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4.13 총선을 앞둔 한국 각 정당의 후보자 공천을 보면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이것이 과연 시민 민주주의이고 대의(代議) 민주주의 인지, 직접 선거에 의해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인지 의문일 뿐더러, 한국정치의 앞날에 대해서도 암울한 전망 밖에 들지 않는다.


국민의 대표로 의정활동에 임할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인데, 후보자를 국민 뜻과는 별 상관없이 정당의 유력자 몇 명이서 추려내고 잘라 내 입맛에 맞는 인물들로 지역구에 내리 꽂는다. 선거구민들은 당에서 그렇게 결정한 후보들을 놓고 선택의 여지없이 가부만을 표시해야 할 판이다. 그것은 여도 야도 마찬가지다. 비례대표는 그런대로 정당의 정강정책을 구현할 전문인들을 택한다고 볼 때 당에서 어느 정도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친다하자. 그러나 지역구 국회의원은 그 해당 지역민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대변할 인물을 택해 국회로 보내는 것이 대의정치의 기본이다. 그런데, 국민들의 뜻은 겨우 몇% 반영한다는 시늉만 낼 뿐, 당의 권력을 쥔 세력이 맘대로 후보자를 재단하고, 자기들 기준에 따라 인물을 평가하고 분별해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내려 보내 투표하라 한다. 이른바 전략공천이니 험지공천, 자객공천 운운 희한한 행태와 용어가 난무한다.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는 볼 수 없는 정치 후진국의 생생한 실상이다.


대통령이 사적 감정을 가진 인물을 배제하고, 국회를 거수기로 만들어 의회권력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절대 충성파를 중용한다. 말썽과 파문의 주인공이나 지탄받은 인물들도 충성도에 따라 무조건 발탁하고, 의정활동이 아무리 뛰어나도 파가 다르고 성향이 달라서 퇴출시킨다. 퇴임 후 보신(保身)과 수렴청정까지 계산해 자기 사람 만들기 미래 보장형 공천작업에 몰두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는 집권여당은 정말 꼴불견이다. 오죽하면 자당의 대표를 두고 “XX 죽여버려”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을까. 안중에 티끌만큼도 없는 민의 외면과 국민 무시의 방자함이 하늘을 찌른다. 무엇보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의 기초를 짓밟는 오만무례한 권력의 횡포다. 유신시절 권력자가 뽑아 내리꽂기 국회의원을 만든 유정회와 얼마나 다른가. 마치 전두환 정권 말기 퇴임 이후를 위해 ‘일해재단’이니 뭐니 온갖 머리를 굴리던 때와는 뭐가 다른가.


여당의 독재적 국정운영과 의회무시, 불통 등을 비판해 온 야당은 어떤가. 야당은 자신들의 정의감 만큼이나 민주주의에 충실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들이 비난해 온 집권세력이 그러하고 정치판이 원래 그러니 따라 해도 그만인 것인지, 그들 또한 오십보 백보요, 더 가관이다.
국민과 지역민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한 두명의 권력자가 전권을 휘두르며 “너는 안돼, 너는 괜찮아!” 하고 멀쩡한 인물의 목을 치고 명예를 난도질하는 끔찍한 칼질·학살 공천과 일그러진 선거의 악습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그러고도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고 삼권분립 원칙이 확고히 구현되며 수준높은 의정과 국정이 이뤄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인가.
민주주의는 민의(民意)의 정치제도다. 국민의사에 따라 국정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국민 모두가 너나없이 직접 정치에 나설 수는 없으니 대표를 뽑아 위임하는 형식을 취한다. 곧 대의 민주주의, 대의정치다.


선거는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고 대변할 정치인을 선출하는 민주주의 가장 중요한 행사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축제라 한다. 그런데 민의가 아닌 권력에 의해 후보자가 정해지고 유권자는 택일만을 강요 당한다면, 자연히 국민들의 정치흥미와 참여 열기는 떨어지고 혐오가 일 것이다. 기권과 불참으로 투표율이 낮아지면 민의와 상관없이 소수의 지지로 선출된 정치인들의 의회는 보나 마나다. 당연히 민생보다 권력을 맴도는 그들만의 리그로, 집권자들의 ‘권력놀이 공원’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저 민주주의의 흉내를 내는 의회정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게 뻔하다. 그동안 보아 온 한국정치의 고질병 증상 가운데 하나다.


한국의 집권층이 존숭해 마지않는 미국에서 왜 진정한 민주주의는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
미국은 주요 공직 후보자가 소속 정당에서 예비 선거를 통해서 선정되고 지명된다. 각 정당과 주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예비 선거에 참가하는 수천에서 수백만의 당원들에 의해 후보가 결정된다. 간부 당원들이 모여서 결정하는 ‘코커스’(caucus)가 있고, 일반 당원에 비당원까지도 참여할 수 있는 ‘프라이머리’(primaries)로 구분될 뿐이다. 결코 후보 지명을 당의 수뇌부가 독단적으로 내리꽂거나 칼질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 당 수뇌들은 하루아침에 매장되고 말 것이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총선의 시대정신

● 칼럼 2016. 3. 18. 20:11 Posted by SisaHan

정치세력, 정당의 입장에서 선거란 무엇일까? 선거란 대중의 삶을 관통하는 감각과 생각을 포착하고, 거기에 부합하는 시대정신을 제시함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얻는 정치적 의례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세력들의 비전과 가치들은 서로 경합하고, 대중의 선택과 만나고 엇갈린다. 그리고 때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 4·13 총선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경선과 공천 과정에서 잡음이 난무한데 정당들이 어떤 시대정신으로 대중의 마음을 읽고 얻으려 하는지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깜깜이 선거다.


약간의 비례대표를 제외하면 지역대표를 뽑는 게 총선이라 지역의제에 관심이 쏠리는 건 인지상정이다. 대선과 달리 시대정신이 부각되지 못하는 나름의 이유다. 게다가 여당 쪽은 굳이 새로운 의제를 내세울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이길 가능성이 높은 선거라고 볼 텐데 판을 깔아줄 이유가 없다. 야권은 다르다. 구조적 열세, 위기상황이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통해 판을 흔들 필요가 있다. 하지만 분열한 야권은 각자도생 모양새다. 시대정신이 사라진 자리에 정치공학만 나부낀다. 그 결과는 기득세력의 확대재생산이고, 서민의 고통 지속일 것이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는 변화의 열망이 뜨거웠다. 복지국가가 시대정신으로 떠올랐다. 2012년 새해 사회정책 전문가 31명을 대상으로 한겨레가 실시한 조사 결과다. 그해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공정과 정의, 평등으로 응답했고, 박근혜 후보는 경제민주화와 복지 의제를 과감하게 끌어안았다. 51.6%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다. 2007년과 2008년, 대선과 총선의 시대정신은 성공이었다. 이명박 후보가 물 만난 고기처럼 선거를 치를 수 있었던 이유다.


이 시대 대중의 삶을 관통하는 감각과 의식은 무엇일까? ‘불안’이다. 삶 전체를 옥죄는 총체적이며 전방위적인 불안. 불안의 기저에는 경제위기에 대한 실감이 있다. 한국갤럽의 신년조사에 의하면 올해 한국 경제 상황이 지난해보다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응답이 52.2%였다. “올해 우리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와 비슷한 위기일 것이라는 주장”에 58.6%가 공감했다는 결과도 있다.(미디어리서치 신년조사) 불안은 과거와 비교해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가 2040세대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67.4%가 자신의 삶이 불안하다고 응답했다. 4년 전에는 58%였다.
불안도 불평등하다. 경제적 지위, 학력 등 자신을 지켜낼 자원이 적은 집단을 집중적으로 위협한다. 같은 30대지만 빈곤층은 96%가 불안감을 느낀다. 중상층 이상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은 13%에 불과하다. 40대도 다르지 않다. 빈곤층은 90%가 불안을 토로한 반면, 중상층 이상에서는 9.5%만 불안하다.


안보불안(73.9%)보다 경제불안(94.7%)과 외교불안(76%)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최근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보수성향층일수록 불안이 공포를 자극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생존본능에 충실하게 된다. 새로운 불안으로 기존의 불안을 틀어막는 박근혜 정부의 ‘불안의 정치화’ 전략은 이런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거나 말거나 안보불안으로 경제불안을 틀어막는다는 전략의 효과는 변변찮다.
4·13 총선은 세월호 참사 2주기 즈음에 치러진다. 이 사건 이후 국가가 불안을 막아주기는커녕 불안의 근원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퍼졌다. 이 불안의 시대에 각 정치세력은 어떤 시대정신으로 응답할 것인가?
< 한귀영 - 한겨레 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 >



GKYM 국제본부 사무실 오픈

● 교회소식 2016. 3. 18. 20:01 Posted by SisaHan

GKYM 국제본부 사무실 오픈 감사예배에 참석한 이사진과 청년사역자들. 앞줄 왼쪽부터 안형준·김지연·노승환·김혜택·노희송 목사와 사무총장 이동열 선교사·이채원 장로.


노스욕서, 감사예배‥ 청년 열방선교 전초기지로

미전도종족 복음화 비전의 한인 디아스포라 청년 선교운동인 GKYM(Global Kingdom Young-adults Missions Festival: 세계 청년 선교축제)이 2세대형 새 지도그룹 구성과 함께 교회연합 선교운동으로 발돋움하는데 중심적 역할과 훈련센터 구실을 할 국제본부 사무실을 토론토 노스욕에 마련, 오픈 감사예배를 드렸다. 3월10일 낮 새 사무실(99 Empress Ave. North York)에서 드린 예배에는 큰빛교회 임현수 목사와 함께 GKYM을 이끌어 온 김혜택 목사(뉴욕 충신교회)를 비롯해 새 이사진으로 지도그룹에 합류한 노희송(큰빛교회)·노승환 목사(밀알교회 담임)와 사무총장 이동열 선교사(HIM 아이티), 토론토 KOSTA 총무를 역임한 김지연 목사(토론토 컨넥트교회 담임),‘Good Music Ministry’의 안형준 목사(본 한인교회), 유스코스타 총무 전경택 전도사(열린한마음교회)를 포함해 많은 청년사역자들이 참석했다.


이날 예배는 찬양팀 찬양과 합심기도에 이어 노희송 목사가 “국제본부 사무실은 앞으로 마가의 다락방처럼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가운데 청년들이 함께 기도하고 꿈을 꾸며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비전을 품고 출범하게 되었다”고 축원의 인사를 했다. 이어 김지연 목사가 대표기도를 하고 노승환 목사가 사도행전15장 5~11절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다.
노승환 목사는 “예수님이 천으로 묶인 나사로를 살리시고 풀어놓으라 하신 것처럼 이 시대 죄악으로 묶인 청년들을 복음으로 풀어놓아 자유케 하고 선교 헌신자로 세울 때 엄청난 저력을 발휘할 것”이라며 “이 사무실이 복음에 헌신할 청년들을 위한 전략을 세우고 행정을 담당하는 등 영적 전투의 전초기지가 되어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여 자유케 하고 놀라운 부흥을 가져오는 역사가 이뤄지리라 믿는다”고 역설했다.


김혜택 목사는 “지킴 국제본부 사무실 오픈은 작은 일 같지만 하나님의 큰 일”이라며 “우리 안의 뜨겁고 거룩한 복음의 불로 지킴운동을 전개해 나가자”강조하고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이동열 사무총장은 사무실개소 의의를 설명하며 앞으로 국제본부 사무실이 GKYM 대회 준비 뿐만 아니라, 리더그룹 및 교회들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청년 선교 헌신자들의 교육 훈련센터와 파송의 역할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무총장은 특히 토론토 본부사무실과 아이티 선교센터의 유기적 연계로 이론과 실체험의 효과적인 선교훈련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덧붙였다.


한편 올해 제10회 GKYM대회는 12월27일부터 30일까지 미국 로체스터 리버사이드 컨벤션센터에서 3박4일간 ‘우리는 메신저(사자)이다’(We the Messengers, 말 3:1)라는 주제로 5천명이 모이는 집회를 추진한다. 강사진도 1세와 함께 2세도 대거 출연할 예정이다. 참가등록은 10월31일까지 $200, 11월30일까지 $250, 12월23일까지는 $300로 가능하다. 자원봉사자와 스탭, 목회자, 선교사, 신학생, 목사와 신학생의 자녀, GKYM kid(5~12세)의 참가비는 $150이고, 선교단체를 위한 부스도 30개 정도 마련되며 비용은 $250이다.


< 문의: 905-677-7729, 416-226-4190, www.Gkym.org >



[평신도 글마당] 맞장구

● 교회소식 2016. 3. 18. 19:59 Posted by SisaHan

우리 모두는 자신이 나쁜 사람, 혹은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 이라거나 선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평하기에는 약간 부족함을 느낍니다. 사실 자신이 좀 이기적 이었음을 내심 숨길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설령 나의 모든 삶을 이웃을 위하여 살아간다해도, 거기에는 자기만족 이라는 것이 약간은 포함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게 중요 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 하신 말씀은 참으로 의미 심장한 말씀입니다. 매일의 일상을 그저 그렇게 돌아가는대로 지내다가, 주일에 예배드림으로 그자리에서 회개의 눈물도 흘리고, 감사의 마음이 되살아 나기도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매일을 뒤돌아 보는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친구들과 즐겁게 만남을 갖고 집에 돌아와서 말실수가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상대를 배려하지 못했던 말이 생각나서 입니다. 그렇다고 친구 사이에 금이 가거나 상처를 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돌아보고 생각을 다시하는 습관은 좋은 습관이라 생각합니다.
‘장구를 가장 잘 치는 사람은 맞장구를 잘 치는 사람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에 맞장구를 잘 치면,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고, 선한 사람으로 인정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비평을 하거나, 상대의 말을 자르는 습관은 소통에 찬물을 끼엊는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어느 모임이나 토론에도 이런 비평가가 한 사람 반드시 끼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응원 한마디에 힘이 솟고, 자신의 진로를 바꾸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욱 자신의 삶이 완전한 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존경 받는 성공을 하신 분’들의 공통점은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충고를 잘 경청하는 사람들이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부모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라 합니다. 자녀들이 잘해서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 이든지 자녀들의 성격과 재능을 존중하고 의견에 맞장구를 잘 쳐주는 것이 부모가 자녀들에게 해야 할 일입니다.


글을 쓰시는 어느 작가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쓴 글에 완전 만족을 느낀다면 다음 글을 쓸 수 없다고 합니다. 부족함을 느끼기에 글을 계속 써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잠시 돌아 보았으면 합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훨씬 많음을 알게 됩니다. 나의 부족함이 얼마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알게 될 때 ‘맞장구’가 나오게 됩니다.
성경에도 선생이 되지 말라 기록하셨습니다. 맞장구를 잘 치는 사람에게는 친구가 많습니다. 맞장구를 잘 치는 사람은 어딜 가도 환영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 ‘맞장구’ 잘 배워서 함께 춤 한번 춰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 정훈태 - 동산교회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