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장의 한 장면! 바로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바닷가에 놓여있는 항구 도시 ‘욥바’였다. 예수의 수제자이자 초대교회의 주역이었던 베드로가 기도하러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 갑자기 환상을 보게 된다.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와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에 끈이 달려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속에는 온갖 네 발 가진 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짐승과 하늘의 날짐승이 들어있었다. 이때 음성이 들려왔다. “베드로야! 어서 잡아먹어라‘는 음성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음성을 들은 베드로의 대답이었다. “주님! 절대로 안 됩니다. 저는 일찍이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입에 대어 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이었다. 거룩한 율법으로 몸을 더럽힌 적이 없었던 베드로 앞에 다가온 운명의 순간이었다.
이는 순결과 거룩함으로 지켜왔다고 생각하는 우리 기독교인 모두가 가지는 항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의 현대 교회가 여기에 서있다. 우리의 순수한 신앙에 대한 절대화! 현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순수성’을 지킨다는 베드로의 이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현대 교회의 이유가 비록 타당하기는 하지만 이 속에는 무서운 병(病) 하나가 들어있다. 하나님의 세상 구원에 대한 부정이다. 더러운 것도 사실이고, 냄새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신비(神秘)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구원을 부정한 신앙은 독선과 위선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두 신학교 교수가 논쟁을 벌인 일이 있었다.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과,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 사이의 엇갈린 논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두 교수는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일을 종교를 중심한 공간 속에서 이해하려 했다는 데 있다.
구원!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확증하신 전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면, 오히려 구원은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작업,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이 구원의 드라마를 베드로는 보았다. 자기가 더럽다고 부정한 그것을 하나님은 깨끗하게 하사 다시 먹게 하셨다. 이는 고넬료라 하는 로마 군대 백부장과 가족들을 위한 선교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전통과 고집과 교만에서 끌어 내셨던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게 했다.
자기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방 선교를 거부한 베드로, 자기가 거부한 그 더러운 것들을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사랑을 볼 수 있다.
더럽고 냄새난다고 버려진 이 세대에 더 큰 관심을 가지시고 그것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시고 계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 현대 교회는 어디에 서있는가? 우리의 전통과 자랑거리를 지키기 위해 보다 희생적인 헌신과 선교와 교육의 책임을 부정하고 있는 안일한 장소일까? 그럴 수는 없다. 우리의 삶 속에 모든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의 설 자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부정한 그것들을 들어서 하나님은 일하시기 때문에 바로 그곳에 우리의 생명의 자리는 있을 것이다.

< 정태환 목사 - 한인은퇴목사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