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세월호 참사와 민주주의

● 칼럼 2014. 9. 2. 16:07 Posted by SisaHan
세월호 참사의 일차적인 충격은 우리 사회 곳곳에 깊이 뿌리박힌 안전불감증이었다.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국민 안전과 생명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경고였던 셈이다. 성숙한 사회였다면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 철저한 진상 규명과 함께 확실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선에서 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이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유족들의 단식과 농성이 이어지면서 세월호 참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여러 논란을 촉발시켰다. 세월호 특별법을 놓고 전개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첨예한 갈등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가장 먼저 제기된 건 국가와 국가권력에 관한 문제의식이었다. 300여명의 생때같은 목숨이 눈앞에서 수장되는데도 구조작업을 제대로 못한 정부에 ‘이건 국가도 아니다’는 매서운 비판이 쏟아졌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 국가는 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는 당연한 질책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에 제기됐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정부는 매정하게 외면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부근에서 농성 중인 유가족들의 면담 요청을 며칠째 모른 척하고 있다. 그사이 경찰들은 유족들을 차벽으로 겹겹이 에워싸서 일반 국민으로부터 고립시켰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가권력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할 때 그 정당성을 갖는다. 그래야 할 국가권력이 세월호 참사 이후 보인 행태는 국민이 아닌 국가 자체를 보호하고 있는 양상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 그 국가 안에 세월호 유가족과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은 제외된 것인가. 국가권력이 국민 개개인을 보호하지 않고 국가 자체를 보호하려 할 경우 그런 국가는 소수 지배층의 권력 유지만을 위한 독재체제로 전락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에서 봐왔던 익숙한 모습이다.
 
정부나 의회가 국민을 대변해 정책을 결정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 협상에 나섰지만 두 차례 합의가 유족들에 의해 거부되면서 대의민주주의가 표류하고 있다. 이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모두 유족들의 이해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앞으로 이런 일이 지속되면 힘없는 사회적 약자는 계속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치권이 똘똘 뭉쳐 이를 밀어붙일 경우 허울뿐인 대의민주주의는 국민들의 이해와 동떨어진 채 대리인(정부와 의회)들끼리의 이해관계에 따라 작동하게 될 것이다.
 
여야 합의가 무산되자 새정치민주연합은 유족 대표가 참여하는 ‘3자 협의체’를 제안했지만 새누리당은 대의민주주의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국민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대의민주주의가 세월호 유족의 요구를 묵살하는 논리로 동원되는 이 역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민주주의 기본 원리 중 하나인 법치주의는 또 어떤가. 민주사회에서 법이란 기본적으로 국가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국민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그 법치를 앞세워 수사권과 기소권을 보장하는 특별법 제정 요구가 사법체계를 흔든다며 반대하고 있다.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 억지 주장이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치가 거꾸로 자식들의 죽음의 진상을 알고 싶다는 유족의 요구를 가로막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새누리당이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기존의 사법체계 안에서 이득을 보는 계층은 누구일까. 유족을 제외한 다수 일반 국민인가. 아니면 세월호 진상 규명을 두려워하는 소수 권력층인가. 법치주의에 대한 기본 개념부터 되돌아봐야 할 상황이다.
초유의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기존 방식과는 전혀 다른 대응을 요구한다. 그것은 형해화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진전시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시험대에 올라 있다.
< 한겨레신문 정석구 편집인 >


프로농구 울산 모비스 코치였다가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박승일씨가 19일 ‘얼음물 뒤집어쓰기’(아이스버킷 챌린지)에 동참했다. 박씨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몸이라 얼음물을 뒤집어쓰지는 않고 대신 인공 눈꽃송이를 날렸다. 또 “시원하게 얼음물 샤워를 할 수 있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는 글도 남겼다. 팔다리가 멀쩡하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을 받고 있는 건지 새삼 일깨워준 박씨의 ‘분투’였다.
 
‘얼음물 뒤집어쓰기’는 미국 루게릭병협회가 이 병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고 루게릭병 환자를 돕기 위해 미국에서 시작한 모금운동이다. 이 운동이 한국에까지 상륙해 유명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최근 교황 방문과 세월호 침몰은 우리로 하여금 소외된 이웃들을 한번쯤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이 행사가 루게릭병 환자 등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계기로 작용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사에 참여하면서 한번쯤 짚어볼 대목이 있다. 첫째는 행사의 취지를 소홀하게 다뤄서는 안 될 것이다. 차가운 얼음물이 닿으면 마비되는 증상처럼 근육이 잠시 수축하게 된다. 루게릭병 환자들은 이런 고통을 지속적으로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고통을 묘사하기 위해서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건데, 유행처럼 올라오는 얼음물 뒤집어쓰기 동영상을 보면 너무 재미 위주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한다.
 
둘째는 기부의 한계다. 이런 기부 행사가 약자를 도울 수 있는 건 맞지만, 근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루게릭 같은 희소병은 환자 개인이나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공공 의료보험 체계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얼음물 뒤집어쓰기 같은 행사가 일시적인 치유책이 될 수는 있으나, 안정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기부에 참여하는 따뜻한 마음들이 부디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탄탄한 복지체계와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연대의 힘’으로 승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월호 유족 대표들이 25일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만났지만 특별법 협상의 돌파구는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다. 새누리당은 야당이 제의한 ‘유족을 포함한 3자 협의체’ 구성을 거부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3자 협의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강도 높은 대여 투쟁을 펼치기로 했다. 특별법의 논점이 법안 내용에서 논의 틀로 이동했지만 여야가 또다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3자 협의체 구성을 ‘입법권 침해’라고 비판했다. 이완구 원내대표는 유족이 특별법 논의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대의민주주의 포기’라고 했고,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는 ‘헌정질서 위배’로 규정했다. 논리 비약이 심하다. 3자 협의체는 협상기구이지 의결기구가 아니다. 여야는 유족의 의견을 수렴할 뿐이며 법은 어디까지나 국회가 만든다. 박근혜 대통령도 “여야가 피해자 단체와 잘 협의해 좋은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비슷한 전례도 많다. 지난해 철도파업 때 여야와 철도노조 3자가 만나 해법을 이끌어낸 게 대표적이다.
현실적으로 야당이 특별법 협상을 주도하긴 어렵게 돼버렸다. 세월호 특별법의 꼬인 매듭은 여당이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새누리당 지도부는 야당을 탓하고 유족을 원망하고 청와대를 감싸기에 바쁘다. 김무성 대표는 “세월호에 발목 잡혀 한국 경제가 풍전등화 위기에 놓였다”며 특별법을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몰았다. 이완구 원내대표는 야당의 사과만 거듭 요구한다. 이정현 최고위원은 “야당은 입법부가 할 일을 전부 대통령에게 해달라고 한다. 장난감을 고를 수 있는 나이임에도 엄마에게 떼를 쓰며 골라달라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이라며 대통령 방패막이를 자처했다.
 
여당 내부엔 집권세력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김태호 최고위원은 “청와대와 정부가 적극 고민하고 이해와 설득을 구해야 한다”며 청와대를 겨냥했다. 의원 연찬회에서도 여당이 책임 있게 나서 유족과 대화하라는 목소리가 표출된 바 있다. 이완구 원내대표가 뒤늦게나마 유족을 만나 대화한 것은 일단 평가할 만하다. 진전된 결론이 도출된 건 아니지만 자꾸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하다 보면 절충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기존 법으로는 정의와 형평을 구현하기 어려운 특별한 상황에 적용하려고 만드는 게 특별법이다. 이에 비춰 특별법 논의에 임하는 새누리당의 태도는 너무 소극적이며 옹졸하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집권세력으로서 책임을 되새기기 바란다.


[칼럼] 슬픔의 힘

● 칼럼 2014. 9. 2. 16:01 Posted by SisaHan
올여름 ‘베트남 평화 기행’을 다녀왔다. 한국군과 미국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행해졌던 지역을 돌아보며 참배하고 사죄하고, 우리의 내일이 서로에게 평화이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는 시간이었다.
 
여행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이 나라는 아주 놀라웠다.
베트남은 1858년부터 프랑스의 침략을 받기 시작해서 1885년 완전히 그 지배하에 놓였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지배 아래 잠시 들어갔다가 일본 패전 뒤 다시 지배권을 욕심낸 프랑스로 인해 1946년 제1차 베트남 전쟁인 항불전쟁을 치른다. 1954년 결국 승전하여 프랑스를 베트남에서 철수시키지만 이 사이를 치고 들어와 남베트남에서 실력을 행사하던 미국으로 인해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다시 제2차 베트남 전쟁인 항미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때 미국의 공세는 엄청났다. 이 나라를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고 공언하고는 제2차 세계대전의 3배에 달하는 폭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전쟁은 1975년 미국의 패배와 베트남 남북통일로 끝이 났다. 약 100년에 걸친 식민지배, 약 30년에 걸친 강대국과의 전쟁. 그 전쟁을 결국 승리로 끝낸 베트남이었다. 놀라울밖에.
무려 130년. 학대와 수탈 100년, 폭탄과 함께 자고 깨며 ‘내일’이란 단어도 잊고 살아야 했던 30년. 지하로 토굴을 3층까지 파들어 가서 빛 한번 못 보고 살아도 포기하지 않은 시간들. 
베트남 사람들이 지닌 이 힘이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들은 ‘위트와 낙관’이라고 답했다. ‘전쟁과 함께 살자!’는 표어로 30년 전쟁을 견뎌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들은 ‘끝’을 꿈꾸지 않았던 것임을 알았다. 해피엔딩을 꿈꿨다면 미국과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비교 자체가 안 되게 초라한 자신들의 현실을 보면서 그래도 한번 가 보리라 결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베트남 기행 내내 윤동주 시인의 ‘팔복’이란 시가 떠올랐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시인은 원래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오’라고 썼다가 다시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고쳐 썼다. 
슬픔으로 가득한 땅에서 해피엔딩을 바라던 시인은 슬픔에 참여하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해피엔딩을 바라는 마음은 외려 슬픔으로 가득한 이 순간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끝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지치는 속도도 더 빠르다. 시인은 슬픔의 오늘을 온전히 함께하는 것으로 슬픔을 극복한다.
세월호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진심으로 아파하기도 전에 각종 여론 매체들이 자꾸 ‘일상 복귀’를 종용한다. 그들이 말하는 일상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동년배의 죽음을 잊지 않고 슬퍼하며 살아가는 것이 학생들의 일상이 아니며, 자식 같은 아이들의 죽음을 잊지 않고 슬퍼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른들의 일상이 아니라 말하는 것인가?
 
용산참사도, 쌍용차 사태도, 밀양 송전탑도, 철도민영화도, 의료민영화도, 4대강도, 세월호도 그 어떤 슬픔도 끝나지 않았다. 이 모든 슬픔이 우리의 일상이다. 해피엔딩으로 되레 절망을 가르치며 어쩔 수 없는 포기가 우리가 살아야 할 일상인 양 말하지 말라. 지금 흐르는 슬픔을, 끝나지 않은 슬픔을 일상으로 가져와 우리도 30년쯤 함께 걷다 보면 돈과 힘이 아닌, 꿈이 결국 승리의 깃발을 삶의 복판에 꽂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함께하는 슬픔의 힘이 이제 나의 일상이다.

< 임자헌 - 한국 고전번역원 번역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