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손에는 지팡이 대신 부피가 큰 헝겊 양산이 들려있다. 언제부터 짚고 다녔는지 꼭지 부분의 고무가 다 닳아서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가 난다. 작년에 엄마를 만났었으니 양산으로 바뀐 것은 아마 그 후 부터였을 것이다. 가벼운 지팡이를 다시 써보도록 권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나는 그쯤에서 물러서며 ‘노인’이라는 호칭이나 ‘지팡이’라는 단어와 연상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엄마가 혹시 상처를 받으신 게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다. 나이에 순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인이 엄마 개인의 심리적인 요인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사회적인 변화의 물결 때문일 수도 있다. 젊고 예뻐지는데 대한 강박에 가까운 집착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편안함을 반납하는지도 모른다.
타박타박 걸으며 양산 지팡이에 의지해 차에서 내려서 찜질방까지 들어가는 길이 마치 지구 한 바퀴를 도는 만큼이나 멀고 길게 느껴진다. 인도와 차도의 경계 턱은 왜 그리 높은지, 인도의 보도블록은 또 왜 그리 울퉁불퉁하고 고르지 못한지, 나는 오늘에서야 지팡이 짚은 노인의 시각으로 주변을 인식하며 새삼 가슴이 저린다.
그렇게 탈의실까지 왔다. 그런데 세상에, 5월 중순에 누비바지에 내복이라니. 그나마 덜 여위어 보이던 몸집이 내복과 누비바지 덕분이었음을 알아차리고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한 줌 부피로 줄어든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게 엄마는 수줍은 듯 변명처럼 말을 흘리신다.
“추워서 입는 게 아니야, 이래봬도 이게 안주머니까지 있어 얼마나 편하다고.” 두꺼운 껍질을 차례로 벗어놓자 엄마의 몸이 가벼워지는 만큼 내 가슴은 무거워진다. 나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 싶은 자책 때문일 것이다.
누구의 도움도 마다하고 혼자 휘적휘적 욕탕으로 걸어 들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위태로워 긴장을 풀 수가 없다. 욕탕까지 또 한 고개를 넘었다는 듯 엄마는 굽었던 허리를 펴신다. 잠시 동안이지만 엄마 입장에서 행동해보니 당연한 줄 알고 살던 세상이 불편한 것 투성이다. 욕탕의 깔개 의자는 자질이 플라스틱인데도 노인이 들기에는 턱없이 무겁다. 목욕은 시작도 안 했는데 기진한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어 샤워버튼을 누르신다. 샤워기는 한 번 누르면 잘해야 십여 초 동안만 물이 나오게 되어 있어 수없이 눌러야나 제대로 씻을 수 있다. 아마 물을 절약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인 듯하다. 에너지 자원을 생각하면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오늘따라 노약자에 대한 무심함에 속을 끓이게 된다. 보다 못해 샤워기를 빼앗아 엄마 머리에 대 드렸다. 빳빳하던 고집이 슬그머니 수그러들더니 어린아이처럼 머리를 맡기고 다소곳이 앉아계신다. 머리를 감겨드리고 내친 김에 몸까지 씻겨드렸다. 살갗이 이리저리 밀려다녀서 비누칠하기가 쉽지 않다. 하얗게 비누거품이 이는 때수건을 살그머니 앞쪽 가슴께로 가져가니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절하며 움츠리다가 포기한 듯 힘을 빼셨다. 탄력을 잃어 쳐진 살갗을 한 켜씩 들추어가며 비누칠을 했다. 흐뭇한 비누거품들이 안개꽃처럼 피어났다가 스러져갔다. 손끝에 전해오는 말캉거리는 촉감이 참 좋았다. 어린아이가 제 엄마 몸에서 느낄 것 같은 행복감에 잠이 오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엄마와 목욕하러 다녔는데도 나는 엄마의 젊은 몸은 기억하지 못한다. 수증기가 뽀얗게 서려있어 숨이 차던 기억과 물이 너무 뜨겁던 기억, 그리고 살갗이 얼얼하도록 밀어 아프던 기억밖에 없는 걸 보면 내게 목욕하는 일은 그리 즐거운 추억이 아니었나 보다.
“이제 됐다, 그만해라”는 소리에 놀라 버튼을 눌러 맑은 물로 헹궈드렸다.
샤워를 마치고 찜질방에 나란히 누워 오래된 기억들을 꺼내어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과거라는 길 위에 이민을 떠난 후 내가 버리고 간 시간들이 조용히 쌓여있다. 엄마의 볼이 홍옥처럼 빨갛게 빛난다. 나는 엄마의 발갛게 익은 얼굴이 싱그럽다는 생각을 잠시 한다. 엄마의 한때 꽃 같던 젊음을 나는 지금 그렇게 만나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발그레한 혈색이 행복한 노년의 빛깔이기를 조심스레 빌어본다.
<김영수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협 회원/한국 문인협회 회원>
타박타박 걸으며 양산 지팡이에 의지해 차에서 내려서 찜질방까지 들어가는 길이 마치 지구 한 바퀴를 도는 만큼이나 멀고 길게 느껴진다. 인도와 차도의 경계 턱은 왜 그리 높은지, 인도의 보도블록은 또 왜 그리 울퉁불퉁하고 고르지 못한지, 나는 오늘에서야 지팡이 짚은 노인의 시각으로 주변을 인식하며 새삼 가슴이 저린다.
그렇게 탈의실까지 왔다. 그런데 세상에, 5월 중순에 누비바지에 내복이라니. 그나마 덜 여위어 보이던 몸집이 내복과 누비바지 덕분이었음을 알아차리고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한 줌 부피로 줄어든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게 엄마는 수줍은 듯 변명처럼 말을 흘리신다.
“추워서 입는 게 아니야, 이래봬도 이게 안주머니까지 있어 얼마나 편하다고.” 두꺼운 껍질을 차례로 벗어놓자 엄마의 몸이 가벼워지는 만큼 내 가슴은 무거워진다. 나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 싶은 자책 때문일 것이다.
누구의 도움도 마다하고 혼자 휘적휘적 욕탕으로 걸어 들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위태로워 긴장을 풀 수가 없다. 욕탕까지 또 한 고개를 넘었다는 듯 엄마는 굽었던 허리를 펴신다. 잠시 동안이지만 엄마 입장에서 행동해보니 당연한 줄 알고 살던 세상이 불편한 것 투성이다. 욕탕의 깔개 의자는 자질이 플라스틱인데도 노인이 들기에는 턱없이 무겁다. 목욕은 시작도 안 했는데 기진한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어 샤워버튼을 누르신다. 샤워기는 한 번 누르면 잘해야 십여 초 동안만 물이 나오게 되어 있어 수없이 눌러야나 제대로 씻을 수 있다. 아마 물을 절약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인 듯하다. 에너지 자원을 생각하면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오늘따라 노약자에 대한 무심함에 속을 끓이게 된다. 보다 못해 샤워기를 빼앗아 엄마 머리에 대 드렸다. 빳빳하던 고집이 슬그머니 수그러들더니 어린아이처럼 머리를 맡기고 다소곳이 앉아계신다. 머리를 감겨드리고 내친 김에 몸까지 씻겨드렸다. 살갗이 이리저리 밀려다녀서 비누칠하기가 쉽지 않다. 하얗게 비누거품이 이는 때수건을 살그머니 앞쪽 가슴께로 가져가니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절하며 움츠리다가 포기한 듯 힘을 빼셨다. 탄력을 잃어 쳐진 살갗을 한 켜씩 들추어가며 비누칠을 했다. 흐뭇한 비누거품들이 안개꽃처럼 피어났다가 스러져갔다. 손끝에 전해오는 말캉거리는 촉감이 참 좋았다. 어린아이가 제 엄마 몸에서 느낄 것 같은 행복감에 잠이 오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엄마와 목욕하러 다녔는데도 나는 엄마의 젊은 몸은 기억하지 못한다. 수증기가 뽀얗게 서려있어 숨이 차던 기억과 물이 너무 뜨겁던 기억, 그리고 살갗이 얼얼하도록 밀어 아프던 기억밖에 없는 걸 보면 내게 목욕하는 일은 그리 즐거운 추억이 아니었나 보다.
“이제 됐다, 그만해라”는 소리에 놀라 버튼을 눌러 맑은 물로 헹궈드렸다.
샤워를 마치고 찜질방에 나란히 누워 오래된 기억들을 꺼내어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과거라는 길 위에 이민을 떠난 후 내가 버리고 간 시간들이 조용히 쌓여있다. 엄마의 볼이 홍옥처럼 빨갛게 빛난다. 나는 엄마의 발갛게 익은 얼굴이 싱그럽다는 생각을 잠시 한다. 엄마의 한때 꽃 같던 젊음을 나는 지금 그렇게 만나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발그레한 혈색이 행복한 노년의 빛깔이기를 조심스레 빌어본다.
<김영수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협 회원/한국 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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