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교회서 다민족 집회로

동성애자들의 축제 ‘Toronto Pride’ 에 대항하는 한인을 포함한 다민족 교계 연합 24시간 연속 기도집회가 지난 6월30일 저녁부터 7월1일 오후까지 토론토 영락교회(담임 송민호 목사)에서 열렸다. 10여곳의 한인교회와 주요 선교단체는 물론 원주민교회 등 타민족 교회와 기독단체들도 릴레이 참여한 기도집회는 각자 많지 않은 인원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열정적인 부르짖음이 이어져 동성애 행사를 압도하는 ‘기도의 축제’로 열기가 넘쳤다.

< 사진= Ignite Toronto 제공 >

기도집회는 개회예배를 시작으로 Ian Genties 틴데일 신학교 교수의 동성애문제 강연과 David Lynn 목사(Christ’s Forgiveness Ministries)의 간증에 이어 David Lynn 목사, 토론토 전도대학 순으로 ‘동성애자들을 향해’ ‘이 땅의 청년들을 위해’ ‘교회와 교단들을 위해’ 등 10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한 시간씩 철야 합심기도를 1일 오후까지 계속했다. 기도회에는 영락교회 청년부 Ignite Toronto멤버와 찬양팀 Upstream, 새로운 교회, 시온성교회, 토론토 한인장로교회, 성산교회, 만남의 교회,함께 기도하는 치유모임, 페르시안교회, YWAM, Branches Ministry 선교회,Abundant Life Church 등 다수가 참여했다. 집회는 역대하 7장14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는 성구를 주제로 하여 참여하는 각 교회와 단체가 약 1시간 씩 기도를 인도, 철야로 18시간여 이어졌다.

집회는 김지연 목사(토론토 커넥트교회 담임: KOSTA실행이사)가 인도하는 폐회집회로 동성애자 훈련 전문가 David Lawson 씨(Journey Canada)의 강연과 찬양, 합심기도로 마쳤다.

< 문의: 647-215-0852, 647-287-5348 >


여름이면 교회 성도님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즐겨 먹는 음식이 있다. 물냉면인 듯한 비빔냉면, 이른 바 ‘반반면’이다. 원래 비빔냉면을 좋아 하늗 터에, 여름이다 보니 얼음가루가 된 육수를 자작하게 해서 먹는 맛이 그만이다.
‘Flexitarian’ 이라는 말이 있다. Semi-Vegetarian 이라고도 하는데, 반채식주의자라는 뜻이다. 이들은 채식을 하되 몇 가지 예외를 두는 사람들이다. 주로 채식을 하지만, 소시지와 같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고기 몇가지는 때에 따라 먹는다. 어찌보면 참 괜찮은 사람들인 것 같다. 융통성도 있어 보이고, 포용적이며 뭔가 열린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아 보인다.
이런 사람을 보고 당신, 왜 베지테리언이면서 고기를 먹느냐고 면박을 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게다. 모르겠다. 베지테리언 중에도 근본주의자와 같은 분들이 있다면, 이들을 향해 자유주의자라고 아니면 수정주의자라고 비난을 하고 든다면, 그럴 수는 있겠지만 음식을 가리지 않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게다. “고기 몇 점 잠깐 먹는 데 무슨 대수라고!” 그러고 보니 음식은 반반면도 그렇고 Flexitarian 도 괜찮은 것 같다.


그렇다면 ‘Flexiristian’ 이란 말은 어떨까? 이 말은 구글링을 해도 나오질 않으니 필자가 만든 신조어라 할 수 있는데, Semi-Christian, 반그리스도인이란 뜻으로 읽힐 수 있겠다.
Flexiristian, 반그리스도인, 어떤가? 요즘 세상에서 환대받을 수 있는 사람 아닐까?
그리스도인이라 하니 믿을 만하고, 그렇지만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니 경우에 따라선 불편한 거래도 가능할 것이고, 또 때에 따라선 같이 놀고 먹고 마시며 기분을 풀고 즐기기엔 딱 좋은 사람 아닌가? 세상이 좋아할 만한 타입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사탄은 물론 세상이 편해할 만한 타입이다. 물론 우리 스스로도 편안해서 선호하는 타입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를 어쩌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음식을 먹는 것과 그 차원이 전혀 다르니.
예수는 반그리스도인을 단호하게 거부하신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24절)


이는 Flexiristian, 또는 Semi-Christian, 반쪽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반반면 좋아하듯이 ‘반 그리스도인’ 정도면 좋다고, 요즘 같이 바쁘고 힘든 세상에 그 정도면 훌륭하다고 그렇게 서로 동의하고 넘어간다. 세상도 좋아한다면서. 목사인 나도 ‘열린 목사’란 말이 듣기 좋아 할 말을 다 하지못할 때도 있으니… 목사 탓이 크다.
이제라도 세상이 편해서 좋아하는 ‘플렉시리스천’이 아니라 세상이 껄끄러워 하는 ‘참크리스천’을 세워가야 할 텐데…..
훗날 하나님 앞에서 배임죄에 걸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 김진식 목사 -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뉴욕에서 날아온 쑥

● 칼럼 2016. 7. 13. 08:22 Posted by SisaHan

외출에서 돌아오니 큼지막한 쇼핑백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의 소지품 정도로 짐작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어보니 싱싱한 부추가 그득하게 들어 있었다. 부재중 친구 L 부부가 다녀 간 것이다. 언제고 지나는 길에 들리겠다는 전언은 있었지만 막상 빈 걸음으로 돌려세우고 나니 서운한 마음 그지없었다.
L 부부의 정성 속에 자라난 부추들을 조심스레 끄집어낸다. 부추김치, 부추 전, 부추 샐러드 등 건강이 뚝뚝 묻어나는 유기농 밥상을 상상하며 부추 반찬에 한껏 골몰 해 있을 즈음 조그만 비닐봉지가 딸려 나왔다.
무엇일까, 부드러운 감촉으론 생물이 아닌 듯 하여 콧잔등을 들이 미니 친근한 냄새가 후각을 간질인다. 나의 급한 마음 알기라도 하듯 살짝 여민 봉지를 풀어보니 데친 쑥 한 덩이가 얼굴을 쏙 내민다. 늘 이맘때면 더 그리운 고향 냄새를 풍기면서.
내 궁금증이 통했던지 L에게서 전화가 왔다. 뉴욕 아들네 갔다가 꺾어 온 쑥이라며 옛 생각하며 쑥버무리를 해 보란다.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에서 날아 온 쑥이라 생경함마저 들었지만 쑥은 나에게 그냥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두고 온 고향과 내 유년기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추억의 산물이다.
꽁꽁 뭉쳐진 쑥 덩이를 풀어헤치니 상념속의 그것과 거리가 좀 있는 모습이다. 냄새는 분명한데 생김새는 사촌 내지 육촌 정도에다 크기는 또 얼마나 월등한지, 넓은 미국 땅 덩어리를 그대로 닮은 듯 했다. 모국 토종 쑥이 이 정도 크기라면 말려서 약용으로나 쓰일 텐데 하는 맘으로 한 잎을 뜯어 씹어 보았다. 다행히 싱겁다고 느낄 정도의 여린 맛이 모든 음식을 가능하게 했다. 나는 친구가 권유해 준 쑥버무리 보다 더 간절한 쑥 국과 쑥 개떡을 염두에 두고 일부는 냉동고에 그리고 나머지는 숭숭 썰어 국 끓일 준비를 했다.
식탁에 앉은 아이가 쑥 국을 보며 의아해 한다. 연유를 들려주었더니 ‘혹시 센트럴 파크에서 꺾으신 게 아닐까요? 하며 씩 웃는다. 학창 시절, 하계 강좌를 위해 뉴욕에 머물 무렵, 센트럴 파크에서 많이 본 식물이라며 그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얼굴이 상기되어 간다. 우리 시대의 전유물로만 여긴 쑥이 후세에도 쑥쑥 뻗어가고 있으니, 그래서 쑥인가 보다.


어린 시절 쑥 캐기는 우리 자매들에게 해방구나 마찬가지였다. 따뜻한 봄이 되면 할머니는 곧잘 바구니와 칼을 챙겨 선바람을 잡으시고 우린 할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할머니의 엄호 아래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면 자매들은 앞 다투며 앞산으로 달렸다. 아버지의 엄한 훈육 탓에 집안에선 실컷 웃고 떠들 수 없었던 그 시절 쑥 캐기는 얼마나 달콤한 구실이었던가. 아이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까마득히 잊어버린 한 기억을 끄집어 낸다.
형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되었을 때, 엄마인 내가 떡 해준다며 쑥을 캐 오게 했단다. 형제를 포함한 또래 여섯 명이 산으로 몰려가서 쑥은 뒷전이고 칼싸움, 총싸움 하며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모른단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때를 떠 올리면 행복하다는데 정작 나는 아무런 기억이 없으니…


아들들에게 쑥 캐러 보낸 젊은 엄마의 속내는 호연지기를 염두에 두었다기 보다 자신이 경험한 해방구를 아이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떡은 해주더냐고 물었더니 사 주어서 먹은 기억이 어렴풋하다고 한다.
쑥 바구니가 오죽 신통찮았으면 사서 먹였겠냐 고 뒤늦게 한마디 했더니 아이는 ‘그러게요.’ 하면서 머리를 긁적인다.
추억 저편으로 이끌어준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한마당] ‘벤진의 추억’을 넘어

● 칼럼 2016. 7. 13. 08:21 Posted by SisaHan

사람은 누구나 평소의 언행을 통해 보편적인 평가를 받는다. 선거 때 표의 심판도 물론 그렇다. 특히 공직에 나서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 이기가 아닌 이타(利他)정신이 투철한지 여부가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거론된다. 봉사와 헌신의 섬김의식과 자세가 몸에 밴 사람이 아니면 유권자를 속이는 표의 구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인사회에 있어서도 평소 동포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희생하며 덕을 쌓은 인물이라면 자연스럽게 추앙을 받고, 원한다면 주류정치의 문턱도 쉬이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동포들의 후원 열정이 저절로 달아오를 테니까.
하나의 추억을 꺼내보자. 캐나다 한인사회의 주류정치 도전사에서 2006년 3월30일 치러진 온주의원 보궐선거는 아마 가장 기억에 남는 극적이고 뿌듯한 선거전일 것이다. 선거에서 한인후보는 분패했지만, 한인의 단결과 저력을 보여준 사례로는 오늘 현재까지 단연 일등감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인후보 벤진, 42살의 이 젊은 후보는 혜성처럼 정계에 나타난 한국명 진병규였다. 그는 한인사회에 얼굴을 내민 일이 별로 없었다. 특히 동포사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의 측면에서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다만 그는 주류방송사의 기자와 앵커로 16년간 명성을 쌓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부친이 캐나다 대사를 지낸 연고가 있었다. 주수상의 보좌관 자리에 보임됐다가 수상의 천거로 보선에 나선 그는 그래서 한인사회에 친근하게 다가왔다. 「유명 방송인 출신 한인을 주의원으로 만들어 큰 정치인으로 키우자」는 캐치프레이즈가 작동되면서 그의 선거전은 마침내 한인들의 ‘원풀이 대상’으로 부상해 동포사회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당시 후원회장을 맡은 원로 이상철 목사는 이렇게 호소했다. 『~벤진은 동포들을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어서 정계에 등단하면 한인 동포사회를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해낼 것도 분명하다. 동포사회는 벤진을 도와 그를 큰 인물로 키워 캐나다 전체를 위해 창조적인 일을 해내는 정치인이 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면서 이 목사는 동포사회가 할 수 있는 일 두 가지로 선거활동을 적극 돕는 일과 선거 자금조달을 위한 모금운동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이 목사의 호소와 설득이 아니어도 한인사회에서는 주의원과 연방의원을 내야 한다는 한인 정치인 대망의 목마름이 강했던 터라, 좀 과장해서 남녀노소가 모두 나서다시피 캠페인을 도왔다.
하지만 선거구는 NDP거물 고 잭 레이튼의 아성이었던 토론토 댄포스였다. 자유당 사상 가장 높은 39.9%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아깝게 2천4백여 표 차로 분루를 삼켰다. 그럼에도 한인사회는 큰 아쉬움 못지않게 서로 박수를 치며 자부심을 주고 받았다. 선거운동 불과 25일만에 후원금을 15만 달러나 모으는 저력으로 자유당과 온주정부를 깜짝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벤진은 졌지만 동포사회는 이겼다」는 말이 시사 한겨레 지면에 등장하고 한인사회에 널리 회자됐다. 선거 열흘 후 한인회관에서는 이례적으로 ‘후원 감사의 밤’이 열려 주정부 인사들과 한인동포 등으로 붐빈 행사장은 마치 당선감사의 밤 같은 분위기를 보였다.
이날 벤진은 이렇게 말했다. 『한인사회의 힘을 이제는 자유당과 주정부 등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후원금을 보내주고 희망을 보내준, 동포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여러분을 위해서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으며 정계에 많은 후배들이 진출할 길을 여는 정치적 경력을 쌓아 나가겠다…』 당시 살아있던 부친 진필식 전 대사는 『뜨거운 성원에 감사하며 가족의 영광…우리 민족혼이 바람을 타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누렸던 벤진은 선거 후 한인사회에서 잊혀졌다. 그의 당시 약속은 빈말이 됐고, 한인동포들은 한 때 그런 젊은이가 있었다는 아련하고 허탈한 추억으로 간직할 뿐이다. ‘벤진의 추억’의 전말에서 느끼듯 한인사회와 정치인의 여망과 보응(報應) 사이에 거리감이 없지 않음을 많은 이들이 토로한다.
벤진에 이어 2012년에는 실협 전무를 지냈던 김근래 씨가 주의원에, 그리고 2014년에는 연방 총선에 조성용 씨와 주총선에 조성준 시의원이 잇달아 도전했다. 그 때마다 한인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한인 정치인을 만들자!”며 힘을 모아 도왔다. 특히 조성용 후보는 불과 9표 차이로 후보경선에서 분패하는 아슬아슬한 고지까지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는 다시 조성준(Raymond Cho:80) 시의원이 온주의원 보궐선거에 보수당 후보로 나섰다. 그런데 왠지 조 후보를 후원하는 열기가 종전처럼 뜨겁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시의원 8선에 이르기까지 돕는데 동포들이 지친 것일까?
온주 보수당이 당수까지 나서 전력 지원하고, 선거구가 시의원 선거구와 겹친데다 사퇴한 당선 의원과 한번 겨룬 적이 있는 지역이어서 승리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조 시의원은 8선을 거치며 선거에는 경험도 많고 노련하다. 나이가 많은 것이 걱정이지만, 꼭 당선돼 이번만은 한인사회의 ‘원한’을 꼭 풀어줬으면 좋겠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