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얼굴’ 이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얼굴은 자기가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이 보는 것 이라서 잘 가꾸어야 한다는 대충의 내용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얼굴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뒷 모습도 아름다워야 합니다.
교회의 성가대원들의 가운도 반주자와 지휘자는 대원들과 다른 가운을 입습니다. 대원들은 앞쪽에 십자가 무늬가 있든지, 여러 모양의 장식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지휘자와 반주자는 뒷쪽에 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어떤 형태의 연주나 합창에도 지휘자는 뒷 모습에 더 신경을 써서 옷을 디자인 한다고 합니다.


저는 뒷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을 존경합니다. 떠나는 모습이 아름답고, 그 사람의 숨겨진 일상, 즉 보이지 않는 뒷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을 좋아 한다는 말씀입니다. 잠시 환담을 나누다가 헤어졌는데, 헤어진 후 더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동체에 머물다가 사정이 있어 다른 곳으로 떠난 사람이 그리워 짐은, 그 사람의 뒷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성형이 유행하는 세상! 인격을 상실해 가는 모습에서는 역겨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세상에 태어나 한 평생 살다가 하나님 품으로 떠나신 분들도, 그 떠나간 자리가 아쉽고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의 삶에서 뒷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먼저 떠난 친구들 가운데에도 유난히 뒷 모습이 아름다웠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 그립고 안타깝습니다. 우리나라를 이끌었던 역사 인물 가운데에도 뒤가 아름다운 분들이 계십니다. 세종대왕도 계시고, 이순신 장군도 계십니다. 김구 선생님, 안중근 의사도 계십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우리 시대에 뒤가 아름다운 사람을 찾기가 힘듭니다. 앞은 멀쩡한데 뒤가 엉망인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굳이 말씀 드리자면, 변화하지 못하고 자가 밥줄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정치를 바꿔 보려고 했던 분이 계셨습니다. 떠나고 나니 그분의 치적이 돋보입니다. 그분의 뒷 모습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조국의 형편이 자꾸 꼬여갑니다. 질병까지 번지면서 또 불신에 대한 이야기가 불거지고 있습니다. 이 불신은 앞은 멀쩡한데 뒤가 구린 정치인들이 만들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모두 싹 쓸어내고, 국민의 참 공복이 되는 일꾼들로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유지되고 사회가 아직 살만한 것은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소수의 뒷 모습이 아름다운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다의 염도는 약 3%라고 합니다. 그 3% 때문에 바다는 세상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하수를 받아들여 정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소금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미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개미떼의 약 70%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머지 30%만이 열심히 일을 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리스도인 임을 자부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뒷 모습이 아름답지 못한 분들이 계십니다. 앞에서 이야기하지 못하고 뒤에서 수근거리는 못된 신도(?)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뒷 모습에 신경써야 하겠습니다.


어쩌다보니 나이가 제법 들게 되어 나를 뒤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나의 뒷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며 부끄럽기도 합니다. 항상 새로운 꿈을 품고 묵묵히 그 꿈을 향하여 걸어가는 모습이고 싶습니다. ‘100세 시대’ 라는 말이 실제로 다가왔습니다. 살아야 할 날들이 더 늘어나 버렸습니다. 계획을 수정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꿈을 가져야 겠습니다. 꿈이 크다는 것은 포부가 큰 꿈이 아니라, 세상을 더 넓게 끌어안고, 보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뜻 입니다. 그래서 오늘이, 항상 기쁨과 감사로 지나가야 하겠습니다. 꿈이 있으면 기쁩니다. 꿈이 있으면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을 잘 지내면, 내일은 어제가 아름다웠다고, 뒤가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정훈태 - 동산교회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