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오늘의 기적

● 칼럼 2018. 8. 13. 08:29 Posted by SisaHan

오랜만에 친지들을 만났다. 그날의 화제는 독감이 얼마나 지독한지 거의 두 달을 앓아도 완쾌되지 않는다고 했다. 독감예방 접종을 했는데도 심히 앓았다며, 젊은 시절엔 감기가 무슨 병이냐고 말했었는데 더 이상 그리 말할 수가 없단다. 그때 핼쑥한 얼굴의 한 분이 나서서 감기는 거의 회복이 되었는데 후유증으로 미각에 문제가 생겨 음식 맛을 잃었다는 것이다. 어느 음식이든 맛을 분별하지 못해 식욕이 감퇴하여 체중이 3kg이나 감소했다고 한다. 불현듯 오래 전 겪었던 악몽 같았던 시간이 떠올랐다.


어느 해 녹음이 짙은 여름 한 자락에서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린 적이 있다. 환절기도 아닌데 이 고약한 감기는 약을 먹어도 전혀 듣지를 않고 한 달 이상 끌었다. 처음에는 목이 아프고 음성이 변하더니 콧물감기로 발전을 하여 끝내 귀까지 쑤시고 욱신거렸다. 무엇보다도 괴로운 점은 냄새와 맛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감기는 거의 나았는데도 미각과 후각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혹 감기 후유증이 아닌 다른 병세인지 몰라 여러 검사를 거쳤으나 이상이 있는 기관은 없었다. 가정의는 잃은 기능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무조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2-3달이 지나도 별다른 진도가 보이지 않게 되자 걱정이 쌓여 갔다. 주부가 음식의 맛을 모르고 냄새도 맡을 수 없다니 보통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물의 영장답게 오로지 습관에 의존하여 요리를 하니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지만 일관성 없는 그 음식 맛을 짐작해 보시라.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니면 신체의 한 기관에 이상이 생겨 미각과 후각을 잃은 경우는 반드시 정밀검사를 통해 치료방법을 찾아야 한단다. 단지 감기로 잃었을 경우는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치유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는 감각기관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라 뇌에서 잠시 맛과 냄새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라, 새로 맛과 냄새를 습득하는 훈련을 거치면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나는 작은 그릇에 식초, 설탕, 소금 등을 담아 하나씩 맛을 보며 신맛, 단맛, 쓴맛, 짠맛을 다시 인지하기 시작하였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네 가지의 기본적인 미각은 돌아왔으나 조리한 음식 맛은 도통 구별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소량의 마늘이 들어간 음식에서는 온통 마늘의 고약한 맛 하나로, 어떤 기름이든 기름을 넣은 음식은 모두 불쾌한 기름 맛으로만 느껴졌으니 말이다.


후각은 문제가 더 심각했다. 강한 향수 외에는 모두 휘발유 비슷한 고약한 냄새로만 인지할 수 있었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거의 6개월이 지나 얼마간의 불편함도 익숙해질 무렵이 되니 드디어 미각과 후각이 자연적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예전만큼 완벽하진 못하다. 내가 즐기던 수박, 오이, 참외.. 이런 음식들이 고유의 맛 대신 똑같은 맛으로만 느껴져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도 삶을 이어가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아직도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고, 다양한 음식을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설마 태어나면서부터 누려온 자신의 미각과 후각을 잃어버릴 수 있으리라 상상해본 적이 있겠는가. 대다수의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충격과 병으로 인해 얼마든지 내 신체기능의 일부를 잃을 수 있음을 남의 일로만 여기며 살아갈 뿐이다.

우리의 삶이란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과정’이라 말한다. 일단 태어난 후부터는 열심히 살아가지만 결국은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이니 말이다. 내 원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미각과 후각처럼 신체의 어느 부위이든 수술을 하거나 부상당한 부위는 더 이상 원상태로 복구되지도 않을 뿐더러 기능도 저하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가 맞이하는 건강한 오늘이, 지금 이 시간이, 기적의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무료한 일상조차도 더 바랄 것 없는 소중한 시간이라 여기니, 갑자기 숙연해진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