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고위급회담 연기 이어 남쪽 취재진만 방북 불허
남쪽에 대한 불만에 ‘북-미 정상회담 집중’ 작용한 듯
정부, 6·15공동행사 계기 남북관계 재진전 궁리 중

남북관계가 난기류에 휩싸였다. 평창겨울올림픽을 계기로 한 고위급 상호 방문을 밑돌 삼아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까지 급가속 페달을 밟아온 남북관계가 ‘노란 신호등’에 걸려 급정지한 형국이다. 짧게 잡더라도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예정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세기의 정상회담 때까지는 남북관계가 다시 가속 페달을 밟기 어려우리라는 우려가 많다.

북쪽은 16일로 예정된 남북고위급회담을 당일 새벽 일방적으로 ‘연기’ 통보한 데 이어, 22일에는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북부핵시험장 폐기 행사’를 현장 취재할 남쪽 취재진한테 끝내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북쪽은 애초 풍계리 행사에 초청하겠다고 밝힌 한국·미국·중국·영국·러시아 5개국(12일 외무성 공보) 가운데 남쪽 취재진만 부르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전문가들은 고위급회담 연기를 통보하며 밝힌 남쪽에 대한 ‘불만’ 표출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북쪽 회담 단장인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은 16일 <조선중앙통신>(중통) 인터뷰에서 “무분별한 북침전쟁 소동과 대결 난동”을 회담 연기의 이유로 제시했다. 앞쪽은 한-미 연합 ‘맥스선더’ 훈련을, 뒤쪽은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14일 국회에서 ‘반(反) 김정은’ 강연을 한 것을 겨냥한 것이다. 리 위원장은 17일에도 <중통>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를 “무지무능한 집단”이라고 이례적으로 강도높게 비난하고는 “엄중한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남조선의 현 ‘정권’과 다시 마주앉는 일은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9일엔 조선적십자회 중앙위 대변인이 <중통>과 인터뷰에서 2016년 4월 남쪽에 온 중국 닝보의 북한식당인 류경식당 종업원들의 송환과 ‘책임자 처벌’을 공개 요구했다. 이쯤 되면 파상 공세에 가깝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남북의 정상이 “관계 개선과 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 나가겠다”고 공언한 ‘4·27 판문점 선언’ 채택 직후인 만큼 정부가 역지사지하는 태도로 사려깊고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와 관련해 남북관계 사정에 밝은 여러 전문가들은 북쪽의 고위급회담 연기 통보 직후 나온 ‘통일부 대변인 성명’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북쪽의 태도가 판문점 선언의 근본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유감’을 표하고 회담에 나오라고 ‘촉구’한 게 핵심 내용인데, 이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의 남북 상호 공방을 연상시키는 관성적 대응이라는 지적이다. 한 전문가는 “역지사지의 성찰이 필요한 때에 북쪽에 책임을 떠넘기는 식의 반응이 불을 지른 측면이 있다”고 짚었다. 정부 핵심 관계자는 “정부 안에서도 ‘유감’이라는 표현을 쓸지를 두고 고민이 있었는데 우리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나름의 고충이 있었음을 내비쳤다.

최근의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정부는 22일 남쪽 취재진의 풍계리 방문 무산과 관련한 공식 반응을 따로 내지 않았다. 대신 ‘통일부 장관’ 명의의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관련 정부 입장’을 통해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는 점은 주목하며, 북한의 이번 조처가 북미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고위급회담 무산 때와 달리 공방을 피하려는 태도가 눈에 띈다.

다른 한편, 북쪽의 남북관계 ‘중지’ 조처엔 남쪽에 대한 불만 표시 말고도 임박한 북-미 정상회담에 집중해야 할 내부 사정이 작용했으리라는 분석도 많다. 북-미 정상회담은 ‘김정은 체제’의 명운이 걸린 역사적 승부처인데다 남북관계의 실무 총책임자인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대미·대중 외교의 전면에도 나선 터라 남북관계에서 가속 페달을 밟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6·15 공동선언 17돌을, 멈춰선 남북관계 전진의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6·15 남북공동행사’를 위한 협의를 북쪽과 해야 한다”며 “6·15 공동행사를 잘 치르면 상황이 지금과 달라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제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