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토론토에서 뮤지컬을 보았다. 연로하신 어르신 부부를 모시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날씨는 추웠지만 마음은 한없이 즐거웠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분들과 함께 문화적 삶의 공간을 함께 가진다는 것은 이민생활에서 좀처럼 누릴 수 없는 여유이며 특권으로 느껴졌다. 순수한 복음의 열정을 가진 이들이 지친 교민들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진솔하게 만든 창작 노랫말과 대사들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토론토에서 이런 좋은 분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큰 축복으로 여겨졌다.
뮤지컬 제목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톨스토이 원작이었다. 이는 관객들에게 자신이 사는 근본적인 이유를 묻는 종교적이요 실존적인 질문이었다.


“당신이 사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성공이나 꿈이나 자식이나 건강이나 재산에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다가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 이제 더 늦기 전에 당신은 더 위대한 것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람 안에는 누구나 두 마리의 개를 키우며 살아간다. 한 마리는 ‘편견’이요 다른 하나는 ‘선입견’이다. 그런데 이들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개를 만나면 사라진다. 위대한 성자 바울도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두 마리의 개에 사로잡혀 참 신앙인의 길을 걷지 못했다. 바울은 선교를 통한 고난과 감옥 안에서 만난 예수님을 통해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율법적이요 계산적이요 선행을 통한 구원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게 된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다른 모든 것들은 소멸하는 시간의 한계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고 영원하다. 인간적인 사랑은 ‘주고 받는(give & take)’ 거래에 불과하며, 영적 유산인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한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해 산다. 그래서 손해를 보고는 억울해서 못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성부 하나님은 지금까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시고, 성자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 영광을 버리고 가난하게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오늘도 우리의 걸음 걸이마다 함께 하신다. 우리를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이는 그분의 성품인 선(good)하시고 인자(love)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인류는 그분의 사랑으로 심판을 면하고 구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때 우린 자연스럽게 세상의 욕심을 조용히 내려놓게 된다.

< 박태겸 목사 - 캐나다 동신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