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계획 사무총장, “전쟁 와중에 굶주린 어린이들 방치돼”

긴급 지원금 없으면 조만간 대규모 기아와 난민 발생 우려

 

예멘의 의료인들이 7일 수도 사나의 유엔 사무실 앞에서 연료 부족으로 의료 서비스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세계식량계획도 전쟁에 시달리는 예멘의 현재 상황이 지옥과 같다며 전세계에 지원을 촉구했다. 사나/AFP 연합뉴스

 

“(전쟁으로 파괴된 예멘은) 지옥이다. 지구 최악의 장소다. 이는 모두 인간이 만든 것이다.”

최근 중동의 분쟁 지역인 예멘의 수도 사나를 둘러본 데이비드 비즐리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이 9일 굶주림과 감염병으로 위협받는 예멘 사람들의 현실을 이렇게 전하며 세계의 관심과 지원을 촉구했다.

비즐리 사무총장은 이날 미국 <AP> 통신과 한 화상 인터뷰에서 “병원의 소아 병동에 가면 보통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 나오기 마련이지만, 여기선 ‘죽음의 침묵’만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병실을 하나씩 하나씩 둘러봤다”며 “다른 곳에서라면 아이들이 조금 아파도 회복하겠지만 여기선 전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영양 부족으로 입원한 어린이들이 음식이 없어 방치되어 있다”며 “5월, 6월, 7월에 대규모 지원금을 투입하지 못하면 엄청난 규모의 굶주림과 사회 불안, 난민이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엔은 예멘 전체 인구의 절반인 1600만명이 식량 위기에 처해 있으며, 굶어 죽기 직전의 어린이만도 40만명에 달하는 걸로 보고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예멘은 중동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데, 6년 이상 전쟁이 계속되면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2014년 이란의 후원을 받는 후티 반군이 수도 사나를 장악하자, 이란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사우디아라비아가 개입하면서 내전은 사실상 국제전으로 확대됐다. 미국의 후원을 받는 사우디는 2015년 3월부터 후티 반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사우디가 이끄는 아랍 동맹국들의 예멘에 대한 육해공 봉쇄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두 진영의 전투는 최근 후티 반군이 유전 지대인 마리브를 장악하기 위해 공세를 펴면서 더욱 격화하고 있다. 반군은 이와 함께 사우디의 석유 시설에 대한 공격도 벌이고 있으며, 사우디는 사나 지역에 대한 폭격으로 대응하고 있다. 사우디는 10일에도 후티 반군의 방공 시설을 폭격했다.

비즐리 사무총장은 많은 구호 단체들이 기아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지만, 세계식량계획은 접근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후티 반군 당국과 공동 작업 차원에서 곳곳을 둘러봤다”며 “지금 유일한 걸림돌은 지원금 부족”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6개월 동안 예멘 지원 자금으로 최소 8억1500만달러(약 9천억원)가 필요하지만 현재 확보한 자금은 3억달러에 불과하다고 비즐리 사무총장은 밝혔다. 세계식량계획은 코로나19 위기 이후 지원금이 줄면서 어느 때보다 심각한 자금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비즐리 사무총장은 “당장 아이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디서 주는 돈이든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세계 지도자들이 예멘 외에 아프가니스탄, 콩고민주공화국, 시리아 등 취약한 나라들을 돕는 데 적극 나서지 않으면 더 많은 재앙이 곳곳에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유엔과 미국 등은 최근 휴전 협상을 위한 외교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4일 예멘 내전을 벌이고 있는 사우디 주도의 국제연합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고 선언한 데 이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10일 휴전 협상을 촉구했다. 그는 이날 파이살 빈 파르한 사우디 외무장관과 한 공동 기자회견에서 “모든 세력이 유엔의 적대 행위 중단 노력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이살 외무장관도 예멘과 관련한 사우디의 최우선 목표가 휴전이라고 밝혔다. 신기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