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양승태의 실낙원

● 칼럼 2018. 6. 19. 17:02 Posted by SisaHan

창단 45년을 맞은 국립합창단은 남북 화해와 대결의 산물이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때 평양에 갔던 남한 인사들이 북쪽이 자랑하듯 보여준 대형 가무극에 압도된 듯하다. 북한에 질 수 없어 이듬해 국립합창단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의도가 예술의 우연성으로 이어진 셈이다.
남북공동성명 이행이 어그러지자 합창단 예산이 끊길 위기에 처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합창단을 살린 것은 이번에도 북한이었다. 대남 비방 방송에 맞불을 놓는 대북 방송 녹음을 국립합창단이 맡았는데, 실세였던 JP(김종필)가 비교우위를 인정하며 숨통이 트였다는 것이다. 하여 4·27 판문점선언과 6·12 북-미 정상회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가는 한반도 정세 대전환기에는 국립합창단 주요 레퍼토리인 하이든의 ‘천지창조’가 제격이겠다.

JP처럼 이니셜로 자신의 모든 걸 설명하는 이들이 있다. DJ(김대중), YS(김영삼)는 알파벳 두 글자로 일세를 풍미했다. 큰 꿈을 꾸는 후배 정치인들도 은근히 이니셜만으로 불리길 원했지만 그건 시대가 허락하는 일이다. 욕심만으로 되지 않는다.

대신 이니셜은 재벌가 코드명으로 자리잡았다. 삼성에선 한때 이건희라는 이름 대신 대문자 A를 썼다. A′(홍라희), JY(이재용), BJ(이부진) 등 총수 일가의 코드명이 승계와 의전 문건의 은밀함을 더했다. 황제의 이름을 감히 문장에 올리지 못했던 피휘(避諱)의 현대판이다. 최근엔 한진그룹 조현민의 코드명 EMQ가 화제다. 미국 국적인 그의 영문명(Emily)에 마케팅 여왕(Marketing Queen)의 앞글자를 땄다고 한다. 백두혈통 못지않은 신성가족, 그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후진성이 불법과 갑질, 특권의식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CJ와 VIP 면담으로 상고법원 입법추진 환경에 의미 있는 전환점 도래’. 사법행정을 총괄하는 법원행정처 문건에서 피휘를 볼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CJ는 대법원장을 뜻하는 치프 저스티스(Chief Justice)의 약자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지칭한다. VIP로 통칭되는 대통령은 그렇다 치자.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자연스럽게 재판장 중심으로 좌우배석 삼각편대를 이루는, 위계와 서열의 법원 조직 문화에서 ‘대법원장 양승태’는 감히 문서에 이름 석자 올리지 못할 존재였다.

대법원 비밀보호규칙은 누설될 경우 국가안전보장에 유해한 결과를 초래하는 내용은 비밀로 분류하고, 특별히 보호해야 할 사항은 비밀에 준하는 대외비로 분류한다. CJ가 등장하거나 CJ 보고용으로 작성된 대외비 문건에는 양승태 사법부가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벌인 은밀한 뒷거래 또는 그 시도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왜 비밀스럽게 감춰야 했는지 미뤄 짐작 가능하다. 지난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오직 헌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의미가 없다”며 재판 보이콧을 선언한 데는, ‘나는 2015년 여름 너희 대법원장이 한 일을 알고 있다’는 기막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언론사 사장이 질문하는 분 컴퓨터에 뭐가 들어 있는지 다 알고 있을까요?” 양 전 대법원장은 문건 작성을 지시했냐고 묻는 취재진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일국의 치프 저스티스가 스스로를 사장에 빗대어 궁지에서 벗어나려 했다. 대기업 총수처럼 수하를 부려 상고법원이라는 ‘인사권 강화’ 로비도 주저하지 않았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재임 6년간 타락시킨 사법부는 그의 에덴이었다. 이제는 실낙원이다.

< 김남일 - 한겨레신문 법조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