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기쁨은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둘 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시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슬프고, 다시 만나면 기쁘다. 환경에 따라 금방 변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면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조금 있으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조금 있으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고싶지 않았다.
여기서 더 중요한 단어는 <보다>라는 동사이다. 우리의 감정이 슬프고 기쁜 것은 눈으로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에 달렸다.
도마는 제자들이 전해주는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반응했다. 믿음은 보고 이해하는 실재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주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더 복되도다.” 하셨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
헬라어에 <보다>라는 동사는 6개가 있는데, <듣다>라는 동사는 하나 뿐이다. 이는 헬라 사람들이 얼마나 이성적이며 미학적인지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슬픔과 기쁨에는 다른 큰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슬픔은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오지만, 기쁨은 보이지 않는 들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출처의 차이이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슬픔을 이긴다. 그것은 성도가 죄를 이기는 것과 같다. 요셉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보이는 보디발의 아내의 육체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 이는 요셉 자신의 절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요셉을 지키며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도록 막아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joy)’은 단순히 내가 바라는 욕구가 충족됨으로 얻는 ‘즐거움(pleasure)’ 이나 ‘행복’과는 다르다. ‘즐거움’이 내가 주체가 되는 ‘추구의 대상’이라면, ‘기쁨’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선물 즉 ‘은혜의 대상’이다. 그래서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많은 사람들은 행복(happiness)을 추구하는데 이는 본래 happen, ‘우연히 발생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행복 대신에 산상수훈의 8복에서 blessing(복)이라는 단어를 썼다. 이는 본래 bleed, ‘피를 흘리다’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이는 레위기의 희생의 제사를 통해 인간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촉복으로 간주한데서 유래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이 바로 복된 삶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은 외부의 조건으로 만들어지나, ‘기쁨’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솟아난다. 세상에는 즐거움이 있고, 교회에는 기쁨이 있다.
< 박태겸 목사 - 캐나다 동신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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