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승객 70% EU·나토 국민 
러시아 책임론 강력 제재 촉구 
국제지정학에 큰 변화 전망도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과 러시아가 ‘신냉전’에 돌입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상황에서도 신중했던 유럽연합(EU)이 말레이시아 여객기 격추 사태의 충격 속에 러시아에 대한 강경 대응 카드를 뽑아들지 기로에 섰다. 유럽의 정책 변화는 러시아의 운신 폭을 크게 좁히게 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대러시아주의 부활’ 구상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이번 사고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의 마르크 뤼터 총리와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19일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MH17 여객기가 격추된 것과 관련해 ‘러시아 책임론’을 거론하며 유럽연합의 대러 정책 변화를 촉구했다고 <블룸버그 뉴스> 등이 전했다. 사고 여객기의 출발지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었던 탓에 탑승객의 70%가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 국적자다. 캐머런 총리와 뤼터 총리는 “우크라이나의 친러 분리주의 반군이 여객기를 격추했다는 증거를 고려해 러시아에 대한 유럽연합의 접근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이날 전화회담에서 합의했다고 영국 총리실이 밝혔다.
 
캐머런 총리는 <선데이 타임스> 기고문에서 “MH17 여객기가 반군 장악지역에서 발사된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공중 폭파됐다는 증거들에 점차 무게가 실리고 있다”며 반군에 무기를 지원한 러시아의 책임을 비난하고 제재 강화를 촉구했다. 대러 제재에 신중했던 독일은 여객기 격추 규탄과 함께 공정한 조사를 강조했지만, 올해 하반기로 예정된 프랑스의 러시아에 대한 군함 판매를 중단해야 한다고 발언 수위를 높였다. 지금까지는 유럽연합 내에서 발언권이 큰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경제적 이해 때문에 러시아 제재에 미온적이었다. 또 영국도 강경 발언과 달리 실질적으로는 실리 보전에 바빴다. 때문에 유럽연합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지금껏 ‘이빨 없는 제재’만 거듭하다 지난 16일 미국과 함께 대응 수위를 좀더 높이기로 했지만 제재 대상은 확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여객기 격추가 국제 지정학에서 우크라이나 분쟁의 위상을 확 바꾸며 유럽연합의 태도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전망한다. 마크 갈레오티 미국 뉴욕대 교수(국제정치학)는 <포린폴리시> 기고문에 “미사일 한개가 지난 여섯달간의 전쟁을 완전히 재정의했다”며 “여객기 격추는 서방 강경파에 충분한 구실을 줄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갈등을 방치하면 더 큰 위험을 부른다는 강력한 상징을 제공했다”고 짚었다. 결국 미국과 유럽 내 여론 압력으로 유럽연합이 한층 강경해지면, 우크라이나 동부를 포함해 러시아계 문화권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친러 반군과 선을 그어야 하는 어려운 선택에 몰릴 수 있다. 하지만 벌써부터 증거 훼손 공방이 벌어지는 터라 여객기 격추 책임을 친러 반군으로 확정하고, 러시아의 미사일 기술 지원 등 개입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유럽연합에선 당장 변화가 감지된다. 미국 인터넷 매체 <복스>는 대러 외교정책을 조율할 차기 유럽연합 외교안보 대표 후보로 유력했던 친러 성향의 페데리카 모게리니 이탈리아 외무장관이 이번 사태로 낙마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짚었다. 유럽연합이 이달 말까지 확정해야 하는 러시아 기업 제재 대상 선정도 러시아에 더 큰 타격을 주는 쪽으로 향할 것으로 보인다.
< 정세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