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존재할 가치가 있는 정부

● 칼럼 2016. 12. 29. 12:24 Posted by SisaHan

지적장애 2급인 민수(가명·5)는 1주일에 세 번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을 다닌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해 언어치료와 함께 인지·심리·음악·미술 치료를 받기 위해서다.
민수의 고향은 경남 통영이다. 그곳엔 재활치료를 받을 병원이 없다. 할 수 없이 엄마가 민수만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나마 민수는 4월28일 푸르메 병원이 개원하자마자 여기서 치료받을 기회를 잡았다. 지금은 외래진료를 받으려면 2년 넘게 기다려야 한다.
한번 재활치료에 드는 돈은 15만원, 한달에 150만원을 훌쩍 넘는다. 민수 어머니는 “그래도 다행이다. 넘어지긴 해도 이젠 민수 혼자서 곧잘 걷는다. 일찍 치료받지 않았다면 아예 일어서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수가 다니는 푸르메 병원은 전국에서 유일한 어린이재활병원이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가 10년 동안 꿈꿔왔던 프로젝트의 결실이다. 병원 터는 마포구청이 무상으로 제공했다. 430억원의 건립비는 1만명의 후원자와 500여개 기업·단체, 정부와 서울시 도움을 받아 마련했다. 그렇게 지상 7층, 91개 병상을 갖춘 병원이 올해 4월 문을 열었다.
그러나 건립만큼이나 운영도 어렵다. 어린이 재활은 모든 분야 치료사가 일대일로 환자를 상대해야 하기에 인건비가 많이 든다. 로봇 보행기 등 대당 수억원씩 하는 특수장비 운영비용도 만만찮다. 예상하긴 했지만, 올해 약 29억원의 적자가 났다. 그중 7억3천만원은 서울시에서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나머지 적자를 보전하기란 여간 만만치가 않다.
정치·사회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병원도 마찬가지다. 이 병원의 정식 명칭은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이다. 게임기업 넥슨이 건립비용 200억원을 낸 걸 기념해 이렇게 이름 지었다. 김정주 넥슨 회장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후속 지원에 어려움이 있을 거란 우려도 있었지만, 며칠 전 올해 운영비로 3억3천만원을 내놓으면서 병원 운영엔 숨통을 텄다.


백경학 이사는 주요 대기업을 찾아다녔다. “사회공헌사업 예산을 다 써서…”라는 한결같은 답변을 들었다. 최순실씨 사건이 터지고서야 대기업들이 미르와 케이스포츠재단에 수십억원씩 내느라 다른 분야엔 지원할 돈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국민복리를 책임지는 보건복지부도 찾아갔다. 장애아 재활은 사실 정부가 책임질 일이다. 어릴 때 치료를 받으면 정상적인 사회생활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고재춘 병원 기획실장은 “지금 방치하면 20살 이후의 사회적 비용을 모두 국가가 져야 한다. 비용보다 중요한 건, 조기 치료가 한 사람의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들은 “민간병원 운영비를 지원할 근거와 전례가 없다”며 난색을 표시했다.
최순실씨 단골병원인 김영재 성형외과 원장 부인이 운영하는 의료업체에 정부는 15억원의 지원금을 줬다. 얼마 전 문화체육관광부는 최순실·차은택씨 사업에 지원하기로 했던 보조금 731억원을 삭감했다. 이들 사업은 ‘근거와 전례’가 있었기에 정부 예산을 투입했던 것일까.


꼭 해야 할 일을 나눠서 진 이들에겐 인색하고, 권력을 등에 업은 이들에겐 한없이 관대한 정부는 과연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박근혜 정권, 아니 대한민국 정부의 총체적 부실의 한 단면을 여기서 본다.
수백만명이 촛불을 든 이유는 이런 데 있을 것이다. 절실한 사람들을 외면해온 정부를 촛불은 온전히 바꿀 수 있을까. 우선 푸르메 병원과 같은 장애아재활시설에 좀더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 박찬수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