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꼐 참된 예배드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항상 차이점이 있게 마련이다. 거짓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성도답게 신실하게 예배드리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바리새인과 같이 자기의 의로움을 의지하는 예배자도 있을 것이요 또 세리와 같이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전인격을 아름다운 것으로 받으셨고, 그 다음 그의 재물을 믿음에 의해 드려진 것으로 받으셨다. 만약 우리의 인격과 제물이 열납된다면 그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아벨의 제사는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기록 가운데서 첫번 본보기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통이 인간의 타락이고, 완전히 두절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자비>이다.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달려야 하는 경주가 있다. 그것은 <섬김>의 경주요<고난>의 경주이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코스>는 복종인데 우리는 능동적으로 때로는 수동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믿음과 인내는 모든 것을 정복하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인내는 우리의 생활속에서 언제나 생생하게 역사 되어져야 한다. 크리스천으로 잘 달려가게 격려하고 또 원기를 북돋아 주는 전능하신 분, <주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주예수그리스도는 믿음의 시작과 끝이시며 보상자이심을 명심하자! 늘 주님을 바라보며 생각하자! 사역자(교역자)들은 주 하나님께 대해 책임을 져야 하기에, 그들은 충성을 다 해야하며, 열심을 다해야 된다. 교역자들은 주님께서 고용한 사역자들이며 주님은 교회의 이익을 위하여 그 교역자들과 사귐을 가지고자 영적인 영향력을 구사하고 계신다. 일반적으로 성령은 목회를 통해서 활동하시며, 목회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효과를 낼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동시에 주 하나님의 손이 이 양자(목회와 성령)를 모두 지탱해 주신다. 우리 성도들은 알맹이 있는 믿음생활, 영혼이 꽉차인 신앙생활, 실재가 있는, 내용물이 차있는 믿음생활, 거룩한 욕망으로 채워진 기도생활, 참된 자비에서 우러나온 구제생활, 주일은 하나님께 대한 영혼의 참된 봉헌이 드려지는 신앙생활인지, 내 자신을 돌아보고, 처음에 복음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떻게 환영하였던가를 기억하자!


우리는 때때로 내 자신이 알고 있는 바가 적다는 것(부족함)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욱 나아지게 될 것인가! <사역자들은 비난 들을 수밖에 없는 악한 일들을 하지 않음으로 적대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더욱 더 돌이켜보아 결코 흠잡힐 것이 없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반대와 비방은 피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때때로 타락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진리에 대적할 것이며, 수시로 사역자들과 진리를 고백하는 자들을 비방할 것이다. “축복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향하여 좇아갔으나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께서는 그 축복을 <야곱>에게 주시고, 유대인들은 <에서>와 같이 의의법(율법)을 추구하여 축복을 놓치고 말았다. 그들은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되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야곱>처럼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에 대한 믿음으로 그것을 추구하고, 강제로 그 축복을 획득하였다. “선한 길을 따르는 사람은 언제나 선한 보호자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주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평안한 속에 있을때는 시련을 겪게 해주시고, 시련에 직면할 때는 이전의 경험을 통하여 이를 극복하게 해주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에 의하여 행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에게 공평하고, 관대하며, 온유하고, 겸손한 행위로 대하여야 할 이유들을 본보이고, 반드시 사람들과 사회의 품성을 높이는데 유익한 말들로 생활 속에서, <삶의 구원>을 실천함이 얼마나 아름다운 <성도>일까…! 옛날에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관용과 따스함으로,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온유한 성품을 지니고, 그 온유함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내야하고, 대접함으로써 전도의 문을 넓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오라! 복된 자여!”! 라는 분깃을 누리지 않으면 안된다. 끝날에 복된 업을 누리며 택함받은 자 가운데서 분깃을 누린다는 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분깃에 만족하고 주 하나님의 뜻을 지키며 살아가자! 주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안에서, 어떤 직업이나 조건을 우리에게 주셨든 간에 우리 자신을 거기에 적응시키고, 그것으로 만족하며, “높은 일들을 바라지 말자”. 높은 직위의 수치보다, 비천한 위치의 신뢰가 더 더욱 중요하고, 아름다운 <덕>이 되는 것이다(安分自足安心立命).


지혜있는 자는 깨닫게 될 것이다. 주 하나님의 사랑의 영향을 받고, 지배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빛에 의해서 조명받게 될 것이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더 없이 겸손하고, 공손하게, 말과 행동으로, 우리 자신을 나타내게 하는 것이다>. 주님의 오시겠다는 말씀은 그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님께서 확실히 말씀해 주신 그의 재림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로 하여금 마음 속의 모든 문제와 고통을 길이 참고 견디게 해준다.(빌4:5).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도와달라고 외치는데…
선뜻 도우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때 어느 사람이 말했습니다.
“조용히 물 밑을 봐요. 뭐가 보입니까 ?”
그래서 “바닥이 보입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살려고, 살아보려고 힘쓰지 마세요. 그냥 바닥까지 내려가서 힘껏 치고 올라오세요.”
허우적대던 사람이 바닥으로 내려가 바닥을 치고 올라와 물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실패’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고난과 역경’을 당해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 어떤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까?
바닥은 죽는 자리가 아니라 치고 올라오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바닥은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닥을 향해 힘차게 공을 던지면 엄청난 힘으로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바닥은 절망의 자리가 아닙니다. 바닥으로 내려가지 않으려고,안빠지려고 허우적대다 보면 금방 힘이 빠져 익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힘을 주면 금방 지치고, 힘이 빠집니다.
그러니 자신있게 바닥으로 내려 가셔도 됩니다.
내가 실패한 자리, 고통당한 자리가 다시 솟구쳐 올라오는 능력의 자리가 될 것을 믿으십시오.


사람은 닫힌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닫힌 열 개의 문이 또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려간다고, 바닥을 친다고 죽진 않습니다. 어떡하든지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하나의 문을 열 수는 있겠지만, 열 개의 문이라는 또 다른 다양한 문제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기’라는 것을 선택합니다. 인생도 포기, 삶도 포기, 가정도 포기, 학업도 포기를 합니다. 그 포기가 나 한 사람의 아픔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전염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저 밑바닥에서 좋은 믿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와도, 어려움이 와도, 고난이 와도, 질병이 와도 사탄이 던져주는 시험으로 인하여 염려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옥토란, ‘똥을 품고, 쓰레기를 품고, 오물을 품었기 때문에 비옥하게 된 땅’입니다. 힘든 이민자의 삶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평안이 되길 원하시면, 눈에 들어간, 어깨에 들어간, 손과 발에 들어간 힘을 조금만 빼십시오. 그리고 바닥으로 내려가십시오. 우리가 다시 기억해야 할 바닥은 ‘죽는 곳이 아니라 다시 살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곧 추운 겨울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는 겨울이 춥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월동준비를 하게 됩니다. 올 겨울은 여러분이 주님의 사랑으로 따뜻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정성남 목사 - 갈보리장로교회 담임목사 >



[한마당] “캐나다가 선진국이다”

● 칼럼 2015. 11. 6. 20:49 Posted by SisaHan

30~40년만에 고국을 방문하는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1~2년 만에 다시 찾은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하루가 다른 발전상을 토로한다. 널찍한 새 길들이 쪽쭉 뻗어 차량들로 넘쳐난다. 시속 300Km KTX가 씽씽 내달려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된지 오래다. 으리으리한 빌딩 숲은 밤새도록 불을 밝히고, 화려한 점포들, 백화점과 고급 음식점엔 잘 차려입은 고객들로 넘쳐난다. 생동하는 다이내믹한 세상, 한국이 이만큼 발전했구나! 대단하다. 경제력 세계 10위권이라는 말이 헛소리가 아닌 거다. 집집마다 대형 LED로 통일한 듯한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이 또한 마냥 즐겁고 태평스럽기만 해서 부자나라 한국을 실감할 것 같다. 웃고 떠들고, 질펀한 오락 프로그램과 눈요기로 가득한 부유층 드라마들, 그리고 날마다 승부를 벌이는 프로 스포츠의 흥미진진 게임소식들, 여기저기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요리와 맛집 프로들…. 잘 살게 된 나라 한국,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한국은 그렇게 휘황한 겉모습을 자랑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넘치는 차량행렬 속에서 이상한 낌새가 드러난다. 분명 정상시력을 점검하고 위법을 가르치는 시험도 거쳐 면허들을 줬을 텐데, 색깔을 제대로 구분 못하는 운전자가 왜 그렇게 많은 것일까. 빨간불 신호등인데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그냥 내달린다. 그게 돈벌이에 바쁜 택시는 물론이고, 일반 개인 차량들도 눈치껏 색맹이 되는 것이다. 끼어들기는 왜 그렇게 싫어하고 절대 불용하는지, 살벌하기 그지없다. 옆에서 끼어들려는 차를 손짓하여 허용해주니, 뒷 차가 빵빵대며 난리다. 네가 뭔데 괜시리 끼어들게 해서 자기까지 늦어지게 하느냐는 고약한 심보의 표현이다. 양보한 사람만 내가 잘못했나? 민망해지는 인정머리 없는 세태다. 다들 그렇게 운전하고 살아가는데, 나만 신호 잘 지키고 양보운전하면 공연히 머저리가 된 것 같은 이상한 세상이다.


하나 더 살펴보자. 언론은 왜 천편일률인가? 가까운 인터넷에서는 청년들의 3포시대-5포시대다 비명이 들리고, 노동개악이라는 외침이 넘쳐나고, 대통령이 독불장군이다 비판하고, 국정원이 못된 짓을 했다 바꿔라 등등 술렁대는데도, 모든 텔레비전과 주요 신문에서는 찾아 볼 수 없이 그저 태평성대다. 밤낮 쉴 새없이 정치해설이랍시고 노골적인 정부여당 추켜세우기와 야당 흠집내기 경쟁으로 특히 노인들의 하루를 오직 자만심으로 채워주기 바쁜-, 낯뜨거움도 미안함도 내팽개친 종편 TV들…. 공영도 마찬가지여서, 90%의 직원이 반대하는 인물을 KBS사장 후보로 강추하는 일은 왜 벌어지는가.


그렇게 한 두 가지만 정상이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세상에 하나님 말고 완벽한 것이 어디 있나. 그런데, 따져보면 이상한 것들이 너무 많다. 아니 정상 보다 이상이 훨씬 많아서, 정상적인 것들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라는데 문제가 있다.
요즘의 교과서 국정화 논란만 둘춰 봐도 비정상의 심각한 병증은 쉽게 알 수 있다. 왜, 학생들도 교사들도, 역사학자들도, 국민들도 싫다는 데, 국정교과서는 밀어 부치는 것인가. 유엔서도 하지말라 하고, 몇몇 독재국가들만 고수한다는 데도,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게 사명‘이라던 대통령이 오히려 독단과 강경일변도로 나서는 게 정상이고 선진일까. 여론을 수렴하는 행정예고 이전에 벌써 결론을 내놓고 예산을 몰래 배정하는가 하면 비밀 TF까지 가동하고는 거짓으로 둘러대는 국민무시의 눈속임은 도가 지나쳤다. 역사학자 90%가 좌파 빨갱이라며 반대 시민들을 무조건 쳐부술 적군으로 취급하는 전쟁불사의 외침은 그야말로 비정상의 극치요 독재의 폭거에 다름 아니다.


한 두 가지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그런데 비정상의 일상화, 보편화라고나 할까. 더구나 지도자, 고위직들이 자계와 근신은 커녕, 비정상을 밥 먹듯 도리어 ‘솔선’하니, 일반 국민들은 ‘나 하나 쯤’의 소극적인 수준을 넘어서 ‘다들 하는데 뭘 대수라고…’ 하는, 비정상에 대한 무감각의 동질화와 일반화가 나라 전체 곳곳에 번져버렸다. 알면서도 어기는 교통신호 위반도 그 사례요, 공무원은 공복일 뿐 국민이 주인이라는 헌법정신을 깔아뭉개는 정부고위직들의 뻔뻔한 행태가 그러하며, 나아가서는 정부 여당이 아무리 잘못해도 지지율로 받쳐주고, 선거 때면 승리를 안겨주는 국민들의 정치 안목과 수준이 그걸 입증해준다. 선진을 넘본다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겉은 화려하되, 그렇게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일들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양복에 갓 쓰고 짚신을 신은 것처럼 기형적, 후진적 모양새를, 안타깝게도 부정할 도리가 없다.


캐나다에 사는 우리가 신호위반을 흔히 볼 수 있는가? 정부정책에 반대 목소리를 낸다고 적군으로 때려잡으려 하던가? 스캔들 정치인이 떵떵거리며 연명하는가? 지난 10.19 연방총선은 이 나라가 선진국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보수당이 잘못하니 단번에 166석에서 99석으로 줄여버렸다. 34석이던 자유당은 무려 150석을 얹혀주어 일거에 정권을 맡겨버렸다.
정치인을 부릴 줄 알고 주인 노릇하는 깨어있는 국민과 그들에게 사심없이 헌신 봉사하는 정치인들의 나라, 그게 바로 선진국이 되는 길이다.


< 김종천 편집인 >



4대강 사업 때도 꼭 이랬다. 반대 여론이 아무리 거세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이 반대 성명을 내며 강력히 저지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4대강 사업 ‘확신범’이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관한 한 박근혜 대통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엊그제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역사교과서 논란의 시작과 끝에는 ‘국정화 확신범’ 박 대통령이 있다.


이런 확신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자연과 인간에 대한 무지와 오만, 그리고 비뚤어진 역사관 등에 기인하는 측면이 클 것이다. 하지만 공인의식의 결핍도 이들을 빗나간 ‘확신범’으로 만드는 데 적잖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지도자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역할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인식하고 행동해야 함에도 이들 두 대통령은 공공의 이익보다는 사적인 이익을 우선시했다. 그 결과 주요 국가기관의 공적 기능은 위축되고 사회 공동체는 파괴되는 등 나라의 기본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국가 권력기구와 우리 국토를 자신의 개인 소유물처럼 여겼다. ‘국가 안보’를 책임져야 할 국가정보원과 국군 정보기관을 ‘정권 안보’ 기관으로 전락시킨 건 전형적인 권력의 사유화였다. 이들 국가기관을 이용해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는 데 적잖은 공헌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우호적인 박근혜 정권을 출범시켰다. 결과적으로 주요 국가기관을 퇴임 뒤 자신의 사적인 안위를 위해 활용한 셈이다.
한반도의 젖줄인 4대강도 자기 앞마당을 지나는 개울물처럼 취급했다.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십조원의 국민 세금을 쏟아부어 임기 안에 뚝딱 해치워버렸다. 한반도를 적시며 수만년을 유유히 흘러왔고 앞으로 후손에게 온전히 물려줘야 할 4대강도 그의 눈에는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충족시키는 토목사업의 대상일 뿐이었다.


박 대통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 자체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역사관만이 정상이고, 자신과 다른 역사관은 비정상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자신의 역사관에 어긋나는 지금의 역사교과서를 자신의 생각대로 바꾸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역사라는 게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 역시 구성원의 몫이라는 인식은 찾아볼 수 없다. 전국 대학교수들의 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이 이어지고, 야당이 길거리 반대 시위에 나서고, 중고생들이 촛불을 들어도 박 대통령의 ‘소신’은 오히려 점점 강해져만 간다.
최고 지도자가 자신의 공적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 되돌아보지 않은 채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면 그 사회는 각자도생의 전쟁터가 된다. 각 영역에서 공적 역할을 하며 사회를 지탱해줘야 할 공인들도 최고 지도자를 따라 자신의 사적 이익을 좇게 된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생명 유지에만 몰두하고, 국정원과 군대,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은 정권 안보의 첨병이 되고, 국민의 공복인 관료들은 정권의 뒤치다꺼리하기 바쁘고, 사회의 앞길을 밝혀줘야 할 언론과 학자들은 곡학아세하며 정권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나팔수로 전락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점점 이런 아수라장이 돼 가고 있다.


박 대통령의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역사마저 자신의 입맛에 맞게 뜯어고치려는 박 대통령의 자기중심적이고 왜곡된 역사관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극우보수세력을 똘똘 뭉치게 하는 구심점이 돼 버렸다. 구심력이 워낙 강해 이제는 물러나려야 물러날 수 없는 형국이 됐다.
결국 우리 사회를 극심한 갈등과 분열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면서 파국에 이른 뒤에야 멈추게 될 것이다.
 공인의식이 결핍된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8년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공동체는 갈래갈래 찢기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이런 현상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 이런 일로 사회적 에너지를 낭비할 만큼 한가한 때인가. 국가와 역사를 개인 소유물로 생각하는 두 명의 ‘확신범’ 때문에 나라가 무너지고 있다.
< 정석구 - 한겨레신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