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일 설교하면서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며 유명한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오케스트라에 대해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어쩌면 한 번쯤은 칭찬할 만한 그런 때에도 연주에 충실하노라 칭찬과 격려보다 질책을 더했다. 그러니 단원들의 불만이 어떠 했겠는가?
한 번은 베토벤의 9 번 교향곡을 연주했는데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단원들은 이번에는 칭찬을 해주겠지 하며 이번에도 칭찬 안 해주면 그를 지휘대에서 밀어버릴거다 했는데 토스카니니가 일갈했다.
“내가 누군가? 토스카니니가 누군가? 여러분은 누군가?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베토벤 만이 위대하다.”고 했다.
곡을 만든 베토벤이 위대하듯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위대하다고 설교를 했는데 예배 후 친교 시간에 토스카니니의 이야기가 나오자 어떤 분이 그렇게 말했다. “우리 편에서는 베토벤이 위대하지만 베토벤 편에서는 연주자가 위대해야 하지요” 했다.
그렇다. 아무리 좋은 곡을 만들었다 해도 그 곡을 연주하는 자들이 곡을 온전하게 해석하고 나타내지 않으면 무위로 돌아가고 곡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피조물 인생 역시 아름다운 생애를 삶으로 빛과 소금으로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나님이 다시 위대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창조하신 그 의도대로 빛을 나타내고 소금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이 생애의 목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작품을 온전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설교자로 강단에서 외치거나 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남을 향해 자비의 손을 내밀거나 오지에서 일생을 헌신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바로 작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뿐인가? 회개하는 모습으로 강단에서 회초리를 들어 자신의 종아리를 치는 모습도 교훈적일 수 있겠다.
나는 최근 한 성도의 고회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었다. 목회자의 자녀로 자란 그는 당시 목회자의 생활환경이 너무 열악하였기에 이유 없는 반항이란 표현 그대로 그는 반항하고 가출하기도 했다. 그래서 때로는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한 번은 유치장 안에서 창틀에 턱걸이를 하듯 매달려서 밖을 보는데 어린 학생들의 장래를 염려하신 교목께서 경찰서를 방문했다가 돌아가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때 가슴에 울컥 치미는 뭔가 있어 크게 결심하고 담당 형사를 불렀다. 이번에 나가면 나,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그는 그 길로 채석장으로 가서 그의 삶을 바꾸었다고 간증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분에게 감동하면서 아울러 나는 나의 지나가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감동을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말로 행동으로 작품을 이루며 나아가 말은 없으나 모습과 분위기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온전히 나타낼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나 스스로 심각해졌다.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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