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보다 잡지를 든 편집장, '박정희의 천적' 장준하

● COREA 2026. 10. 17. 10:0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일본군 탈출 6000리 걸어 중국서 광복군 활동
'사상계' 창간, 한국 지식사회의 중심에 우뚝
박정희 군사정권 월남파병에 반대하다 구속돼
1967년 옥중 출마 국회의원 당선, '사상계' 떠나
김지하 '오적' 게재했다 등록 취소로 발행 중단
긴급조치 위반 15년 선고받고 형집행정지 석방
포천 약사봉 등산 중 추락사… 타살 의혹 남아

 

일본군을 걸어 나온 학병

 

장준하(1918–1975)를 한 줄로 소개하면 이렇다. 일본군을 탈출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해방 뒤에는 잡지를 만들어 독재와 맞서다 산골짜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사람. 이력서 한 줄이 이토록 무거운 사람도 드물다.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그는 1944년 1월 학병으로 끌려갔다. 이름은 지원병인데 지원하지 않으면 집안이 곤란해지는, 참으로는 강제된 지원이었다. 그해 7월 중국 쉬저우의 일본군 부대를 김준엽(1920–2011) 등과 함께 탈출했다. 혹한과 굶주림을 견디며 6천 리를 걸어 이듬해 1월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했다. 지도도 길 안내 기계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서 이범석(1900–1972)의 지휘아래 미국 전략정보국과 국내진입 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작전은 중단됐다. 8월 18일 비행기로 여의도에 들어왔지만 일본군의 제지로 돌아가야 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입국을 거절당한 광복군이었다. 그해 11월에야 귀국한 뒤 김구(1876–1949)의 비서로 일했다.

 

장준하 1944년(위키피디아)

 

총 대신 붓을 든 편집장

 

광복군시절에도 잡지 『등불』을 만들었으니, 이 사람의 팔자는 총보다 편집 쪽에 가까웠다. 1953년 4월 월간 종합교양지 『사상계』를 창간했다. 잡지는 돈이 되지 않았다. 편집장은 발행인이자 영업사원이었고, 때로는 돈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이었다. 원고료 걱정은 끊이지 않았지만 실어야 할 말은 넘쳤다.

 

『사상계』는 대학생과 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읽히며 1950~60년대 한국 지식사회의 중심에 섰다.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고, 1958년에는 필자 함석헌(1901–1989)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발표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필화도 겪었다. 장준하와 주간 안병욱도 조사를 받았다.

 

1962년 장준하는 막사이사이상 언론부문상을 받았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잡지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셈이다. 그러나 박정희(1917–1979) 군사정권의 탄압은 그치지 않았다. 세무사찰과 판매방해가 이어졌고, 장준하는 1966년 월남파병을 비판하다 구속됐다.

 

사상계 잡지 운영했던때 장준하(위키피디아)

 

「오적」이 불러온 탄압, 등록취소라는 칼날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직후 장준하는 군사정권에 한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길로 가자 비판자로 돌아섰다. 한 사람은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 장교로 복무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제 때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 해방된 나라에서는 일본군 장교 출신이 오히려 권력을 잡고 광복군 장교 출신이 감옥을 드나들었다. 우리역사의 짓궂은 비극이다.

 

1967년 장준하는 옥중출마 끝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후 『사상계』의 발행권은 부완혁(1919–1984)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1970년 잡지폐간 당시 발행인은 장준하가 아니라 부완혁이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1970년 5월호에 실린 김지하(1941-2022)의 담시 「오적」이었다.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다섯 도둑에 빗대 부패한 권력층을 풍자한 작품이었다. 권력의 치부를 날카롭게 드러낸 이 글은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불러왔다. 부완혁과 편집인 김승균 등이 구속됐고 잡지발행은 사실상 중단됐다.

 

공식적인 등록취소는 그해 9월 29일 이뤄졌다. 문화공보부가 내세운 이유는 인쇄시설을 갖추지 않은 경우 인쇄인을 등록해야 한다는 관련규정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인쇄와 등록의 문제를 이유로 들었지만, 「오적」 게재 이후 이어진 탄압의 흐름에서 이를 단순한 행정처분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사상계』는 통권 205호를 끝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부완혁은 법정투쟁을 이어갔고, 1972년 4월 대법원에서 등록취소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법적으로 길이 열렸다고 잡지가 되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재정은 바닥났고 필자를 구하기도, 인쇄를 맡길 곳을 찾기도 어려웠다. 박정희는 잡지의 등록을 취소했지만, 그보다 먼저 잡지가 설 자리를 좁혀놓았던 것이다.

 

고상만의 저서

 

약사봉의 물음표

 

1973년 말 장준하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박정희는 서명대신 수갑으로 답했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그해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75년에도 함석헌 등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힘을 모으려 했다.

 

그러나 1975년 8월 17일, 그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정희 정권은 등산 중 실족해 추락한 사고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망경위에는 의문이 남았다.

 

2012년 8월 묘소를 옮기는 과정에서 두개골 오른쪽 귀 뒤쪽에 지름 5~6센티미터의 함몰 흔적이 발견됐다. 이듬해 유족 측이 의뢰한 법의학 감정에서는 머리를 가격당한 뒤 추락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필자가 몸담았던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앞서 사건을 조사했지만 사망원인을 규명하지 못했다.

 

타살의혹이 제기됐다고 해서 살해주체까지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규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약사봉의 물음표는 여전히 한국현대사의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장준하와 함석헌(함석헌기념사업회)

 

장준하에게서 오늘을 배우다

 

첫째, 국가가 가진 기록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존재한다. 자료가 공개되지 않아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일이 되풀이된다면 과거사 조사는 이름뿐이다. 진실화해위원회와 같은 조사기구에는 자료를 확보하고 책임 있는 답변을 받아낼 실질적인 권한이 필요하다.

 

둘째, 진실규명에는 유효기간이 없어야 한다. 한시적인 조사기구가 활동시한에 쫓겨 미완의 사건을 남기고 문을 닫는다면 피해자와 유족은 다시 애타게 기다려야 한다. 조사기간을 연장하거나 상설적인 진실규명기구를 두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때다.

 

셋째,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고 돌아설 줄 알아야 한다. 처음에는 군사정변에 기대를 걸었던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의 실체를 확인한 뒤 비판자로 나섰다. 한 번 틀리는 것은 실수지만, 틀렸음을 알면서도 고집하는 것은 선택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이후 장동혁, 주진우, 김진숙, 김태규 등 정치인들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얼마나 돌아보았는가.

 

넷째, 연대는 차이를 넘어서는 일이다. 편집장 장준하와 종교인 함석헌, 민중신학자 안병무(1922-1996). 해직교수 김동길(1928-2022) 등은 민주주의라는 목표 아래 만났다. 생각과 배경이 다르더라도 공동의 위기 앞에서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사상계』가 권력의 탄압을 받은 것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었고, 글을 쓰는 이들이 그 대가를 감수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누구나 글을 발표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넓어졌다고 해서 말의 무게까지 가벼워져서는 안 된다.

 

장준하는 총 대신 잡지를 들었다. 그가 남긴 것은 독립운동의 무용담이나 잡지 한 권만이 아니다. 독재 권력이 감추려는 것을 묻고, 잘못된 것을 비판하며,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는 시민의 책임이었다.

 

약사봉의 물음표가 언제 마침표를 찍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진실을 묻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장준하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숙제다.   

                                                 < 김성수 시민기자, 반헌법 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 

 

파주시 장준하 공원에 위치한 장준하의 묘소(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