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글마당] 인간과 종교

● 교회소식 2015. 9. 11. 13:05 Posted by SisaHan

하늘과 땅 그리고 만물을 지으신 이가 반드시 있으니 이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창:1:1, 2:1). 하나님께서는 특히 인간에게만 자신의 영을 호흡으로 불어 넣어 주셔서 창조하셨다. 따라서 식물은 육만 있고 동물은 육과 혼을 지녔고 인간만이 육과 영혼을 모두 구비하고 있다. 때문에 세상에서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도 하고 영적 동물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받고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을 만든 창조주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의 능력과 이념 및 사상을 믿고 삶의 근간으로 삼아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종교는 무엇인가 살펴보면 각 종교는 피조물인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종교마다 인간이 주님으로 되어 있다. 단지 기독교만이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본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인간의 형체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인간으로 볼 수도 있다. 최초 인간 아담 하와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이 떠나게 됨으로써 영생에서 사망에 이르자 그때부터 인간은 죽음을 무서워하였다. 생로병사로 죽어가고 있는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력함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어떤 초인간적인 능력의 신관(神觀)을 추구하며 마침내 사후에 내세의 구원의 소망까지도 갖게 됨으로써 종교의 발생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종교의 발생 과정을 보면 그 당시의 문화, 생활여건, 발생지역 각 종족에 따른 훌륭한 지도자의 탄생 등으로 종교가 발생되었기 때문에 종교마다 신관과 구원관 심지어 이념과 사상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현재 주요 종교 일람표를 보면 18개의 종교가 제한된 지역에서 각각 발생하였다. 그러나 종교는 전파가 생명인데 18개 중 모르는 종교가 대부분이다. 단 기독교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종교는 언제나 그 존재론적 면에서 초월적인 실재론에 입각한 신관을 갖는 신앙과 체험에서 그 중심 내용의 특징과 본성은 사랑의 체험으로 이는 초월적 절대자인 실재자로부터 주어지는 사랑에 의하여 구원을 받으므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사명일 것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권선징악, 또한 인간을 사랑하는 이념과 사상이 있어 근본 진리는 동일 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마다 이념과 사상, 교리와 의식, 구원관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이 발생하고 또
한 근본 진리에서 벗어나는 등 종교간 교파간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분쟁으로 얼마나 많은 인간이 죽어 갔는가? 오늘날에도 기독교와 마호메트교 사이의 투쟁, 마호메트교 안에서도 시아파와 수니파의 교파간의 싸움으로 인간 서로가 죽이고 죽어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창조주에게 피조물들은 절대 순종해야 할 것이다.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다. 민족이 다르고 종교가 다를지라도 모든 인간을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 상에서 죽게 하시고 3일만에 부활로 승천하게 하셨다. 또한 다시 보내시어 백보좌 심판에서 모든 인간에 대해 영생과 영벌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백보좌 심판대에는 두 종류의 책이 있는데 하나는 모든 죽은 자들이 이 땅에서 행하였던 행실이 낱낱이 기록된 책이고 하나는 구원 받는 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책이다. 이 책들의 내용과 심판의 기준은 인간으로써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만이 영생과 영벌을 결정하시기 때문이다. 끝으로 세상의 어느 종교의 교주(敎主)가 천지만물을 만들었으며 또한 주검에서 부활한 적이 있었는가? 하물며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사후의 영의 나라를 창조할 수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았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3)

< 이승고 - 토론토 영락교회 장로 >



몬트리올에서 자주 보는 사인 중의 하나가 ’Detour’라는 사인입니다. 몬트리올엔 겨울철과 공사철 두 철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니까요. 길이 막혔으니 돌아가라는 사인이지요.
바쁜 중에 만날 때면 괜히 애꿎은 공사장 근로자들과 시청 직원들을 욕하기도 합니다. 불편하기도 하고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요.
그러나 그 사인이 없어서 그 길로 바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슨 일이 생겨도 생겼을 겁니다. 제가 아는 분은 이 사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가 큰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 답니다. 그리고 보니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위한 길이고 사는 길이었네요.좀 불편하기는 해도요.


하나님도 때론 길을 돌리십니다.
누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 앞의 길도 아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3장 17,18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detour 사인을 두셨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길은 블레셋 땅을 경유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물론 빠른 길로 가면 좋겠지만 그 길에는 길목마다 그 지역 나라의 주둔군이 배치되어 있어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겁먹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애굽의 종살이로 돌아갈 수 있기에 하나님은 돌아가는 길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늦기는 해도, 돌아가는 수고가 있기는 해도 돌아갔기에 약속의 땅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빠른 길을 찾습니다. 빠른 응답을 기다립니다. 빠른 복을 사모합니다. 그것이 형통함이고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그러면 의심하고 실망하고 불신하고 원망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돌아가는 길도, 더디더라도, 그 길 또한 주님의 계획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알고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빠른 길은 오히려 해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혹 하나님의 도움으로 빠른 길도 통과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스라엘은 “무엇보다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모른다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오늘도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주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기도 응답이 빨리왔으면 하지요? 그러나 늦어져도, 더뎌도, 너무 초조해 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려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의 앞길도, 필요도 잘 아십니다.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우리를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지요?
그러면 응답뿐만이 아니라 응답의 때도 맡기세요.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에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해 주실 겁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더딘 길도 주님이 동행하는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출애굽기 13:21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며 걸음을 인도하시고 계시네요.
몬트리올과 토론토의 detour는 우리가 알아서 갈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생명의 길 가다 만나는Detour는 주님이 친히 인도하십니다. 참으로 감사하시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지금 혹 가던 갈 한복판에 크게 자리잡은 Detour 사인 보고 계신가요? 아니면 투덜대며 벌써 돌아가는 길로 접어 들었나요? 서로 원망하기 보단 크게 감사하면서, 목청 높여 찬양하며 드라이브 하면 어떨까요?
그 길도 하나님이 열어주신 은혜의 길이거든요.
오늘도 막다른 길 앞에서 씩씩 대고 있을 주님의 자녀 모두에게 평안을 기원합니다.

< 김진식 목사 -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




평양 대동군 출신의 이산가족 이창용(91)씨의 부인 조갑순(82) 할머니가 9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적십자사 강당에서 열린 ‘2015 추석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 선정 추첨에서 함께 온 남편이 떨어지자 아쉬움의 눈물을 훔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는 이날 오전 열린 인선위원회의 고령자와 직계가족 우선 원칙에 따라 생존자 6만여명을 대상으로 상봉 후보자 500명을 컴퓨터로 무작위 추첨했다.
<이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