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요, 더 좋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과객이므로, 천국에 이르기 까지는 결코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다. 교회의 특권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길 수있는 동산(動産)이다. <복음>은 어떠한 장소에라도 얽매이지 아니한다. 주 하나님의 말씀은 촛대요, “어두운 곳에서 비추는 빛”(벧후1:19)이기에, 빛이 없다면 세상은 참으로 암흑 천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촛대다. 곧 촛대가 빛을 발 하듯이 “생명의 말씀을 발하는” 이세상의 빛이다 (빌2:15-16). 촛대의 가지들이 사면으로 뻗어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선교에 의해 <복음>의 빛이 온 땅에 널리 펴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마5:14-15). 무절제한 욕심이 맹목적인 정욕을 부채질 하게 되면 그것은 때때로 사람을 가장 부조리한 죄를 짓게 하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게 할 뿐더러,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도 불붙은 장작개비와 같이 화살을 던지고 죽이려 드는 것이다. 이러한 악랄하고 흥분된 행동에 내 자신이 휘말려 들지 않는다면 내 자신이 유달리 온순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과격한 말에 과격한 말로 대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는것”이다.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원수가 주릴 때에 그를 먹여주고, 그가 목마를 때에 “그에게 마실 것을 주라”고 교훈 하셨다(롬12:20, 마5:44-45). 우리는 극심한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우리는 <출애굽기(17:8-16)>에서 아말렉인들과 이스라엘과의 전쟁 기록에서 모세의 팔이 내려지면 “곧 기도를 쉬면” 아멜렉이 이겼다고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의 여건도 교인들의 신앙의 강도와 기도의 정도에 따라 흔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 당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그의 형 아론과 미리암의 남편이요 매형인 <홀>의 도움을 기꺼히 받았다. 우리들도 우리 교회의 사역자들을 위하여 <기도>의 도움을 부끄러워 해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서로 서로 한 지체이고 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 <복음>과 은혜 아래서는 성도들은 어느 곳에서나 기도할 용기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곧 주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의 이름으로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는 곳은 어디에서나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고 임재하심으로써 그들을 영화롭게 하시며, 은혜의 선물로 상 주시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예배 가운데 계서서 <복> 주시는 것을 바랄 뿐, 우리의 신앙적 집회를 아름답게 꾸미려고 다른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

특히 우리는 우리 형제의 앞에 범죄의 기회를 둠으로써(롬14:13) 우리 자신이 타인의 죄에 대한 방조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남이 우리에게 친절함으로 인해서 손실을 입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손해를 보는 편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죄에 대해 멀어지기 위해 <기도>하는 것을 배우자! 죄에대해 기도하는 중에 <죄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자! 우리들은 공동체 안의 모든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여야 한다. 추악한 자들이 더 추악해지지 않도록, 사악한 자들이 더 사악하지 않도록 , 신성한 자들이 더 신성하도록, 선한 자들이 더욱 선해 지도록 기도하여야 한다(시7:9). 우리는 온갖 좋은 선물을 주신 주 하나님께 생활 속에서 감사한 마음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자!(약1:17). 미련한 자가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합리적이며 매우 온당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뜻을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주님에게 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련한 자들이요, 주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운 <분>이신 까닭이다. 사람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 뿌리박고 사는 자들 일지라도 그들이 시들 때에도,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아 그의 뿌리에서 기름진 것을 분배 받는 자들은 많은 열매를 맺으며 무성할 것이다.

<위선과 표리부동 한 것>보다 주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시는 것은 없다. 우리는 패려한 마음을 버리고, 정의를 주장하면서 살아가고, 결코 악을 의도하고, 발각 될 것을 피하기 위해 굽은 길로 행하지 말자. 선한 것을 시인하면서도 선한 것에 배치되게 행동하는 자는 “마음이 패려한 자”이며 그러한 자는 어느 죄인보다 <주 여호와의 미움>을 많이 받느니라(사65:5). 성실과 솔직 담백한 것보다 <여호와>께서 더 기뻐하시는 것은 없다. <그 행위가 온전한자>는 신실한 목적을 갖고 신실히 행동하는 자요, 이세상에서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주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행하는 자이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기쁨과 소망] 적치마 상추

● 교회소식 2017. 8. 16. 14:11 Posted by SisaHan

모든 교회가 그렇듯 성도의 교제를 가집니다. 특히 이민 교회는 매주 친교실에서 대화를 나눕니다. 이 때에 대다수는 커피나 빵 또는 다과를 함께 합니다. 우리 교회는 당번을 정하여 52 주일 낮 예배 후 친교실에서 식사를 합니다.
저희는 텃밭에 채소를 가꾸는 터라 좀 더 많은 당번 순서를 가집니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적치마 상추가 잘 되어서 여러 주일 예배 후 친교실에서 상추 쌈과 겉절이로, 또한 플라스 알파(?)로 모두가 맛있게 먹고 또한 작은 봉지에 조금씩 담아가곤 합니다.

봄이 되면 텃밭에 여러 가지 농작물을 심습니다. 올해는 그 가운데 적치마 상추가 얼마나 잘 자라 주는지 몇 주를 계속 상추로 성도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사실 저희는 해마다 텃밭에 씨앗을 심고 많은 거름을 주곤 합니다.
그런데 올해만큼 이렇게 잘 된 해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만히 따져보니, 이유가 될 만한 것은 비가 자주 왔다는 것 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날씨가 적당히 덥고 너무 좋아서 상추가 한 주간 만에 먹기에 알맞도록 탐스럽게 자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모두 오직 하나님께서 햇볕과 비를 적당하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일에는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안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있어야 함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형문자라고 신학자인 무어는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왕인 솔로몬은 하나님은 일을 숨기시고 자신은 마치 보물찾기와 같이 찾는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우리들이니, 은혜를 항상 사모하고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드림은 한 주간 주신 은혜를 고백하며 감사하는 시간이자 다음 한 주간 주실 은혜를 붙들고 간구하는 시간인 줄 믿습니다.

문제는 은혜가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주어지는 게 아닌 만큼 늘 준비하며 쉬지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적치마 상추를 그렇게도 모두가 맛있게 먹고 또 남아서 조금씩이라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마치 이른 비와 늦은 비로 가나안 땅에 주신 은혜와도 같이 준비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우리의 수고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적치마 상추여!,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생각하며 감사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지!
할렐루야 아멘.

< 안상호 목사 - 동산장로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갑질

● 칼럼 2017. 8. 16. 14:08 Posted by SisaHan

갑질! 모국을 떠나와 외국에서 오래 살다 보면, 종종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단어에 부닥친다. 당연한 일이다. 언어도 생명력이 있어, 많은 단어들이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 생기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터넷 시대에 있어 새 단어들이 빠르게 유행하기 때문이다. 이런 단어들은 그 시대를 반영하기도 한다. ‘갑질’ 이라는 단어도 그 중 하나이다. 내가 처음 갑질이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는 앞뒤의 문맥을 보아 내용을 짐작했다. 그러다 그 유명한 ‘땅콩회항’ 사건의 기사가 이곳 한국신문의 온 지면을 덮었을 때,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회사 부사장이라 해도 일단 출발한 비행기를 돌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무장을 내리게 하다니, 그것도 땅콩 하나 때문에… 여기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사건이다. 그 사건 이후 그 단어가 잠시 사라지는 가 했더니, 다시 한국신문의 많은 지면을 덮고 있다. 이 또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육군대장, 정확히 말해 그 분의 사모님이 공관병에 대해 행한 갑질이….

갑질 행위는 언제 어느 사회에서나 있는 일이다. 가진 자와 없는 자, 그리고 힘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와 차별은 늘 있어왔다. 그 어떤 권력과 위치를 누리려고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높이 오르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 차이를 줄이려 노력해 온 것이 인간의 역사가 아닌가? 있고 없음의 차이 없이 법 앞에 평등해지고 나가서 기본적인 권리의 보장을 하려는 것이 한 사회의, 나가서 국가가 지향해 온 목표이다. 결국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국민소득이 얼마나 되냐는 숫자의 차이가 아니라 개개인의 기본적인 권리가 얼마나 존중되고 보장되느냐에 있지 않나 생각도 해본다.

군대사회란 특수한 사회이다. 상하의 구별이 계급으로 분명히 구별되고, 명령과 복종이 기본이 되는 사회이다. 그리하여 상관이 부하에 대한 부당 행위가 종종 있어왔지만 요즘은 그것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한다. 이병 또는 일병과 대장의 차이. 그것은 정말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대장의 명령이라면 이등병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그것이 부당한 명령이라고 해도 어디다 하소연할 데가 없다. 그러나 그 명령이 공적인 일이어야 하는데, 이 번 사건은 거의 사적인 일이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공관병은 분명 현역군인인데. 거의 사모님의 하인이나 때로는 노비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잔심부름을 시키는 것까지 이해할 수 있어도 그것은 부탁이어야 하지 명령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손목에 전자팔찌를 24시간 차게 하여, 그녀가 부를 때 언제나 빠르게 응답해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것이 도대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이야기인가? 그런 일이 인격적으로 얼마나 모독이 되는 일인지… 한마디로 사람 취급하는 일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전자팔찌라면 한국에서 재발의 가능성이 있는 성 범죄자에게 채우는 것이다. 사모님이 공관병에게 욕을 하거나 물건을, 전이나 썩은 과일을 집어 던지고 때로는 칼을 휘두르기 까지 했다니… 냉장고 이야기를 보면 정말 기가 막힌다. 두 부부가 사는 데 냉장고가 9개다. 그 중 하나는 문이 4개 달린 영업용 냉장고. 그 안에 과일 등 음식이 가득 차 있다가 며칠에 한 번씩 상한 것을 버려야 했고, 그것이 전부 자기 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선물(?) 들어온 것이라니… 여기서 기가 막힌 것은 병사가 버린 썩은 갈치를 다시 찾아오게 하여 먹으라고 했다. 게다가 그들은 전임지에서 승진해, 새 공관으로 이사오면서 사용했던 가전제품을 가지고 왔다. 국민의 세금으로 산 물품인데도, 후임자는 자신의 상관에게 도로 반납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갑질 행위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계속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상황에서 사모님은 병사들을 아들처럼 대했다고 변명한다. 자신의 아들도 현역 군인인데,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어떨까? 자신의 아들이 근무하는 부대에서 이런 대우를 받고 있다면, 자신의 행한 일을 공관병의 어머니가 안다면… 나는 사모님들이 공관병을 아들처럼 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현역 군인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한마당] 갑질과 섬김의 철학

● 칼럼 2017. 8. 16. 14:06 Posted by SisaHan

흔히 착각하며 습성처럼 되어 버린 게 높은 자리에 앉으면 군림하고 다스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권한이 주어지고, 일을 지휘하다 보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은 아랫 것들로 보여서 마음대로 부려도 되는 하찮은 존재들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착각은 정말 빠져들기 쉬운 어리석은 함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이나 총리는 국민의 위임을 받아서 받들고 섬기라는 자리이다. 대통령은 그 자리의 크기 만큼이나 더 많이 더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국민이 뽑아준 직책이고, 총리는 또 그 자리에 걸맞게 국민을 위해 헌신하라는 자리이지 국민위에 군림하고 거들먹거리라고 씌워 준 감투가 아니다. 그래서 대통령이든 총리든 장관이든 공직자들을 모두 국민의 공복(公僕), 즉 공공사회의 심부름꾼이라고 일컫는다.


그렇게 공복인 사람들이 그 본분을 잊으면 문제가 생긴다. 탄핵 당한 대통령은 그 좋은 사례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앉아있다 보니 세상이 다 제 것인 듯 하고 사람들도 모두 부하나 종들로 보이는 착각에 빠져 전횡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운전사에게 욕설과 막말을 한 회사대표 등 고위직들이 잇달아 여론과 사법에 고발당하며 곤욕을 치르고 있다. 착각의 댓가라고 아니할 수 없다. 회사의 사장은 직원들을 뒷바라지 하여 함께 고객을 섬기라는 자리이지 직원들의 주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하인 부리듯이 갑질을 하다보니 망신을 당하고 회사가 타격을 입는 것이다. 가맹점주들로 인해 회사가 흥성할 터인데, 그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해도 부족할 판에 ‘착취’를 일삼은 프랜차이저들도 착각의 중증환자들이다.
해외에서 국민를 섬기라는 특별한 사명을 걸머진 공무원들이 외교관이다. 그런데 이민 땅에서 기댈 곳 없는 재외국민들에게 국가예산으로 재정적 도움을 주고 모국 관련 단체의 위원으로 위촉한다거나 때로는 훈포장을 추천하는 등의 쥐꼬리 권한을 행사한다고 해서 임지의 동포들 머리 위에 앉아있듯 상전노릇을 하려다 보니 말썽이 생기고 국격이 추락한다. 공관장이 마치 ‘점령군 사령관 같다’는 둥, ‘총독’ 이라는 비아냥으로 신뢰를 잃어가는 것도 그런 연유다. 그런 착각 속에 거드름을 피우면서 관저행사에 부하직원들을 종업원처럼 동원해 사기를 떨어뜨리고, 국민세금을 축내고, 여직원을 성추행하는 망신살도 뻗치는 것이다.


육군대장 부부가 공관에서 거드는 장병들에게 온갖 비인간적인 갑질을 해오다가 폭로당해 치도곤을 당하고 있다. 그 장병들은 국토방위를 위해 부모와 고향의 안락한 품을 벗어나 잠시 나라에 차출당한 귀한 아들들이다. 그들이 복무 중 한때 공관병으로 배정되었을 뿐인데도 마치 자기들의 노비인 양 착각한 어리석음이 결국 화를 부른 셈이다. 그런데 장병들은 마구 부려먹어도 되는 머슴이 아닌 귀한 자제들이고 나라의 주인공들이라고 생각하는 장군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공관병 뿐이 아니다. 전투는 없고 평범한 일상에 관료적인 업무만 반복되다보니, 지휘관들은 부하 사병들을 온갖 잡일에 동원하고 그들을 상대로 한 무수한 가학적 갑질로 계급 우위를 즐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군 기강은 풀어질 대로 풀어져 탈영하거나 목숨을 끊는 장병들이 속출하는 것이고, 국방은 부실해져 가는 것이다.
군대에서 치열한 승진경쟁을 뚫고 장군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무수한 선배들의 전철을 보고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선배들도 그랬으니 손쉽게 따라 하는 것일 게다. 안타까운 일이다. 공자와 증자의 가르침을 담은 중국의 고전 대학(大學)에는 ‘소악어상, 무이사하(所惡於上, 毋以使下)’라는 구절이 나온다. 윗사람의 나쁜 점을 봤으면 자신의 아랫사람을 그렇게 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성경에는 그에 합당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막 10:45), 그리고 그 성구의 바로 앞 두 절에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라고 했다. 세속적이고 어리석은 갑과 을의 철학에 대한 명쾌하고도 심오한 훈계가 아닐 수 없다.
갑과 을 간의 차별이나 박해가 아니라, 갑과 을이 평등한 세상, 모두가 갑처럼 서로 섬길 때가 바로 태평성대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일 터이지만, 그건 한낱 이상향일 뿐일까. 현실은 어떤가. 그 성경을 가르치는 목회자들 마저도 마치 성도들 위에 올라앉은 듯 주인노릇, 혹은 군왕의식을 발휘하며 어리석은 행실에 젖어있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으니, 참으로 인간의 한계요 불쌍한 우리네 존재들이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