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절망을 낳고 그 절망이 다시 비극을 낳고 있다. 요 며칠 새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딸을 잃은 아버지가 슬픔을 못 이기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일이 벌어졌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은 좀체 멈출 줄을 모른다. 적절한 심리치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기력과 허탈로 삶의 의욕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태도가 계속될 수 있다. 그런 삶은 언제 어디서 끊어질지 모른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세월호 침몰은 자식과 함께 그 부모까지 데려가게 될 판이다.
 
무엇보다도 부모의 상처 난 가슴에 소금을 뿌리는 짓부터 멈춰야 한다. 페이스북에 유가족을 비난하는 글을 올린 한 사립대 교수나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같은 망언은 더이상 없어야 한다. 또 해경이 나서서 피해 가족들에게 사고 상황을 설명하는 일도 중단해야 한다. 검찰 수사 내용을 보면, 이제 해경은 구조자가 아니라 아이들의 죽음을 방치한 범인으로 바뀌고 있다. 부모들에게 더는 치욕을 안겨서는 안 된다.
현재 피해 가족에 대한 정신건강 상담과 치료는 안산 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가 맡고 있다. 지금까지 213가구를 찾았지만 상담에 응한 건 110가구뿐이라고 한다. 부모들의 마음이 상담조차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내린 것이다. 사고를 겪으며 느낀 공포, 분노, 슬픔 등의 충격적인 감정들은 표현돼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무조건 억눌린 감정을 드러내도록 유도하는 것 또한 매우 위험하다. 미국에서 9.11테러 뒤 심리치료 결과를 추적조사한 경험이다. 그러니 매뉴얼대로 부모를 상담할 게 아니라, 치유적 차원에서의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심리치유 전문가 정혜신씨는 “집이라도 치워주고 밥이라도 챙겨주면서 이미 깨져버린 일상을 더이상 깨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다.
 
상처받은 이들이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 보호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사회적 연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겐 우리 사회가 그 아이를 영원히 기억할 거라는 믿음이 생을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다. 정혜신씨는 숨진 아이의 친구들이 아이에 대한 기억과 함께했던 느낌을 편지로 써서 숨진 친구의 부모에게 보내는 운동을 하자고 제안한다. 이런 편지가 부모들에게 최소 10년은 배달되면 좋겠다고도 했다. 어린아이들에게만 맡길 일은 아니다. 이 비극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리본이든 엽서든 아니 그저 종이쪼가리에라도, 절대 아이를 잊지 않겠다는 표지를 계속해서 남겨야 할 것이다.


[칼럼] 슬퍼해야 한다

● 칼럼 2014. 5. 20. 16:42 Posted by SisaHan
내 자식이, 부모형제가 눈앞에서 죽었다. 처음엔 분명히 살아 있었다. 살릴 기회가 충분했다. 하지만 단 한명도 살리지 못했다. 그렇게 300여명이 학살당하듯 수장되는 현장을 수천만명이 느린 화면으로 지켜봤다. 희생자 대부분은 열일곱 꽃봉오리들이었다. 어떻게 잊나. 사고 한달여 만에야 검찰은 ‘해경이 즉각 진입했으면 다 살릴 수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걸 이제 아나.
세월호 참사에서 사람들 무릎을 꺾은 치명적인 2차 트라우마는 정부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대응과 거기에 장단 맞춘 언론의 부도덕함이었다. 내가 눈앞에서 지켜봤고 확인한 사실을 그들은 아니라고 도리질했다. 내가 지각한 사실과 상반된 정보가 계속 입력되면 현재감각에 문제가 생긴다. 내가 이상한 건가, 혼란스럽다. ‘당신 눈을 믿으면 되나. 정부 발표를 믿어야지.’ 그렇게 정부와 언론은 합작해서 겁박하듯 타이르듯 사람들의 분노와 절규를 외면했다. 그 결과 세월호 트라우마는 더 지독해졌다.
 
세월호 주인이 대통령도 아닌데 왜 정부 탓만 하느냐, 유족이 무슨 벼슬도 아닌데 이렇게 생난리를 쳐도 되느냐고 게거품을 무는 작자들까지 생겼다. 생난리를 친 것도 없지만, 미친 질문에 한번만 정상적으로 대답해준다. 그래도 된다. 그런 때 그런 슬픔과 고통을 충분히 받아주라고 공동체가 있고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자식이 눈앞에서 학살당하듯 죽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생각하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옥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회라면 무엇보다 먼저 유족을 배려하는 게 옳다.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재민이나 사회불만세력 정도로 치부했다. 난민수용소 같은 체육관에 방치했고 대통령 면담하러 온 유족들을 경계하며 물대포부터 준비했다. 대통령은 머리를 틀어올리는 중이었어도 아이들 영정을 품에 안은 유족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산발한 채로라도 달려나와 손잡았어야 했다. 대신 경찰은 학익진 대형으로 유족들을 거리에 가뒀다.
 
자식 잃은 부모들은 이제 아이들과 돼지갈비를 먹으러 갈 수도, 목욕탕을 갈 수도, 용돈을 줄 수도 없다. 다 사라졌다. 그 일상으로 못 돌아간다. 오전에 아이의 사망신고를 한 부모가 오후에 찾아와 ‘내가 미쳤나 보다. 너무 빨리 했다’고 통곡하며 사망신고를 취소해 달라고 한다. 한 엄마는 ‘없는 집에 너같이 예쁜 애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엄마가 지옥 갈게 딸은 천국에 가’ 피울음을 토한다.
그런 이들에게 언제까지 슬퍼만 할 수 없지 않으냐며 경제도 위축되었으니 빨리 털고 위기를 극복하자고 말하는 건 미친 짓이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 앞에서 유산배분을 논하는 꼴이다. 수백명의 주검이 묻혀 있는 땅 위에 놀이동산 짓는다고 밝은 사회 오지 않는다. 그렇게 잊혀질 일이 아니다. 지금은 더 슬퍼해야 한다. 정상적인 애도의 과정이다. 어느 시인은 울음의 끝에 슬픔이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고 했다. 유족들의 슬픔에 합일할 수 있어야 우리가 내놓는 해법은 정확해진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세월호 침몰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세월호 트라우마의 파괴력이 그런 정도다. 이제 우리는 세월호 침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걸 인정하고 그다음에 무얼 할 수 있는지 찾아야 한다. 업보처럼 견뎌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먼저여야 할 것은 애도다. 아이들이 컴컴하고 차가운 바닷속에서 꽃송이로 훨훨 날아올라야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 마음속에 그런 느낌이 있어야 한다. 모든 새출발에 대한 논의는 그다음부터다. 거기서 시작돼야 한다.
< 이명수 - 심리기획자 >


각 교회들은 지난 5월11일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지키며 예배를 드렸다, 청년·학생들은 빨간 카네이션을 부모 가슴에 달아주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예배에서는 어르신들을 위한 기도와 함께 선물을 전하며 평강의 여생을 축원했다. 사진은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김경진 담임목사가 기도하는 모습과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학생과 성도.

 
< 문의: 416-444-1716 >

 

[기쁨과 소망] 생명

● 교회소식 2014. 5. 20. 14:50 Posted by SisaHan
지난 주 교회 뒷 마당에 있는 140년 된 나무 세 그루를 자르는 큰일이 있었다. 지난 겨울 아이스 스톰으로 인해 나무 곳곳이 피해를 입은 터라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역시 140년 세월의 무게만큼 나무를 자르는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약 10톤이 넘는 나무 쓰레기가 말해 주듯이 엄청난 일이었다.
 
높이를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넘어지는 순간 모두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이러한 긴장감 속에서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쓰러지는 나무 중 한 그루에서 들고양이의 새끼들이 발견된 것이다. 그것도 다섯 마리나...!!!! 가지가 부러져 빗물에 썩은 곳에 그리 작지 않은 구멍이 있었는데 그곳에 어미 고양이의 출산이 있었던 것이다. 어미는 나무 자르는 소리에 놀라 도망갔고... 아직 탯줄도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눈도 뜨지 못한 아기 고양이 다섯 마리만 남아 있었다.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 때부터 생각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가져다가 키우자니... “다섯 마리를... 그것도 아직 눈도 뜨지 않은 베이비들을...” 자신이 없었다. 고민 끝에 아이들과 함께 인터넷으로 동물 구조단체를 검색해 약 1시간 이상 운전하여 찾아 갔다. 그들의 답은 간단했다. 너무 어린 고양이인 고로 발견한 곳에 다시 갔다 놓으면 엄마 고양이가 찾아 갈 것이라는 답이었다.
 
다시 돌아와 여러 겹의 박스를 만들고 입지 않는 두툼한 옷을 깔아 고양들을 담아 발견했던 나무 근처에 갔다 놓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비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비가 오는 것을 본 아이들이 밤이 새도록 걱정과 근심을 나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직 했으면 그날 밤 고양이 꿈을....^^. 다음 날 새벽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이 새벽예배를 따라 나섰다.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의 생사 확인을 위해 지체없이 달려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비교할 수 없는 사건이지만 최근에 고국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오버랩 되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아이들에게 가르친 경험이 없는 나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능인 것을 알게 되었다. 미물의 ‘생명’이지만, 그 어떤 ‘생명’이든 귀하며 소중하다는 것은 설명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아도 우리 몸과 마음에 있어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무엇과도 비교 할 수 없고, 소중한 수많은 ‘생명’들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너무도 마음이 아프고 허전하다. 사고가족은 아니지만 살아보려고 애를 썼던 아이들의 모습들이 생각날 때면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과 함께... 책임자들에 대한 아쉬움 또한 몰려온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새벽에 일어나는’ 아이들의 마음이... 또 지체 없이 달려가는 ‘최소한의 본능적 모습’에 대한 아쉬움이기에 더욱 더 화가 나고 마음이 아프다. 또 조직의 이익 논리가 ‘생명’을 향한 인간의 최소한의 본능을 마비시킨 듯 보여 참담하기 그지없으며, 이것이 온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 중 일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시 아기고양이 이야기로 돌아가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결국 세 마리는 엄마 손에 구조된 듯하고 (구조된 것으로 믿기로 했다.)... 다른 두 마리 아기고양이는 이틀 남짓 동안 온 가족이 살려보려는 의지를 가기고 노력했지만 차가운 밤바람과 비로 약해진 건강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들이 죽는 순간 우리 온 가족은 함께 울었다. 
‘생명’을 잃은 참담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함께 우는 것이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로서 내 자녀를 잃은 것 같이.. 아니 ‘같이’라는 단어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지만... 그러나 최선의 진심을 담아 울어 주는 모습... 이 진심이 나라를 책임지는 자들로부터 시작해 온 국민에게 흘러나와 유가족들에게 전해 질 때 비로소 오늘의 아픔을 치유할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않을 까... 생각해 본다.

< 민경석 목사 - 한울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