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철 목사 앞에서 서약하는 권혁이 집사 부부.

“오직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늘사랑교회(담임 박원철 목사: 85 Parkwoods Village Dr., M3A 2X9)는 5월14일 주일 오후 권혁이 안수집사 장립 임직예배를 드렸다.
박원철 목사 집례로 드린 예배는 변희수 장로의 대표기도에 이어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총회(KAPC) 캐나다 노회장인 지근우 목사(런던 안디옥교회 담임)가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 6:11~12)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지 목사는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말씀을 바탕으로, 말씀을 좇아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 뜻의 본질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임직자와 성도들에게 전했다.


임직식은 박원철 목사가 권혁이 집사의 서약을 받고 안수위원의 안수기도와 악수례, 공포 등 순으로 진행됐다.
정관일 목사(KAPC 전 총회장:가든교회 전 담임)는 권면과 축사에서 “남이 보든 안보든 하나님만 바라보고 축도록 충성하며 헌신하는 안수집사가 되라”며 임직을 축하했다. 김택준·김정현 집사의 축송과 임직패 증정에 이어 답사한 권 집사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열심히 겸손과 경청과 열정으로 섬기겠다”며 교우들의 도움과 기도를 당부했다.
이날 예배는 장영일 목사(사랑의교회 원로)의 축도로 마쳤다.


< 문의: 416-822-3039 >


서부장로교회 설립 30주년 기념케이크를 자르는 박헌승 목사 내외와 장로들.

에녹합창단, 5월27일 오후 5시 서부장로교회서

캐나다 에녹대학(학장 박헌승 서부장로교회 담임목사)의 노년학생들로 구성된 「에녹합창단(Enoch Choir)」이 5월27일(토) 오후 5시부터 서부장로교회(3637 Grand Park Dr, Mississauga, L5B 4L6)에서 첫 정기연주회를 개최한다.
에녹합창단의 이번 연주회는 합창단 출범 10주년을 기념하는 한편 에녹대학 30학기와 서부장로교회 설립 30주년 기념을 겸해 갖는 뜻깊은 행사다.


에녹합창단은 에녹대학이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지난 2007년에 학생 20명으로 창단, 꾸준히 연습하고 활동해 오며 이제는 50명의 단원으로 불어났다. 합창단원들은 매주 합창연습 외에도 한인사회 각종 행사와 양로원, 병원 등 곳곳을 찾아다니며 목소리를 통한 황혼의 사랑봉사에 힘을 쏟고 있다.
첫 연주회를 앞두고 설레임 속에 화음을 연마하고 있는 합창단원들은 이번 정기연주회가 “창단 10주년 감사, 에녹대학을 운영하는 서부장로교회 설립 30주년 은혜의 감사, 에녹대학 30학기의 여정을 감사하는 ‘감사의 연주회’”라면서 “아름다운 계절, 오월 가정의 달에, 오랫 동안 기도하며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정성껏 준비한 실버들의 합창축제에 음악을 좋아하고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많은 성도들과 동포들께서 오셔서 감사와 감동의 시간을 함께 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에녹대학 담당 김경예 전도사도 『노을 녘에도 하늘을 우러러/ 춤추며 노래하는 사람들이/ 5월 창공을 열어 뜨거운 노래를 부릅니다/ 하늘 빛으로 씻겨 정결한 사람들이/ 감사로 쏟아내는 노래/ 무지개가 되어 천지에 진동합니다/ 5월 아카시아 꽃잎이 흩날리는 소리처럼/ 하얗게 눈부신 노래를 부릅니다…』는 내용의 자작 축시 ‘5월에 부르는 노래’를 지어 어르신 학생들의 합창발표를 축복했다.
합창단 지휘는 김유억, 반주는 오샤론 씨가 수고한다. 또 네쉐마 남성중창단과 그레이스 첼로 앙상블이 찬조 출연한다.


< 문의: 416-993-3134, 905-803-8800 >


우리는 종종 남을 슬프게 하는 소식을 믿음의 친구들에게 전하는 수가 있다. 이것은 그들을 슬프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시련을 대비케 하는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 삶의 주위에서 신앙적인 노력이 헛되이 돌아가는 일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다. 어떤 사역자들은 시작은 훌륭하나 드디어 그들의 모든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경우가 우리 한국교계와 이민 동포사회의 교계에서도 너무나 많음을 보았고, 보고있다. 즉 젊어서부터 계명(복음)을 지킨 소망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사랑의 억제와 주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큰 사랑의 결핍으로 모두를 상실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들 모두가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이미 얻은 바를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내세의 소망과 성령의 은사를 맛보았던’ 우리는 신앙에 대한 좋은 평판을 들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은혜와 죄악에 대한 확신, 세상의 허무성과 <복음>의 우월성,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깨달아 알게 된다. 주안에서 온전한 <상>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안에서 진실하며, 끝까지 믿음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구원과 자비와 축복은 경건한 자가 바라는 바 가장 큰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주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를 구속하신 분이요,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신 분이요, 나의 죄를 용서하신 분이요,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나에게 <영생>을 부여하신 <분>이시다. 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멀리 하려는 모든 것에 반해 더욱 더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속 끝까지 순종하자! 또한 우리는 때때로 연령과 은사와 은혜와 신분에 있어서 우리들보다 우위에 있는 자들을 존경해야 된다. 그들을 시기하거나 또는 아첨해서도 안 되며, 그들이 그릇 행하고 있다고 생각될 경우 무조건 그들을 표방해서도 안된다. 교회는 남의 비밀이나 혹은 숨겨진 사실을 판단할 수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판단의 결과가 선을 이루기 보다 항상 일찌기 염려했던 바 우리의 경솔하고도 불합리한 열심이 보다 큰 해를 초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마13:29-30). 우리는 매일 매시 모순된 내 자신을 발견케 되지만 우리가 서 있는 위치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해서는 안 된다. <경건치 않은 자들>은 세상에서 주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이요, 하나님과 양심에 관한 관심이 전혀 없는 자들이다.

예를 들어 주 하나님앞에서 <기도>를 억제하는 자, 또한 자기들의 사명일지라도 그들이 받기로 되어있는 호의와 이익을 상실할까 두려워, 부한 자나 세상 권력자들에게 비난하지 못하는 자, 그리고 <주 하나님의 역사를 행하는데 게으른 자들>이다. 우리는 놀라운 은혜아래서 내 자신의 힘을 키우며, 모든 죄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출 해 내는데 가장 큰 수단이 되는 <은혜>를 무관심함으로, <은혜>를 역 이용하는 일은 죄인들의 가장 부도덕하며 악한 데로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나의 삶이 나의 믿음에 부합하도록 최선을 다하자! 순간적인 세상의 쾌락이 영원한 <불>의 심판으로부터 오는 나의 고통을 <감>할 수가 있겠는가?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시4;4). 나의 신앙이 조롱을 당하며 핍박을 당하면 당할수록 나는 그 신앙을 더욱 견고히 붙들고 고수하도록 해야 한다. <은혜가 넘치는 성도들이나 말씀을 탐구하는 성도들은 교훈과 지도와 그리고 위로를 찾을 수 있는 <샘>이 되고 <우물>이 되는 <목회자-사역자>를 찾아 가게 된다. 이런 것들이 교회 부흥의 원천이 되고 주 하나님의 공동체(교회)가 되는 것인 줄 믿는다.

<복음>을 분명히 증거하지 못하는 사역자들은 교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줄 것이 없다. 진리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생명의 <샘물>이 된다. 복음의 깊이도 별로 없고 복음 증거에 분명함이 없는 무지하고 공허한 사람들로부터 우리들이 성경 지식과 이해력을 얻어 보려고 하면 우리들의 기대는 허사로 끝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비>를 부어주는 <구름>을 따라가자! 바람에 밀려가는 구름(사역자)을 떠나자! 그 바람은 성령의 바람이 아니라 자기들의 욕망과 탐욕을 추구하는 <바람>이다. 그들은 지식(말씀)이 없고 진리가 들어 있지 않은 말로, 교훈(성경,교리)을 어둡게 한다. 우리는 막차(주님이 주신 복음적인 교회)를 잘 타야 한다. 소리는 크나 의미없는 허탄한 자랑의 말과 그럴 듯한 표현으로 교인들을 현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적 분발을 하며 살아가자! 은혜와 경건을 발전시키며 또 유지하는 일이 매우 중요 하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자! 우리의 몸은 우리 영혼의 장막에 불과하다. 우리는 육신의 장막(흙집)에서 곧 벗어나야만 한다. 임종시에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벗게 된다. 부활의 아침이 이를 때까지는 우리의 육신이 무덤속에 눕혀질 수 밖에 없다. 기록된 주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실천하고 있는 자가 곧 그 말씀대로 살수 있는 사람이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관론자와 낙관론자와 현실주의자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다른지를 터널에 빗대어 비유한 우화가 있는데요. 비관론자는 터널의 입구만을 보는 자입니다. 터널에 출구는 없고 입구만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두움으로 가득 차있는 곳, 소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으로 봅니다. 이것이 비관론자들이 삶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이와 반대로 낙관론자들은 터널의 출구를 봅니다. 터널이 제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출구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보며,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따라서 터널을 지나가는 동안 캄캄하기 때문에 넘어질 때도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고, 결국에는 환한 빛이 기다리는 출구에 도착합니다.


분명 비관론보다는 낙관론이 삶을 바라보는 더 좋은 태도인 것은 사실입니다만, 문제는 낙관론도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현실주의자의 관점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 현실주의자들은 터널의 어느 부분을 볼까요? 입구와 출구를 모두 봅니다. 그리고 터널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수많은 터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또한 봅니다. 한 부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인생에는 어두움의 입구로 들어서야 할 때가 있고, 그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환하게 볼 수 있는 형통함의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둘 다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터널 하나 통과했다고 해서, 고생 끝, 행복 영원이 아니며, 또한 그 반대로 행복은 순간이고 고생이 오래 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 역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두 겪어보아서 아시겠지만, 이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이지 않습니까? 문제가 해결되어서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렇게 좋은 때가 제법 오래 갈 때도 있지만 금세 지나가버리고 또 다른 문제 앞에 고통스러워하고 신음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잖아요. 그리고 반대의 경우, 앞이 막막하고 고생만 죽어라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올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결국, 인생이란 전화위복이 되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전복위화’가 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 특별히 신앙생활을 비관적으로 바라봐서도 안되고 무조건적인 낙관론에 사로잡혀 있어서도 안됩니다. 그 대신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상황이 아닙니다. 상황을 바라보게 되면 터널의 입구를 막 통과했을 경우 낙심하거나 두려워하게 될 것이고, 출구를 막 빠져 나왔을 경우에는 긴장을 풀어버리고 기고만장해지기 쉬울 거에요. 하지만, 인생 전체의 그림을 보게 되면, 순간순간의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상황과 여건이 어떠하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 힘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고, 성령께서 우리 속 사람을 강건케 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느냐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요. 우리의 삶이 형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든,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든, 모두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시간, 그렇다면 상황에 따라 마음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믿으며 그런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멋진 인생이고 행복한 인생이지 않을까요?

< 송만빈 목사 - 노스욕 한인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