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연구소의 ‘코로나19’ 백신에 주목하는 5가지 이유
① 서구 임상시험기관 중 유일 비영리조직
② 원숭이실험서 완벽한 효과로 자신 충만
③ 안전성 높은 아데노바이러스 벡터 백신
④ 다음달까지 6천명 방대한 임상시험 진행
⑤ 독점권 주지 않고 6개 업체서 분산 제조
임상1상 1100명…임상2·3상 5천명 방대한 시험
코로나19 백신 개발 경쟁에서 영국 옥스퍼드대 제너연구소의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 최초의 백신 종두법 개발자인 영국 외과의사 에드워드 제너의 이름을 따 2005년 설립된 이 연구소는 말라리아, 결핵, 에이즈 같은 주요 감염병에 대한 백신을 개발하는 연구기관이다. 현재 백신 임상시험에 들어간 곳 중 가장 늦게 뛰어들었지만 시험 규모가 가장 방대하다. 개발 일정도 가장 과감해 9월 백신 생산을 목표로 삼고 있다. 현재 코로나19 백신 임상시험을 진행중인 곳 가운데 중국을 제외하곤 유일하게 기업이 아닌 비영리 기관인 점도 눈에 띈다.
우선 지난 23일부터 시작한 임상1상 시험 참여자 규모가 1100명으로, 다른 업체나 기관들의 임상시험 규모를 압도한다. 제너연구소는 지금까지 320여명이 접종을 받았다고 밝혔다. 앞서 임상시험에 들어간 미국 모더나 테라퓨틱스와 이노비오 파마슈티컬스의 임상1상 시험은 수십명, 중국 백신 개발업체들의 임상시험은 100명 남짓이다. 임상1상은 약물의 안전성을 검증하는 시험이다. 현재 유일하게 임상2상까지 나아간 중국 캔시노 바이오로직스의 500명보다도 규모가 크다. 게다가 제너연구소는 5월엔 임상2상과 3상을 동시에 진행할 계획이다. 안전성과 약효를 동시에 검증한다. 이를 위해 임상 2상과 3상에 참가할 5천여명을 모집한다. 임상1상은 18~55세를 대상으로 하지만 임상2상, 3상은 연령 상한을 높인다. 처음엔 55~70세, 그 다음엔 70세 이상까지 임상시험 범위를 넓힌다. 옥스퍼드대 과학자들은 임상시험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경우, 정부가 긴급사용을 승인해주면 9월까지 수백만명한테 접종할 수 있는 백신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이는 미국과 중국, 독일의 백신 개발 업체들이 밝힌 일정보다 서너달은 앞선 것이다. 하지만 공식 일정은 여전히 12~18개월이다.
백신 맞은 6마리 원숭이 한 달 지나서도 건강
제너연구소가 이렇게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은, 같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인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예방용으로 개발한 백신의 지난해 임상시험에서 이 백신이 인간에게 안전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제너연구소는 일단 자신감을 표명하고 있다. 지난달 미국 국립보건원의 록키마운틴연구소에 의뢰해 진행한 히말라야원숭이(붉은털원숭이 또는 레서스원숭이) 실험 결과가 만족할 만하게 나왔다. 연구소는 백신을 원숭이 6마리한테 1회 접종했다. 실험실에 있는 다른 원숭이들을 감염시킨 것과 같은 양을 주입했지만, 백신을 맞은 6마리는 접종한 지 28일이 지나서도 모두 건강했다. 백신 접종 시험을 맡았던 빈센트 먼스터 연구원은 "히말라야원숭이는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동물"이라며 다음주 중 동료검토 학술저널에 동물실험 결과를 제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물론 원숭이한테서 면역이 생겼다고 해서 사람한테도 똑같이 생길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희망을 주는 결과인 것은 분명하다.
20년간 침팬지 아데노바이러스 이용한 백신 실험
제너연구소가 개발한 백신은 침팬지에 감기를 유발하는 아데노바이러스의 독성을 없앤 뒤, 여기에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돌기단백질 유전자를 집어넣은 백신(ChAdOx1 nCoV-19)이다. 돌기단백질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세포에 침투하는 도구로 쓰는 물질이다. 기존 바이러스를 운반체(벡터)로 사용한 `바이러스 재조합 벡터 백신'이다. 아데노바이러스 벡터 백신은 그동안 10여가지 질환에서 사용된, 안전성이 입증된 백신이다. 중국의 캔시노 바이오로직스도 인간의 아데노바이러스를 이용한 재조합 벡터 백신으로 임상시험을 하고 있다. 미국 모더나의 백신은 최신 유전공학 기술을 적용한 RNA 백신으로 빨리 제조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아직 사람한테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제너연구소의 코로나바이러스 백신 개발은 애드리안 힐(61) 소장의 말라리아 백신 실패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1980년대 초반 의대생 시절부터 말라리아를 비롯한 열대지방의 질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내전 중이었던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성직자로 있던 삼촌을 방문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열대병을 연구하고, 분자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2005년 옥스퍼드대 제너연구소 창립을 주도했다. 그는 지난 20년간 침팬지 아데노바이러스를 이용해 만든 말라리아 백신 후보들에 대해 70회 이상의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하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메르스가 발생하자 그의 오랜 동료 새라 길버트 박사가 침팬지 아데노바이러스로 메르스 백신 개발에 나섰다. 이 백신은 지난해 영국에서 임상시험을 한 결과 안전성이 입증됐다. 메르스 발원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임상시험을 했다. 길버트 교수는 지난 1월 중국 과학자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판독한 뒤, 이 백신을 여기에 응용해 보기로 했다고 한다.
인도혈청연구소 등 6곳서 제조 약속…미국 업체는 독점 요구로 불발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너연구소의 대규모 임상시험이 순조롭게 진행되려면 다수의 새로운 감염자들이 나오는 환경이 유지돼야 한다. 백신 효과를 입증하려면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백신을 맞혀야 한다. 중국의 캔시노는 이런 점에서 임상시험 환경이 좋지 않다. 중국의 확진자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임상시험 참가자가 적을 경우엔 아프리카나 인도에서도 임상시험을 할 계획이다. 제너연구소는 위약을 접종받은 사람과 백신을 접종받은 사람의 감염 비율이 12 대 1~2가 되면 백신 성공으로 간주한다는 방침이다.
제너연구소는 향후 백신 승인에 대비해 현재 유럽과 아시아의 6개 제약사에 백신 제조권을 주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독점권을 주지는 않는다. 영리에서 자유로운 공공기관의 장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 최대 백신 제조업체인 인도혈청연구소, 독일 기반의 다국적 제약업체 머크 등이 이에 참여해 백신 제조시설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백신 효능이 검증된 단계는 아니므로 실패할 경우엔 각기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인도혈청연구소는 첫 6개월은 한달에 500만회 접종 분량을, 그 다음엔 한 달에 1천만회 분량을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미국을 포함한 북미의 제약업체들은 독점권을 요구하는 바람에 제너연구소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오랜 실패 경험과 사명감을 밑천으로 임상시험에 들어간 제너연구소의 백신이 ‘코로나19’ 팬데믹 탈출의 돌파구를 열 수 있을지 주목된다. < 곽노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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