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천에서 용이 나와야 한다

● 칼럼 2015. 1. 23. 20:47 Posted by SisaHan

나라가 걱정이다. 바야흐로 재벌 3세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 창업주나 2세들의 기업가정신을 도무지 찾아보기 어렵다. 계열사에서 몰아주는 운송업을 맡는가 하면, 심지어는 수제맥줏집, 사내 커피숍을 경영하는 이들까지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이상한 통계들이 자꾸 눈에 띈다. 2013년 신규 임용 법관 중 51.4%가 수도권 출신이고, 현직 법관의 출신 고교 1~3위를 서울의 외고들이 차지했다.
한편 로스쿨의 등장과 함께 판검사나 변호사가 되려면 3년 동안 연간 2000만원에 달하는 등록금을 내줄 부모가 있어야 한다. 최근 들어 사법부가 노동, 언론, 재벌 총수의 비리와 관련된 사건에서 보수적인 판결을 내리고 있는데, 법조계가 부유한 집 자녀들로 채워지면 사법부의 보수성이 더 심화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을까?


돌아보면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연이어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을 가능케 한 높은 사회적 이동성이다.
대한민국 건국 후 실시된 농지개혁으로 다수 농민들이 소작농의 신세에서 벗어났다. 한국전쟁은 왕족과 양반, 지주계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그리하여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의 기회가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녀에게 주어졌다.
1960~70년대 부모님과 누이의 희생으로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한 중·소농과 도시 서민의 자녀들이 기업과 정부 관료로 진출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이들에겐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혹은 가난에 허덕이는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는 절실함과 도전정신, 패기가 있었다.
그렇게 축적된 힘으로 1980년대에는 대학생이 된 농민과 도시 서민·중산층의 자녀들이 지식인들과 연대하여 민주화를 쟁취해냈다. 이들에겐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모두가 나라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뜨거운 염원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20년 사이에 부모의 부와 지위가 자녀에게 세습되고 있다. 계층 이동은 멈추었고, 새로운 도전과 성장의 가능성은 벽에 부닥쳤다. 우리 사회의 역동성이 죽어가면서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어렵게 되었다. 여기에 좌우 이념 대립과 세대간 갈등이 더해져 우리 사회의 통합은 더 멀어져 갔다. 아마 이대로 10년쯤 간다면 대한민국의 위상은 아르헨티나처럼 추락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의 통합과 역동성을 되살리려면 개천에서 용이 나오도록 도와야 한다. 우선, 사회가 빈곤층 자녀의 보육과 교육을 책임져야 한다. 지금의 열악한 ‘개천’에서는 부모가 생계에 쫓겨 어린아이들을 제대로 돌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가족이나 마을이 담당하던 역할을 이제는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사회가 감당해야 한다. 현재 몇몇 지자체와 교육청이 협력하여 마을교육공동체나 교육혁신지구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미래의 용들을 길러내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취학 이전의 유아 시절에 격차를 줄여주는 것이 효과가 크다. 나아가, 대학입시 제도의 보완이 필요하다.
지금도 저소득층 자녀를 선발하는 기회균등 전형이 있지만 그 규모가 너무 작다. 대학 당국은 공정성·객관성에 얽매일 게 아니라 성적은 다소 낮지만 역경과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미래의 용들을 더 적극적으로 발굴해야 한다. 대학이 미래의 인재를 키워야지, 사교육업체와 학부모의 욕심에 힘을 실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끝으로 ‘과거의 용’들이 미래의 용들에게 부족한 사회적·문화적 자본을 지원하고, 그들이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게 돕는 에인절펀드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 정광필 - 교육활동가, 전 이우학교 교장 >




KPCA 동노회 성경세미나에서 송병현 교수의 구약 강의를 듣고있는 참석자들.


“‘죄짓고 언제든 회개하면 용서’는 이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 돌이킬 수 없는 범죄는 용서 못받아”

해외한인장로회 캐나다동노회(노회장 고승록 참좋은복된교회 담임목사)가 매년 주최하는 목회자를 위한 성경세미나가 1월19~20일 오전과 오후 이틀 동안 토론토 영락교회(담임 송민호 목사)에서 백석대 송병현 교수(Thomas B.Song, M.Div, Ph.D: 구약학: 아래 사진)를 강사로 열렸다.
동노회 교육자원부가 마련한 이번 세미나는 교단을 초월해 참가한 60여명의 목회자들로 성황을 이룬 가운데 올해로 4년째 강사로 말씀을 전한 송병현 교수가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주제로 폭넓고 깊이있는 해석을 곁들인 강의로 참가 목회자들의 호응을 얻으며 은혜로운 재충전의 기회를 선사했다.
다음은 송 교수의 강의 일부 요약이다.


송 교수는 출애굽기 강의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저항하며 반신반의한 처음 모세의 태도에서 하나님을 확신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서 “하나님은 백지장 차이밖에 나지않는 우리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역사하시는 분이 아닌,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소명에 얼마나 성실히 임하느냐하는 것으로 나의 가치와 능력이 좌우된다는 사실이 중요함을 말씀해주신다”고 전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섬기면 내가 존귀해지고,우상을 섬기면 황폐해지고 가치가 없어지는 것과 같음을 모세를 통해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노라』(빌 4:13)고 고백했음을 상기시켰다.


송 교수는 하나님이 출애굽의 뜻을 이루시기 전에 이집트 왕 바로를 강팍하게 하시어 노예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욱 심한 학대를 받고 고난을 당하며 원망이 나오는 상황에서 “육체적 고난도 심하면 영을 상하게 하고, 영이 건강하지 못하면 육체도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서 “모세도 심리적인 병을 앓으며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않거늘 어찌 바로가 내 말을 듣겠는가’라고 원망했는데, 이는 목회자들이 ‘성도들도 내 말을 안듣는데 세상이 듣겠는가’고 외치는 것과 같은, 자신의 위치와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것”이라고 지적, “다함께 모세를 묵상해 보자”고 권면했다.

송 교수는 또 “아론과 모세가 이스라엘 12지파의 세 장자지파 출신이지만 그 지파가 장자권을 박탈당했고, 간음과 사기로 얼룩진 수치스런 지파의 자손들이며, 특히 모세는 살인까지 한 결격사유와 열등감·자격지심을 가진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이를 알고도 부르셔서 이들을 함부로 등한시하지 말고, 과거사를 지나간 일로 돌리며 구원자로 세우신 것임을 알게 하셨다”고 지적하고 “이 또한 부끄럽고 연약한 자격지심을 지녔음에도 불러 사용하시는 우리들의 모습과 같은 이야기”라고 전했다.


송 교수는 이어 “모세와 바로의 대결에서 하나님의 10대 재앙은 1년간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하고 “당시 바로는 신격화된 이집트의 신이었기에,10대 재앙은 이집트의 신과 싸우신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강조했다. 송 교수는 “재앙들은 9재앙까지 일정하고 동일한 패턴으로 3번씩 진행됐는데, 2번은 아론, 3번째는 모세에 의해 역사하셔서 처음에는 선지자, 그 뒤 강화된 재앙은 하나님의 종을 사용하시는 철두철미와 균형감을 보이셨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바로가 강팍해져서 재앙이 10번이나 있었는데, 그 강팍함은 바로 스스로 강팍해진 것인지, 하나님이 강팍하게 하신 것인지?”라며 ‘바로의 강팍함’의 책임소재를 물었다. 송 교수는 “성경에 강팍이 20번 언급되며 처음 10번은 바로 자신에 의해, 나중 10번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소개하면서 “처음에는 바로가 자청해 스스로 강팍해졌고, 나중에는 싸움에서 물러나 이스라엘인들을 내보내고 싶어했으나 하나님이 못하게 강팍을 주신 것으로, 싸움을 시작한 바로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단정했다. 즉 일단 시작되면 중간에 멈춤없이 예정대로 끝까지 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계시록에서 대환란 후에 회개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말씀 그대로 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흉측한 죄를 지어도 언제든 진실하게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받는다’고 말하지만, 이는 선지자의 가르침이고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로, 너무 멀리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죄를 범해) 버리면 용서받을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평생 죄짓고 세상에 살다 죽기 5분전 회개하면 된다’고 이론적으로 말할 수는 있겠으나, 언제 죽을지를 알 수 없어 말이 안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알아서’섬기며, 주님 옆에 늘 머무는 게 좋으며, 건강한 몸으로 잘 섬기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성한 몸으로 딴 짓하며 한 눈 파는 것보다, 장애의 몸으로도 신실하게 섬기는 것이 큰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 문의: 416-889-7700, mira0517@hotmail.com >



지금 호주에서는 아시안컵(AFC Asian Cup)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 주 한국축구대표팀은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 후보이자 홈팀인 호주를 꺾고 조 1위로 8강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뜬금없이 새해부터 웬 축구 얘기인가 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 당시 고대올림픽 스포츠 경기를 인용하면서 복음을 설명한 부분이 여러 군데 나와 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4~25).
이처럼 스포츠 경기나 운동선수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 특히 필자가 30년 이상 축구를 해오면서 축구와 기독교 신앙 사이에도 일맥상통하는 원리가 있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어서 몇 가지 적어 본다.


1. 기본이 중요하다.
축구에 있어서 킥, 헤딩, 드리볼, 패싱, 슛팅, 체력 등의 기본기는 매우 중요하다. 기본이 뒷받침 되지 않는 선수는 어느 수준 이상 발전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도 믿음, 구원, 예배, 기도, 겸손, 봉사와 같은 기본이 잘 되어 있어야 훌륭한 신앙인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다.


2. 협력이 필수이다.
아무리 훌륭한 축구 선수라도 혼자서 상대방을 이길 수는 없다. 최고의 축구팀은 수비와 미드필더 그리고 공격진으로 이어지는 11명의 플레이가 톱니바퀴처럼 물고 돌아가는 유기적인 협력이 잘 되는 팀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여러 다양한 은사를 가진 신자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같이 이루어 가는 신앙 공동체이다. 따라서 직분과 은사에 따른 유기적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3. 법대로 해야 한다.
축구 경기의 규칙은 엄하고 분명하다. 예컨대 패널티박스 안에서의 반칙은 곧바로 벌칙이 주어지고, 패널티킥에 이은 실점은 종종 경기를 패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죄악이요. 사탄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되고 만다. 오직 좋은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다.


축구의 매력은 때때로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것과 경기에 이기고도 골득실에 밀려 탈락하는 이변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생활의 전성기에 떵떵거리고 잘 나가던 것 같은 사람이 결국 엎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신앙생활의 초기에 많이 부족하여 환란과 시련을 겪지만 인내로 잘 이겨내고 마침내 승리하는 사람도 있다.
앞으로 우리 한국팀이 이란이나 일본 같은 강팀들을 파죽지세로 꺾고 55년 만에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으면 하듯이 우리의 신앙의 경주도 하늘나라 챔피언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바란다.


< 임수택 목사 - 갈릴리장로교회 담임목사 >



[한마당] 총과 펜보다 강한 것

● 칼럼 2015. 1. 23. 20:30 Posted by SisaHan

기독교인들이 한번은 가보길 소망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은 성지의 평화보다는 38선 못지않은 긴장감이 넘친다. 2천년 전 로마에 나라를 잃고 떠난 유대인들이 1948년 돌아와 이스라엘을 세우면서 이 땅은 성스럽기보다는 성난 땅이 됐다. 1500여년간 이곳에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에 의해 궁지에 몰린 끝에 분리장벽에 갇힌 신세로 전락했다.
9년 전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 3대 종교 성지가 집중돼 있는 동예루살렘을 순례했다. 팔레스타인인 집단거주지인 아랍구역에서 팔레스타인 소년의 손에 뭔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쇠못이었다. 소년은 우리 일행을 향해 그 못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이스라엘 무장 군인이 본다면? 외신을 통해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게 조준사격하는 이스라엘군을 봤기에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중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은 지나가고 없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숨져 묻힌 곳까지 14개의 지점을 순례하는 ‘비아 돌로로사’(슬픔의 길)는 상인들과 순례객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시장통이다. 그 북새통에서 일행을 놓치고 서둘러 인파 속을 헤치고 나갈 때였다. 한 팔레스타인 청년이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 순간 테러의 공포가 엄습했다. 실제 그 직후 한 한국인 특파원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에 인질로 잡혔다. 우여곡절 끝에 골고다언덕에서 일행들과 재회하자 마치 사지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나처럼 직접적인 위협을 경험하지 않는 이들도 이제 무슬림들에 대한 경계심을 당연시한다. 프랑스의 <샤를리 에브도> 테러로 전세계 매스컴에 의해 ‘무슬림=테러’란 이미지는 더 선명해지고 있다. ‘무슬림공포증’으로 ‘무슬림들이 왜 그러는지’에 대한 질문은 사라진다. 나 또한 무슬림 청년에 의한 주먹질에만 압도될 당시엔, 이슬라엘과 한 몸인 양 행동하는 미국의 우산 아래서 남의 땅을 제 안방인 양 휘젓고 다니며 자존심에 상처를 낸 한국인의 자화상을 볼 수 없었다.


서방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인 가운데서도 역지사지하는 인물이 있다. 세계적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노벨상에 버금가는 상으로 제정한 울프상을 2004년 수상하면서 “남(팔레스타인)의 땅을 점령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이스라엘) 독립 정신이냐?”고 물었다.
바렌보임을 깨운 것은 예루살렘 출신의 팔레스타인인 에드워드 사이드 하버드대 교수였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로 유명한 사이드는 “동양(오리엔탈)의 이미지란 동양을 약탈 대상으로 여기며 인종차별 의식을 지닌 서구인들의 편견과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 샤를리는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했지만, 무슬림들은 아무도 모르게 지속적으로 당해왔다. 그러면서도 피해자들이 아니라 공격자와 테러범이란 이미지가 더욱 부각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잔혹한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의 보복 테러와 살상에 동의할 수는 없다. 어떤 테러도 반대하고 혐오한다.

하지만 그 테러를 계기로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을 격리시킨다면서 결국은 대다수 무슬림들을 더 높은 분리장벽 안에 가두려는 서구의 집단의식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왕따의 분리장벽은 근본주의자들과 다수 무슬림들을 하나로 단결시켜줄 뿐이다.
2001년엔 샤를리 테러보다 더한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9.11테러가 있었다. 당시 미국인들이 무슬림들을 다 때려죽일 듯 증오감에 치를 떨 때 전혀 다른 행동을 취한 이들이 있었다. 기독교 종파 미국퀘이커봉사위원회였다. 그들은 무슬림들을 초청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물었다.


이제 샤를리도 무슬림들도 더 이상 죽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란 이름으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붓기 전에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리고 우리가 핍박하거나 그에 동조함으로써 상처 입은 이들에게 용서를 청해야 한다. 강자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약자들의 예언자를 조롱하는 것만이 아니다. 관용과 포용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강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 한겨레신문 조현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