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불복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앞으로 ‘3·10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질 것이 틀림없다. 적어도 한국 정치사는 그렇게 기록될 것이다. 그만큼 국가 최고 권력자를 국민의 힘으로 자리에서 끌어내린 의미는 매우 크다.
4개월여간 20차례에 걸쳐 서울 광화문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거리에 쏟아져 나온 1700만 촛불 시민의 힘이 절대적인 원동력이었지만, 무엇보다 이번 탄핵 사태가 유혈을 동반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마무리된 것은 굳이 <뉴욕 타임스>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국 민주주의’의 진화이자 발전이고 자랑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촛불 명예시민혁명과 헌법재판소의 전원일치의 대통령 파면 결정을 통해 더는 후퇴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공고한 진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절차 민주주의의 최고봉에 오른 것으로, 세계 어느 곳에 내놓고 떳떳하게 자랑해도 될 만한 위업이다.


둘째, 대통령 박근혜의 파면은 그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깊게 뿌리를 박고 있는 이른바 ‘박정희 패러다임’도 함께 퇴장시키는 전기를 마련했다. 그간 대통령 박근혜가 보여온 행태는 ‘리틀 박정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치·사회적으로는 권위주의가 부활하고, 경제적으로는 정경유착과 관치경제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개방·소통·공유로 대표되는 웹 2.0 시대에 일방·밀실·독점의 뚱딴지같은 유신 시대 풍조가 관가와 사회의 공기를 지배했다. 외치도 국익보다는 대통령 개인의 인기와 체면 관리가 우선되는 일이 잦았다. 대통령 박근혜에 대해 제기되었던 5가지 탄핵 사유가 따지고 보면 모두 낡은 박정희 패러다임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결과는 ‘탈박정희 패러다임’ 세력의 승리라고 할 만하다.


또 박근혜의 파면은 그동안 한국 사회를 강고하게 지배해온 냉전·수구 기득권 세력의 이완·분열·해체를 촉진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이미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냉전·수구-영남패권주의의 아성이었던 새누리당의 분열과, 거기서 이탈한 비교적 합리적인 보수 성향의 의원들이 바른정당을 만든 것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또 탄핵 결정 이후 박근혜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 기반인 대구·경북 지역에서 젊은층과 노인층의 반응이 엇갈리거나 김평우·김진태 같은 극우 인사의 탄핵 결정 불복 선동이 그동안 탄핵 반대 집회에 나왔던 사람들에게조차 그리 큰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면, 세상이 달라지긴 확실히 달라졌다. 이런 점에서 파면 이후 민간인 박근혜가 사흘간 청와대에서 농성한 뒤 12일 밤 삼성동 집으로 돌아가면서 낸 ‘사실상의 불복선언’은 그의 속 좁음만 드러냈다. 뒤끝마저 깔끔하지 않은 태도는 최소한의 동정심도 앗아가면서 파면이 결국 옳았다는 걸 재확인해 줄 뿐이다.


위기는 낡은 것은 사라지는 반면에 그를 대신할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고 한다. 낡은 박근혜는 사라졌지만 그를 대체할 새로운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앞으로 두 달 안에 있을 선거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촛불혁명은 ‘절반의 성공’에 그칠 수밖에 없다.
박근혜를 파면에 이르게 한 국정농단이 정경유착과 권력 감시·견제의 불능 속에서 시작되고 커져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적폐의 청산도 정경유착 탈피와 감시·견제 기능의 강화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이번 정경유착의 실행범들을 징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법 개정 등을 통해 제도적으로 정경유착을 막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국민의 기구임을 포기하고 권력자 개인의 기구로 전락한 검찰을 비롯한 국정원·경찰 등 권력기관의 개혁은 필수적이고 긴급하다. 부패권력의 나팔수 노릇을 충실히 해온 공영방송도 마찬가지다.


촛불혁명을 이끈 것은 인내와 자제력을 가지고 거리에서 압력을 가해온 시민의 공이지만, 정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이들이 엄동설한에 고생할 이유도 없었다. 따라서 시민의 요구와 괴리되어 있는 지금의 정당·의회·선거제도는 꼭 개혁돼야 한다. 상향식 공천, 비례대표제의 확대, 중·대선거구제의 도입뿐 아니라 정보기술혁명과 함께 실현 가능성이 커진 국민소환제를 포함한 직접민주주의 요소의 강화가 정치개혁의 핵심 목록에 올라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는 부패한 권력자를 내쫓는 데 주력했다면, 지금부터는 부패한 권력자가 나오지 않는 토양 만들기에 눈을 부릅떠야 한다.

< 오태규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실장 >


[칼럼] 용서할 기회마저 없앤 자

● 칼럼 2017. 3. 24. 18:22 Posted by SisaHan

“나는 중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리처드 닉슨이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때 한 말이다.
1952년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공화당 부통령 후보가 된 닉슨은 불법 정치자금 의혹에 휘말려 거센 사퇴 압력을 받았다. 그때 닉슨이 결백함을 주장하며 했던 말이 바로 “나는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다”(I’m not a quitter)였다. 미국에서 닉슨만한 집념의 정치인을 찾기도 쉽지 않다. 그렇게 버텨서 39살의 젊은 나이에 부통령이 됐다.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존 에프 케네디에게 패배한 뒤엔 거리낌 없이 다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도전했다. 이런 권력에 대한 집착이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인 닉슨의 부정적 이미지를 키우는 데 일조했다.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말했을 때 닉슨의 이 말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두 사람 다 의회의 탄핵소추를 받았고, 대통령직을 그만두는 그 순간까지(닉슨은 상원의 탄핵 표결 직전에 스스로 물러났고 박근혜씨는 파면됐다는 게 다르긴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너무 흡사하다. 박 전 대통령의 말은 곧 “나는 포기하지 않고 국민과 싸우겠다”는 뜻이다.
1974년 8월 닉슨은 대통령 사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중도 포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저는 미국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일 정오를 기해 대통령직을 사임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번 결정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에서 생겼던 모든 상처를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이걸 은폐하려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던 부분에 관해 ‘유감스럽다’(regret)고 말했을 뿐 사과(apology)하지는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한다. 이 모든 결과는 제가 안고 가겠다”고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걸 두고 친박 의원들이 ‘그 정도면 헌재 결정을 수용한 거 아니냐. 더이상 왈가왈부하지 말고 검찰 수사를 중지하라’고 요구하는 건 진실의 호도일 뿐이다.


닉슨으로 인해 미국 대통령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가장 큰 불행은, 더는 국민이 대통령과 정부를 믿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정부와 의회 신뢰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1960년대 존 에프 케네디처럼 국민 모두의 사랑을 받는 대통령은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지금 트럼프 시대를 상징하는 정치적 불신과 분열의 뿌리는 닉슨이 국민을 속인 데서 비롯했다 해도 틀리지 않다.
그래도 닉슨은 나중에 국민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임하고 3년이 지난 뒤인 1977년 데이비드 프로스트와의 인터뷰에서였다. 닉슨은 “나는 친구들과, 국가와, 우리 정부 시스템과, 그리고 공무원이 되려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실망시켰다. 나는 미국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이것은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다. 내 정치생명은 끝났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정치생명을 스스로 닫고 국민에게 사과하는 걸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친박 의원들이 개인 비서를 자처하며 다시 정치세력화하려는 게 그 징표다.


1994년 4월 닉슨이 사망했을 때 5명의 전·현직 대통령이 장례식에 참석한 건, 미국민이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지금 박근혜씨는 국민에게 용서받을 기회마저 스스로 차단하고 있다. 많은 사람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이 행동이 박근혜씨에겐 오랫동안 매우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 박찬수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


[평신도 글마당] 가시(可視)거리

● 교회소식 2017. 3. 24. 18:20 Posted by SisaHan

7박8일의 두 번 째 쿠바 여행을 마치고 돌아 왔다. 쿠바의 맑은 하늘은 달도 별도 눈 시리게 밝은 빛을 발하게 만들었다. 샛별은 마치 큰 다이아몬드를 하늘에 콕! 박아 놓은 듯 보였고, 달이 너무 밝아 렌즈에 빛이 반사되어 선명한 달의 모습을 담을 수 없게 만들었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우리의 눈은 낮에 더 멀리 볼 수 있는가? 밤에 더 멀리 볼 수 있는가?” 당연히 밝은 낮에 우리들은 사물을 더 확실하게 구분 할 수 있다. 그러나,그 빛이 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있다. 낮에는 볼 수 없는 별들이 밤에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러니 밤에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의 눈도 하나님의 걸작 중의 걸작이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림으로, 사진으로 표현들 해보지만 직접 보이는 그 아름다움만큼을 절대 표현 할 수 없다. 아주 예쁜 꽃만 보아도 눈에서는 눈물이 나온다. 눈은 보아 온 결과를 축적하여 사물과 행동을 평가하게 되므로 가능한 많은 것을 보아야 더욱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바로 안목을 높이는 일이다.
안목이 좋으면 더 멀리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안목이 넓다’라고 말 한다. 가시거리가 넓고 깊은 사람이 되려면 많은 지식과 지혜가 함께 하여야 하므로, 우리의 눈은 정말 중요한 기관인 것이다.
여행 중에도 똑 같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보는 눈이 있고, 별로 눈에 띄는 것이 없는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아 눈에 담기에 바쁜 데, 어떤 이는 그저 생각없이 사물들을 훑어보는 것으로 시간을 채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들의 눈은 어차피 가시거리가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가까이 보고자 현미경을 만들었고, 더 멀리 보고자 망원경을 만들었다. 현 시대의 과학이 최첨단이라 하지만, 지금의 변화하는 속도를 보아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참으로 예측하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일까, 요즘에도 사주를 보고 궁합을 보는 젊은이들이 있다 하니,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눈으로 보는 거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거리까지 내다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눈으로 착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였으면 좋겠지만, 세상이 모두 그렇지가 아니하다.
문득 예수님의 눈을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께서 이 시대를 보시는 눈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예수님의 눈에는 사물보다는 내면을 더 잘 들여다 보는 눈을 가지셨다고 생각해 본다. 우리들도 겉 모습 만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겉모습 속에 감추인 보화를 찾아내는 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쿠바의 남루한 모습 속에 감추인 그들의 슬픈 사연도 함께 공감하면서, 자연을 사랑하고 잘 지켜내고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냈을 때 느끼는 기분은 참으로 짜릿한 기쁨이었다. 가시거리만을 따지자면, 사실 눈을 뜨고서는 멀리 보지 못한다. 눈을 감았을 때에야 우리는 한없이 넓은 세상과 미래, 그리고 지나온 과거,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운 내 고향 산천까지 볼 수 있게 된다. 가끔 한 번씩 눈을 감고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꺼내어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만이 누릴수 있는 하나님의 기막힌 선물을 누려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내 눈이 볼 수 있는 가시거리는 한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시간을 잠시 누려 보았다.

< 정훈태 - 동산교회 장로 >


‘반전과 역전’, 드라마와 영화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요소다. 그런데, 그런 역사의 역전과 반전이 지난 주 우리 고국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번 진리와 옮음에 소망을 거는 것이 부질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멘붕’이란 말을 아는가? 멘탈이 붕괴되었다는 의미로 한국의 젊은이들이 만들어 낸 그러나 이제는 지나간 신조어다. 그런데 필자는 지난 2012년 12월에 우리 고국에서 일어난 대선의 결과로 멘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역사가 거꾸로 가는 듯 했고, 사람과 나라에 대한 실망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멘붕에 빠지게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나오는 뉴스를 도저히 볼 수 없어 뉴스를 떠나, 할 수 없이 팟짱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만들어 그곳에서 소통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희망을 키워왔다.


그런 와중에 힘을 독점한 그녀와 그녀의 부역자 일당들은 앞을 다투어 그녀의 아버지를 추앙하며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심지어는 그녀의 아버지 사진이 모 교회의 한 가운데 떡 허니 걸렸고, 결국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폭력과 불의와 독재의 망령이 이렇게 보란듯이 드라마 ‘도깨비’처럼 살아 날 수 있다는 것이.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은 소위 복음주의를 자칭하는 대형교회 지도자들의 성경적이지도 기독교적이지도 않은 행태들이다. 그들은 아첨하거나 침묵했다. 나아가서 최근에 광장 한 복판에서 벌인 나라를 위한 기도회는 그 모양새가 가히 영락없는 굿판과도 같았다. 불의와 부정과 사악함과 탐욕의 형통함과, 세상에서 빛을 잃은 교회의 추락은 빛과 진리의 승리를 갈구하는 이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아,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그러나, 그러나, 아니었다.


그 분은 아니었다. 최순실이라는 사람의 탐욕이 드러나면서 그녀의 탄핵이 충분하기까지 그 분은 그렇게 시간을 두고 일하셨다. 그 분은 그녀의 탄핵으로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의 아버지의 망령까지도 단번에 우리 역사와 사람들의 마음에서 지워버리시길 원하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와 그녀 아버지에게 속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숭상하지 않을 것이다. 놀랍고도 놀라운 역전의 드라마다.
누가 하셨을까? 진리와 자유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시다. 오직 정의와 공의를 강물과 같이 흐르게 하시며 결국에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분이 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순종한 촛불들이다. 역시 그분의 수가 높았다. 역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로우시다(고전 1: 25). 할렐루야!!

< 김진식 목사 -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