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민과 국회를 무시하는 FTA협상

● 칼럼 2014. 11. 25. 19:03 Posted by SisaHan
중국에 이어 뉴질랜드와의 협상이 타결돼 14번째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게 됐다. 나라 수로는 모두 52개국에 이른다. 정부는 관세를 물지 않거나 낮게 물면서 교역을 하는 ‘경제 영토’가 대폭 늘어나게 됐다며 자랑한다. 하지만 협정 내용은 물론, 협상 진행방식을 보면 정부의 지나친 비밀주의 탓에 국민 대표인 국회마저 구경꾼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게 현실이다. 시쳇말로 무시와 ‘봉’ 취급을 받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은 산업과 집단별로 이해관계가 크게 엇갈리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장기적으로는 나라 경제에 긍정적일 수 있지만 단기와 중기에 걸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농업과 농민 등 경쟁력이 떨어지는 산업과 집단이 집중적으로 손실을 볼 수 있다. 이는 그간의 경과가 잘 말해준다. 그런 만큼 정부가 전체 국민과, 피해가 예상되는 집단에 협상 진행과정을 제때에 알리고 의견을 듣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적어도 국회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정부는 “진행중인 협상”을 이유로, 국회 소관 상임위원장의 자료 제출 요구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른 뒤 내놓은 자료조차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달랑 200자 원고지 3장 정도의 분량에 뻔한 답변을 했다. 상임위원장한테 이럴진대 일반 의원들이야 더 말해 무엇할까 싶다. 이런 상태에서 통상절차법에 따라 의원들이 협상과 관련해 걸맞은 의견을 제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상대방과 협상중인 내용이 알려지면 불필요한 논란을 낳고 자칫 협상이 깨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설령 그런 면이 있다고 해도 정부의 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 협상은 정부가 알아서 잘할 테니 국회와 국민은 결과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니, 민의의 무시가 지나치다. 정부는 협상 내용이 일부 공개돼 논란을 빚더라도 그것이 결국 협상력을 높이고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협정으로 손실이 예상되는 집단의 의견을 충실하게 듣고 협상에 반영하는 것은 무엇보다 앞서야 할 원칙이다. 그런 노력을 해야 한-미 자유무역협정 타결 이후 빚어진 것과 같은 사회적 갈등의 분출을 줄일 수 있다.

 

[칼럼] 과두정치, 이제 끝내야 한다

● 칼럼 2014. 11. 25. 19:02 Posted by SisaHan
한스디트리히 겐셔는 1974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18년 동안 독일의 외무장관을 지낸 전설적인 정치가다. 사민당 헬무트 슈미트 정부에서 8년, 기민당 헬무트 콜 정부에서 10년간 활약했다. 겐셔가 이렇게 유럽 최장수 외무장관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대표였던 자민당이 연정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1949년 서독이 세워진 이후 지금까지 65년 동안 최장기 집권당이 소수당인 자민당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40%대의 득표율을 가진 거대 정당인 기민당과 사민당 사이에서 5~10%의 득표율을 가진 자민당은 늘 캐스팅보트 구실을 했고, 이들과 번갈아 연합정부를 구성하며 무려 50년 가까이 집권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민당이 한국에 있었다면 집권은커녕 정당으로서 존재할 수도 없었으리라는 사실이다. 지난 65년 동안 자민당은 지역구에서 단 한 명의 의원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자민당 의원은 전원이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배분되는 정당명부 비례대표 의원이었다.
오늘날 한국 정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위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의’(representation) 위기다. 한국 정치는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잘못된 선거제도가 문제다. 지역구에서 다수 득표자 1인을 뽑는 단순 소선거구제는 민의를 왜곡하는 악명 높은 제도다. 생각해보라.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균 투표율을 60%, 당선 득표율을 40%로 가정해보면, 전체 유권자 대비 당선자가 얻는 득표는 25% 정도에 불과하다. 당선자는 25%의 득표를 가지고 100%의 국민을 대의한다. 이처럼 한국 정치는 1/4 대의정치다. 나머지 3/4 국민의 의사는 무시된다. 그러니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여기서 자라난 것이 현재의 과두정치 체제다. 한국의 거대 양당은 1/4 대의정치, 승자독식 정치, 민의왜곡 정치의 최대 수혜자다. 이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선거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가 반영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기권하거나 최악의 정당을 저지하기 위한 ‘차악투표’를 한다. 그 수혜는 또다시 거대 양당한테 돌아가고, 대의의 왜곡은 또 한번 심화한다. 이런 악순환이 한국 정치 위기의 본질이다.
사실 한국 정치의 기본구도는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경쟁도, 우파와 좌파의 대결도 아니다. 그것은 보수언론과 기득권 세력이 마치 지금의 질서가 공정한 경쟁의 결과인 양 보이기 위해 꾸며낸 ‘거대한 기만’에 불과하다. 한국 정치의 본질은 여야로 불리는 두 기득권 세력이 결탁하여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과두정치다. 따라서 정권이 교체된다 해도, 사회의 구조적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여당과 야당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과두지배세력과 미래의 개혁세력 사이에 있다. 야당은 한국 정치의 을이 아니라 영원한 갑이다. 여야의 차이는 권력을 6:4로 분점한 갑인가, 4:6으로 분점한 갑인가의 차이일 뿐이다.
단순 소선거구제가 낳은 과두정치의 폐해는 크다. 대의의 왜곡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무관심과 무력감을 심화시키고,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의제를 대변할 정치세력의 등장을 원천봉쇄한다. 따라서 현재의 과두정치 아래서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는 불가능하다.
과두정치를 끝내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에 희망은 없다. 변화의 첫걸음은 선거제도 개혁이다. 국민의 의사를 온전히 대의할 수 있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답이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 전독문학>


[한마당] 역지사지의 인격과 국격

● 칼럼 2014. 11. 25. 19:00 Posted by SisaHan
간암 수술의 명의 장기려(1909~1995) 박사가 타계한 지 내년이면 20년이 된다. 그의 인격의 향기가 세월을 넘어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는 평생 맑고 인자한 맘과 무소유의 청빈한 삶을 살고 간 한국의 슈바이처다. 1950년 12월 한국전쟁이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치열해지던 때, 모친과 아내와 다섯 자녀를 남겨둔 채 평양에서 야전병원 구급차를 빌려 타고 중학생 둘째 아들과 남하한 지 45년 만에 이산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타계하셨다.
그에겐 초인적인 봉사의 삶을 기려서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1979)과 국민훈장 등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공적과 명예 훈장들도, 역지사지하는 그의 고운 맘이 드러나는 언행 앞에선 모두 빛을 잃고 우리들의 양심은 숙연해진다. 그의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품성이 어쩌면 우리 민족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그는 북에 남기고 온 가족을 애타게 그리워했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면서 재회의 날을 기다렸던 그는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라고 보낼 길 없는 편지에서 여든살 순정을 밝힌 순애보적 남편이었다. 제자들 중 미국에 이민 간 많은 의사들이 주축이 되어 은사님의 북한 가족 상봉 기회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은사님에게 미국의 제자들은 준비된 평양 방문 기획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1000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는가?”라는 답신이 미국 제자들에게 갔다. 그래서 장기려님은 생전엔 끝내 고향 방문과 가족 상봉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5년 후 아들 장가용 교수가 이산가족 자원봉사 의료요원 자격으로 2000년 8월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내 아들은 평양에서 어머니(당시 89)를 상봉하고 생전에 전달 못했던 아버지의 절절한 순애보 편지와 유품을 전했다.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젖가슴을 만진 뒤에야 어머니를 만났음을 실감했다”고 환갑도 훨씬 넘은 아들의 모자 상봉 소감의 인터뷰 기사는 신문 독자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위 실화는 이산가족 중에서 발생한 가족사의 한 작은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이렇게 삭막하게 만들고, 남북관계를 세계인들 앞에서 이렇게 부끄럽도록 만드는 근본 원인은 물질이 부족하거나 군사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유는 오직 한가지, 우리 모두가 성산 장기려님이 보여준 인간성의 역지사지의 능력을 상실했거나 마비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역지사지할 수 있음은 놀랍고 신비한 인간다움의 특징이다. 역지사지 능력이 곧 휴머니즘의 본질이다. 고등동물에게서 우리는 감정의 교류 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아예 입장을 바꾸어서 상대편의 자리와 처지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은 인격적 성숙 단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역지사지의 능력은 사람이 높은 학력을 가졌다거나, 사회적 신분이 높다거나, 교육자나 종교인이라고 해서 당연하게 가능한 인간 능력이 아니다. 
역지사지 행위에서 처지를 바꿔 생각한다(思)는 것은 이해한다(解)는 것인데, 자기비판과 자기성찰의 의지를 전제한다. 언더스탠드(understand)라는 영어단어가 의미하듯이, 상대편 자리에 내려가 아래에 설 때 이해가 가능하다. 역지사지는 상대방에 관한 정보지식만으로는 안 된다. 열린 감성과 소통 의지, 타자 존재성과 차이의 존중, 생명의 연대성 자각, 그리고 인간의 본능적 이기심에 대한 연민의 마음까지 총동원될 때 발현되는 능력이다.
우리 사회의 온갖 문제 발생도 처지와 입장을 바꾸어서 상대편을 이해하는 능력이 거의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제 민주화가 물 건너가고, 사회에서 각종 갑을 계약관계가 항상 분쟁거리가 되고,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정부의 방조 때문에 남북고위급접촉 외교가 무산되고, 주권국가 국민으로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하는데 한-미 방위조약 관련해서 ‘전작권’ 환수 시기를 정부가 쉽게 연기해 버리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역지사지하는 인간 품성을 상실했기 때문은 아닐까? 오로지 생존보존과 자기번영만 위해 고층건물 사닥다리 오르는 경쟁적 삶을 당연시하는 세상 풍조와 그것을 정당시하는 통치철학 때문이다.
 
그러나 역지사지 능력이 우리 세대에 온통 상실되어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를 좋은 방송드라마에 몰입하여 공감하는 시민들의 시청자 반응 현상에서 확인한다. 예를 들면, 요즘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방송드라마 <미생>에 대한 호평과 시청자들의 반응 능력에서 인간의 역지사지 능력은 겉으론 은폐되어 있을 뿐 건재하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역지사지 능력과 작은 실천이 곧 그 사람의 인간품격과 그 국가사회의 격을 결정한다. ‘갑을관계’에서 갑이 을의 입장을 역지사지할 수 있을 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갑이 을 자리에 내려와 뒤틀린 생명질서를 아픔으로 느끼고, 고통을 분담하면서 고통 원인을 함께 해결할 때, 갑과 을은 세속 한복판에서 함께 초월을 경험한다. 그러한 초월 경험은 인간성을 되찾은 기쁨, 자유, 행복한 뿌듯함을 갑·을 모두에게 선물한다.
< 김경재 목사: 한신대 명예교수 >


23일 오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평화의 광장에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4주기 행사가 열려 전사자 유가족 등이 헌화를 하고 있다. 이날 해병 부대원, 정부 주요 인사, 각계 대표, 시민, 학생 등 4500여명의 참석자들은 본행사에 앞서 전사자 명비를 참배하고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
<김봉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