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원자력은 ‘파멸’의 에너지

● 칼럼 2017. 8. 16. 14:04 Posted by SisaHan

2015년 12월21일 일본 후쿠시마현 후타바마치 지방정부는 상가 진입로를 가로질러 세운 간판 하나를 철거했다. 간판엔 ‘원자력은 밝은 미래의 에너지’라고 쓰여 있었다. 이 표어를 쓴 사람은 올해 마흔두 살인 오누마 유지다. 그는 후쿠시마 원전 7, 8호기 증설이 결정되던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숙제로 이 표어를 제출해 상을 받았다. 표어가 쓰인 간판은 그의 자랑거리였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났다. 한때 도시로 나갔다가 29살 때 인구 7천명의 자그마한 이 소도시로 돌아와 있던 그도 출산을 앞둔 아내를 데리고 집을 등져야 했다. 마을은 방사능으로 짙게 오염됐다. 간혹 방호복을 입고 방문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사람이 머물러 살기는 어렵다.


오누마는 자신이 그런 표어를 만들었다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잘못은 스스로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옛집에 들를 때마다 손팻말을 이용해 간판의 표어 내용을 고쳐보았다. 방사선 방호복을 입고, 간판 앞쪽에 서서 ‘밝은 미래’라는 글자를 ‘파멸’이라 쓴 손팻말로 가렸다. 그런 모습으로 아내가 찍어준 사진을 블로그를 통해 세상에 내보냈다. 이 일로 간판이 유명해지자, 지방정부는 철거하겠다고 나섰다. 간 나오토 전 총리를 비롯해 6천여명이 철거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혔지만, 철거는 강행됐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났을 때, 기자는 도쿄에 특파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가족들을 모두 한국으로 피난 보내고 홀로 남아,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던 그때를 다시 생각한다. 사고를 수습하지 못하면 도쿄도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될 상황이었다. 핵발전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나도 오누마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인공 핵분열은 인류가 에너지원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다. 만들어놓고 보니 악마의 선물로 드러난, 무시무시한 핵무기 기술이었다. ‘평화적 이용’이란 명목으로 ‘발전소’에 그 기술을 응용해 쓴 것은 전 세계에 감시·통제망을 만들어 핵무기 확산을 막자는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핵발전이 시작된 지 불과 50여년 만에 인류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두 곳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대재앙을 맞았다. 핵발전의 부산물인 사용후핵연료 등 핵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할 방법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방사선이다. 방사선은 방사성 물질이 자연상태에서 핵붕괴를 할 때 나온다. 핵붕괴를 거듭하면서 방사성 물질은 줄어든다. 반감기(핵붕괴를 거듭해 절반으로 줄어드는 기간)가 17억년 정도인 우라늄235의 경우 지구 생성 초기에 견주면 지금은 100분의 1로 줄어 있다. 지금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것은 우라늄을 비롯한 방사성 물질들이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라늄 235를 농축해 인공 핵분열을 조성하면, 우라늄은 방사선을 대량으로 내뿜는 수많은 핵분열 생성물질로 쪼개진다. 괴물의 잠을 깨우는 것이다. 세계 각국이 핵발전에서 물러서는 것은 그 괴물을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오누마는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2011년 3월, 원전 사고로 인해 후타바마치에서 사는 ‘밝은 미래’를 나는 빼앗겼다.” 그는 2014년부터 피난지인 도치기현에서 태양광 발전 사업을 시작했다. 거기에서 밝은 미래를 찾고자 하나, 시련의 연속이라고 한다. 지난 4일 오누마가 옛집에 들른 김에 찍은 사진을 보니, 지방정부가 철거한 그 간판은 비닐에 대충 싸여 지붕도 없는 빈터에 버려진 듯 놓여 있다. 결국 폐기하려는 것일 게다. 왜? 부끄러우니까!

< 정남구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


백범이 독립운동가 묘역 조성 뒤 자신도 묻힌 곳
역대 대통령 중 문 대통령이 유일하게 광복절 참배
이승만은 축구장 건립, 박정희는 골프장 건립하려 해
노무현, 효창독립공원 만들려다 축구계 반대로 무산
임시정부와 촛불 계승한 이번 정부에서 어떤 변화 맞을까


광복절 제72주년인 15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는 세종문화회관으로 가기 전에 서울 용산구에 있는 효창공원부터 들렀다. 문 대통령은 백범 김구 선생 묘역에 이어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묘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는 삼의사 묘역, 이동녕·차리석·조성환 선생 등의 묘가 있는 임시정부 요인 묘역을 차례대로 참배했다. 문 대통령이 묘역 앞에서 고개를 숙일 때마다 하늘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대통령이 광복절에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 있는 효창공원을 찾는 것은 상식적인 일로 보인다. 청와대~효창공원~세종문화회관의 동선이 복잡하다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유일하다. 문 대통령의 발길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잦았다. 지난 3월 대선 출마 공식 선언, 2012년 10월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확정, 2015년 9월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선출 직후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점마다 이곳을 찾았다. 이전 대통령 11명은 저마다 속내나 사정이 달랐겠지만, 그들 마음의 내비게이션은 예외없이 청와대에서 곧바로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하도록 안내했다. 재임 중 이곳에 참배한 이는 김대중 대통령뿐인데, 광복절이 아닌 백범 49주기 기일(1998년 6월26일)이었다.

효창공원에 대한 역대 대통령들의 태도에서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한 이곳의 상징적 위상이 이상하리만치 낮은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사실, 많은 이들에게 이곳은 그저 산책하기 좋은 고요한 숲길이다. 1980년대까지는 효창운동장이 훨씬 유명해서, 효창공원은 운동장의 부속시설처럼 여겨졌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땐 음주가무와 고성방가도 흔한 풍경이었다. 닭과 달걀의 관계는 명확하다. 일부 대통령은 효창공원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을 넘어 적극적인 상징 지우기에 나섰고, 결과는 얼마간 성공적이었다.

광복절 제72주년인 15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이 효창공원 안에 있는 백범 김구 묘소 앞에서 비를 맞으며 참배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1959년 6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한국이 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를 유치하자 효창공원에 축구장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백범 묘소를 이장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서울에 축구장 지을 자리는 널려 있었다. 독립운동가 유족들과 시민단체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백범 묘소 바로 앞에 운동장을 짓게 했다. 15만 그루의 나무를 베고 연못을 메워 1960년 개장한 효창운동장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효창공원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1968년 애국지사 묘소들을 경기 고양 서오릉으로 옮기고 이곳에 골프장을 지으려다가 유족 등의 강한 반대로 뜻을 접었다. 그 뒤 박 대통령은 북한반공투사 위령탑 등 독립운동가 묘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념물들을 잇달아 세웠다. 1972년엔 대한노인회 건물을 지어줬고, 대한노인회는 그 보답으로 육영수 여사 경로 송덕비를 세웠다.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이 효창공원을 대했던 태도는 백범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에 대한 태도와 정확히 일치했다. 친일파를 대거 권력의 자리에 불러들였던 이 대통령은 누구보다 백범을 경계하고 질시했다. 이승만 정권은 백범 묘소를 참배하려는 시민들뿐 아니라 백범 유족들까지도 공원 입구에서 검문했다. 만주군 장교 출신인 박 대통령은 이곳에서 항일의 상징을 한사코 지우려고 했다.

백범은 1945년 환국한 뒤 효창공원에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을 조성했다.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쓴 이도 백범이었다. 그리고 1949년 암살된 뒤 백범 자신도 이곳에 묻혔다. 효창공원의 옛 이름은 효창원이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은 어린 나이에 사별한 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생모 의빈 성씨 등을 이곳에 묻었다. 일제는 조선 왕가의 묘역인 이곳을 1924년 공원으로 만들고, 왕실의 무덤도 경기 고양 서삼릉으로 옮겼다. 근처에는 유곽도 만들어졌다. 백범이 항일운동의 상징으로 효창공원을 주목한 건 이런 역사적 맥락과 닿아 있었다.

효창공원에는 우리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군부독재가 종식된 뒤인 1989년, 효창공원은 사적 제330호로 지정됐다. 1990년엔 이곳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7위를 안치한 의열사와 공원 정문인 창렬문이 건립됐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 10월엔 백범김구기념관이 준공됐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엔 효창운동장을 용산 미군기지 터로 옮기고 공원과 합친 17만여㎡을 2008년까지 ‘효창독립공원’으로 조성하는 계획이 수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축구계의 반대에 부닥쳐 표류하다가 결국 좌초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는 정부 차원의 이렇다 할 사업이 없었다. 멀게는 상해 임시정부에서부터 가깝게는 촛불 정신까지의 계승을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 들어 효창공원은 어떤 변화를 맞게 될까.

<안영춘 기자>


12·28 합의 TF가 밝혀야 할 쟁점

일본정부 법적책임 인정 못받고 20년 전 사과 수준 추락한 합의
막판에 청와대가 타결주도 의혹
일본정부가 내놓은 10억엔과 소녀상 철거 이면합의 여부도

오태규 위원장 “필요하면 모두 면담”

2015년 12월28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회담을 마친 뒤 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상이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를 위한 태스크포스(위원장 오태규·이하 티에프)가 31일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국가 간 맺은 외교적 합의에 대해 외부 전문가로 이뤄진 티에프가 검토 작업을 벌이는 것 자체가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12·28 합의를 둘러싼 의혹과 쟁점이 많은 탓이다.

12·28 합의의 치명적인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노 담화(1993년)-무라야마 담화(1995년)-간 나오토 담화(2010년)를 거치며, 사과와 반성을 넘어 책임을 지는 모습으로 다가서던 일본의 태도는 12·28 합의로 다시 20년 전 ‘사과’ 수준으로 떨어졌다. 박근혜 정부가 2015년 왜 이런 내용에 서둘러 합의했는지에 의혹이 쏠리는 이유다.

티에프가 밝혀내야 할 쟁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일 양국은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풀기 위해 2014년 4월 국장급 협의를 시작했다. 당시 협의의 주체는 외교부였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막판에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이병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직접 나서 합의 협상·타결을 주도했다는 의혹이 나왔다.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이 ‘석달만 시간 여유를 주면 개선된 합의를 이끌어내겠다’고 박 전 대통령에게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증언까지 나온 터다. 협상의 주체가 누구였는지, 왜 서둘러야 했는지 밝혀내야 한다.

12·28 합의는 인권에 관한 내용인데도 군축협상에서나 나올 법한 용어가 등장한다. 합의 발표 당시 정부는 일본 정부의 (합의 이행) 조처를 전제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 지난 1993년 8월 발표된 고노 담화는 ‘위안부’ 제도의 비극을 “오래도록 기억한다”는 게 뼈대였다. 하지만 12·28 합의가 공개된 직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기자들과 만나 “우리 아들이나 손자들에게 계속 사죄를 할 숙명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12·28 합의가 ‘망각을 위한 합의’로 비판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종적·불가역적’이란 말이 합의에 들어간 과정이 밝혀져야 할 이유다.

12·28 합의 이전부터 일본 정부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이전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해왔다. 합의문 발표 당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소녀상에 대해 “적절히 이전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일본 언론 쪽에선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내놓은 ‘10억엔’이 소녀상 이전과 연계돼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소녀상 철거·이전에 대한 이면합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합의 이행 과정도 눈여겨봐야 한다. 합의 체결 이듬해인 2016년 1월 피해 할머니들은 “사과 없는 일본 쪽 10억엔은 필요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정부는 같은 해 7월 말 이 자금을 바탕으로 화해·치유재단을 출범시켰다. 한달 뒤인 지난해 8월 강일출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 할머니 12명은 12·28 합의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입었다며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반면 일본은 12·28 합의 때 밝힌 것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이어갔다. 합의 발표 당시 일본 쪽은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후 일본 정부는 “위안부 강제 동원의 증거가 없다”는 취지의 답변서를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 제출한 바 있다. 지난 5월 유엔 고문방지위원회가 12·28 합의 수정을 권고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티에프의 오태규 위원장은 “결론을 상정하고 활동하는 게 아니다”라며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관계자는 어디 소속이든 모두 면담하자는 게 기본적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12·28 합의 과정에 있는 모든 걸 검토한다고 이해하면 된다”며 “법 절차를 준수하는 범위 안에서 외교문서도 들여다볼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 사정에 밝은 한 일본 전문가는 “12·28 합의의 내용도 문제지만,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불투명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며 “티에프가 해법을 내놓을 순 없지만, 합의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합의 과정의 불투명성을 해소하면 붕괴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은 이날 성명을 내어 “외교부는 피해자·지원단체와 소통 없이 오랜 시간 동안 이 문제를 연구해온 법·역사·여성학자들은 배제한 채 국제정치·외교 전문가 위주로 티에프를 구성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재단 쪽은 이어 △12·28 합의 졸속 발표 이유 △합의 도출 과정 △10억엔 거출 경위 △소녀상 관련 일본 쪽 요구사항과 한국 정부 대응 등 7개항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촉구했다.

< 정인환 김미향 기자 >


중국 ‘죽은 류샤오보’도 경계

● WORLD 2017. 8. 1. 17:13 Posted by SisaHan

반정부시위 우려 ‥ 사망 이틀만에 화장해 ‘수장’

생전에 류샤오보를 결박했던 중국 당국이 사후엔 그의 주검을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지웠다. 중국 정부가 지난 13일 숨진 류샤오보를 이틀 만에 화장해 바다에 뿌리게 한 것과 관련해, 그의 묘역이 ‘민주화의 성지’가 될 가능성을 사전 차단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AP> 통신 등 외신은 “류샤오보의 형 류샤오광이 15일 오후 중국 당국이 마련한 기자회견에서 이날 오전 동생의 시신을 화장하고 정오께 유해를 바다에 뿌렸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류샤오광은 당국이 동생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인도주의적 배려를 해줬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류샤오보의 아내 류샤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신화통신>도 이날 류샤오보의 주검을 화장하기에 앞서 류샤와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간단한 장례 의식이 열렸고, 가족의 뜻과 지역 풍습에 따라 유해를 바다에 뿌렸다고 보도했다.

류샤오보의 지인들은 평소 고인과 소원한 관계였던 류샤오광과 중국 쪽 발표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뉴욕 타임스> 등 외신은 유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가 화장을 강행했다고 전했다. 유족들은 중국 장례 풍습대로 류샤오보의 주검을 7일간 보존하려 했으나 당국이 서둘러 화장을 치르게 했다는 것이다. 홍콩 소재 중국인권민주화운동정보센터는 16일 오전 누리집을 통해, 류샤가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데 동의하지 않았으며 기자회견이 가능해지면 직접 밝힐 것이라는 류샤 친척의 말을 전하고 당국이 류샤오보의 친필 원고와 책, 서평 등 옥중 유품을 류샤에게 넘기지 않으려 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뉴욕 타임스>는 “(류샤오보의 무덤이) 공산당에 저항하는 시위대를 집결시키는 자석이 될까 우려했다”고 풀이했다.


바다에 수장하는 유해를 슬피 바라보는 아내 류샤.

타계한 ‘중국 민주화 상징’ 류샤오보

“내겐 적도, 원한도 없다”

중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류샤오보는 13일 오후 5시35분 아내 류샤, 형 류샤오광, 동생 류샤오쉬안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아내 류샤에겐 “잘 사시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1938년 나치 수용소에서 숨진 독일 평화주의자 카를 폰 오시에츠키에 이어 두 번째로 구금된 상태에서 사망한 노벨상 수상자다.
“나에겐 적이 없다. 나에겐 원한도 없다.” 류샤오보가 평생 강조한 이 말엔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시위에서 출발해 30년 가까이 수없는 탄압과 고통 속에서도 중국의 억압적 현실을 바꾸기 위한 분투를 멈추지 않은 강력한 ‘저항’ 정신이 담겨 있다. 그는 중국 당국에 의해 지워진 ‘천안문 정신’의 산증인으로 끝까지 천안문의 이상에 충실했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내놨다. 여러 차례 해외로 망명할 기회가 있었으나 끝까지 중국에 남아 뿌리내리고 분투하길 원했다. 그의 죽음은 중국 체제 내에서 민주화 개혁을 꿈꿨던 희망의 종말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1955년 12월 지린성 창춘의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난 류샤오보는 문화대혁명(1966~76년) 때 하방(下放·지식인을 농촌 등 노동 현장으로 보냄)돼 건축 노동자로 일했다. 문혁이 끝난 뒤 1977년 지린대 중문과에 입학했고, 베이징사범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대를 대표하는 철학자 리쩌허우에 도전하는 글을 발표하고, 개혁개방 이후 중국 문화에 대한 미학, 문화 평론들을 내놓으면서 촉망받는 스타 학자이자, 평론가, 시인으로 떠올랐다. 1989년 봄, 그의 인생도 중국 사회도 큰 전환점을 만났다. 천안문광장에서 민주화와 부정부패 타파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