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세 신궁을 참배하는 아베 총리.
“10억엔에 책임 다해” 큰소리
박근혜 12.28 위안부 외교 참사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국에게 12·28 합의를 이행할 것인지, 일본과의 전면적인 외교적 충돌에 나설 것인지 사실상 ‘양자 택일’을 요구했다.
아베 총리는 8일 오전 <NHK>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지난 6일 일본 정부가 내놓은 부산 평화비(소녀상)에 대한 일본의 보복 조처에 대해 “재작년 말에 위안부에 대해 합의가 성립했다. 이 합의는 최종적 불가결한 합의라고 양국이 합의 했다. 일본은 성실이 합의를 실행해 10억엔의 거출을 실시했다. 다음은 한국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를 실행하는 것은 국가의 신용의 문제다”라고 답했다. 아베 총리는 또 서울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도 철거를 요구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당연하다”고 답했다.
아베 총리의 이날 답변을 보면 지난 12·28 합의를 대하는 아베 총리의 기본적인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즉, 지난 합의에 대한 일본의 의무는 오로지 ‘10억엔 출연’이고, 앞으로는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한국 정부가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아베 총리는 자신의 입으로 12·28 합의에 나온 사죄 발언을 해달라는 일본 야당 의원들의 요구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사죄 편지를 보내 달라는 한-일 시민사회의 요구를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즉, 앞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피해 이 문제를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종결시켜, 이 문제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우겠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에게 지난 합의는 ‘망각을 위한 합의’였던 셈이다.
아베 총리의 언급은 차기 한국 정부에게 ‘합의 이행이냐, 전면 외교 전쟁이냐’의 선택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베 총리는 이날 “설령, 정권이 바뀐다 하더라도 이를 실행해야 한다. 이는 국가의 신용 문제”라며 합의 당사자인 박근혜 정권을 넘어 한국의 차기 정부까지 겨냥했다.
아베 총리가 12·28 합의에 대한 한국 국내의 반발을 누그러뜨릴 추가 조처를 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밝혔을 뿐 아니라, 차기 정부에까지 외교적 부담을 지우려 하는 것이다. 아베 총리가 이런 입장을 고수한다면, 차기 한국 정부는 12·28 합의를 파기한 뒤 일본과 전면적인 ‘외교 전쟁’을 벌이거나, 일본 요구에 굴복해 평화비(소녀상)를 철거하는 극단적 방안 외에 절충적인 선택지를 찾기가 힘들게 된다.
이런 상황은 합의 직후부터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소녀상이 철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이 10억엔을 출연하는 게 옳으냐는 내부 논의 과정에서 돈을 입금하면 한국에 대해 “‘도덕적 우위’의 입장에 설 수 있다”는 논리를 동원해 이를 추진한 바 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치명적인 판단 미스로 인해 위안부 문제라는 씻을 수 없는 전쟁 범죄를 일으킨 일본이 한국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운운하며, 합의 이행을 강요하는 기묘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는 차기 정부가 전면 대결을 택해도 한국의 승산이 높지 않은 구도다. 중국의 부상을 억누르기 위해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미일동맹을 강화한 미국의 시선이 일본 쪽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협상력을 높이려면 역사 문제에 대해선 한-중이 보조를 맞춰 일본을 압박해야 하지만, 이는 새로 등장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자극하는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윤병세의 섣부른 위안부 외교가 자신들만 아니라 차기 정부까지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사면초가의 위기로 몰아 넣은 셈이다.
< 도쿄=길윤형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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