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교회의 위기를 한번 더 말씀하고 맺으려 한다. 교회의 위기는 앞에서 이야기한 그대로 세상이 변했고 그런 세상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할 허약한 체질의 교회로의 변모를 안타까워 하면서 결국에 그 모든 책임은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회자에게 책임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만인제사장설을 말하는 평신도라면 목회자와 평신도들 모두 대오각성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이다.
결국 목회자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패배주의라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과 목회의 환경 탓으로 돌릴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을 어찌 세상만 탓할 수 있겠는가. 이미 말씀한대로 교회에 위기는 언제나 있었다. 문제는 그 위기를 알고 그 위기에 대처하고자 노력하는 지도자에게서 변화가 있고 새로운 방향과 부흥이 있지 않았던가. 중세의 교회가 무너질 때 루터나 칼빈이 일어난 것은 그런 위기 속에서 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한 것인데 오늘의 교회와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그런 감각도 없고 있다 해도 무디어져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런 말을 우리는 자주 한다. 열 마리의 사자를 이끄는 지도자 양과 열 마리의 양을 이끄는 사자와의 전쟁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 하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서슴없이 지도자 사자가 이끄는 양들이 이길 것이라 말한다. 그런 것을 설교로도 나타내는 목회자 자신은 그런 의식이 도무지 없다. 그것이 바로 패배주의라는 것이다. 한다고 되느냐 하는 생각에 그냥 포기하고 시간만 죽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월 속에서 설교를 해도 변하지 않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목회자가 때로는 설교를 하면 뭘 하는가 하는 회의를 느낀다는 목회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런 질문을 되뇌이면서도 설교를 해야 하고 그것도 뜨거운 가슴을 안고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이다.
설교를 그런 마음으로 해야 한다면 왜 다른 면에서는 그런 의식을 갖지 않을까? 그리 자주 나가는 부흥회는 아니지만 그런 소리를 자주 듣는다. 부흥회? 부흥회하면 뭐 합니까? 나오지도 않고 예산도 따라주지 않는데. 부흥회? 하지요. 그런데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밤에만 하지요. 부흥회? 강사 모시면 경비가 많이 나가니 그냥 세 분의 강사를 모시고 세 번의 설교를 듣고 말지요. 그러면 식사 접대 숙소 비용도 안들고 좋지요.
참으로 아쉽다. 예전에는 부흥회를 했다 하면 월요일 저녁에서 월요일 새벽기도회로 끝났는데 점점 줄어들고 부흥회는 아예 사라지고 있다. 부흥회가 교회 부흥에 최대의 처방이란 말이 아니다. 단지 부흥회에 관한 인식이 이 정도니 모든 교회의 사역들이 하나의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에서 예를 들어 하는 말씀이다.
나이가 사십이 훨씬 넘었지만 “흔들리는 마흔 이순신을 만나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는 이순신을 삼국지 그리고 제갈량 오자 손자 등 중국의 여러 지혜자들과 비교하면서 글을 썼는데 오자의 글 가운데 나온 말을 인용하여 이순신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오니 하는 말만 아니었다. 그의 신념이었다.
이것이 바로 열 마리 양을 거느리고 지휘하는 사자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가르치는 목회자가 이런 의식이 없고, 안된다 한다고 되느냐 하는 자세로 서있으니 어찌 교회가 위기가 아니겠는가?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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