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화해와 치유의 출발점

● 칼럼 2018. 2. 12. 20:11 Posted by SisaHan

젊은 날 가정교사를 전전한 헤겔은 여유가 없어 양말을 기워 신기도 했던 것 같다. 젊은 철학자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찢어진 양말은 기워 신으면 초라하고 볼품없지만, 정신은 찢어진 상태를 극복하면 찬란해진다.” 이 ‘찢어진 양말’의 모티프가 자라나 뒷날 <정신현상학>이 됐을 것이다. 정신은 자기의식을 갖추게 되면 체세포가 분열하듯 스스로 갈라진다. 자기 내부에서 찢겨 피투성이가 된 정신은 불화와 상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상처를 극복하고 온전한 하나를 이룬다.
헤겔의 정신은 개인의 정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개별 정신들의 집합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공동체도 겨레도 개인의 의식처럼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면 찬란해진다. 그러니 헤겔의 찢어진 양말, 찢어진 정신에서 한반도의 남과 북을 떠올려봄직도 하다.
일흔 해 전인 1948년 2월10일 백범 김구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3천만 동포에게 울며 고함’을 발표했다. 반도가 두 동강 날 위기 앞에서 백범의 말은 통절하게 울렸다. “마음속의 삼팔선이 무너지고서야 땅 위의 삼팔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백범은 그해 4월19일 삼팔선을 넘어 북행길에 올랐으나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김구의 뜻은 속절없이 꺾였고 남과 북은 참혹한 골육상쟁을 벌였다. 삼팔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뒤에도 반목은 끊이지 않았다.
1993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김영삼은 이렇게 말했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이 말은 김영삼이 정치인으로서 남긴 가장 숭고한 말일 것이다. 김영삼의 이후 행보는 스스로 뱉은 말을 배반했지만, 이 말을 실천에 옮긴 사람은 김대중과 노무현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집권기는 분단 70년사에서 남과 북이 통일에 가장 가까이 간 때였다. 남북의 정상은 손을 맞잡고 서로 포옹했다. 통일 한반도의 토대를 닦고 남북협력의 길을 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에 불어닥친 한파는 짧은 화해를 시기하듯 애써 키운 꽃들을 휩쓸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이뤄낸 성과들은 흩어지고 뿌리가 뽑혔다.
문재인 정부는 이 반동과 역풍이 남긴 유산을 물려받았다. 겨레를 공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를 이 유산을 청산하려면 한반도 남북 모두에 그 어느 때보다 큰 지혜와 인내와 아량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평화는 단순히 전쟁 없는 상태의 지속이 아니다. 평화는 적대와 미움의 상처를 치유하고 남북의 상생 구조를 만들어가는 동적인 과정이다. 평화를 향한 가장 큰 도약은 한반도 경제공동체 건설일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개성공단 진출과 노무현 정부의 서해평화협력지대 합의로 밑그림은 진작 그려졌다. 한반도 남쪽과 북쪽이 경제협력으로 긴밀히 결속할수록 전쟁 가능성은 줄어들고 평화의 틀은 튼튼해진다. 남북이 함께 북방으로 가는 통로를 뚫게 되면 부산에서 출발한 철도가 시베리아를 넘어 유럽의 끝에까지 가 닿게 된다. 그렇게 되면 휴전선에 막혀 섬처럼 갇혔던 우리의 상상력도 해방될 것이다.
‘평창’이 출발점이다. 남과 북이 함께하는 올림픽은 작은 통일의 실험이다. 한반도가 반목으로 찢겨 있는 한, 우리의 생존과 번영은 끝없이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평창의 실험이 실험으로 끝나지 않고 화해와 치유로 가는 길을 열어주기를, 불화의 긴 시간을 이겨내고 찬란해지는 그날을 불러오기를 소망한다.

< 고명섭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