 70주년 기념행사가 한달 남짓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주위 눈치를 보며 좌고우면하고 있는 것도, 갈수록 초청한 쪽과 말리는 쪽 앙쪽의 불만만 키울 뿐이다.


천수답 외교와 ‘환상의 짝’을 이루는 것이, 국제정세와 상대를 살피지 않고 모든 걸 ‘우리 중심’으로만 바라보는 ‘천동설 인식’이다. 좋은 예가,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중동을 다녀온 뒤 부흥회 간증에서 하듯이 쏟아낸 ‘제2의 중동 붐’이니 ‘하늘의 메시지’니 하는 말이다. 이야말로 중동이 겪고 있는 곤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기중심적 인식이다. 중동의 최부국 사우디아라비아마저 달포 전 신용등급이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격하될 정도로, 중동의 거의 모든 나라는 지금 석유값 폭락으로 경제적 곤경을 겪고 있다. 또 ‘이슬람국가’(IS)의 발호와 이란 핵 문제로 인한 안보 불안이 이 지역을 사로잡고 있다. 이런 마당에 돈 벌러 “대한민국 청년을 나라가 텅텅 빌 정도로” 중동으로 보내자는 독려를, 이들이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다.
외교는 국익을 걸고 상대와 겨루는 ‘총 없는 전쟁’이다. 천동설의 자기중심주의와 천수답의 소극성으로는 절대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는 경기다.
< 오태규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