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통령 개헌안’ 초안을 만든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는 몇가지 쟁점 사안의 여론 수렴을 위해 3월 초순 숙의형 시민토론회를 열었다. 4개 권역별로 시민 200명씩을 뽑아 기본 자료를 제공하고 한나절 토론을 진행한 뒤 토론 전후의 의견 변화를 관찰한 것이다. 지난해 신고리 5·6호기 정책 결정을 위해 공론화위원회를 열었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개헌 주체는 국민’이라고 누구나 말하지만, 시민이 직접 깊숙이 참여한 건 놀랍게도 이 토론회가 거의 유일하다. 국회가 끔찍이 싫어하는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도입’과 ‘대통령의 국무총리 임명권 유지’(국회의 총리 선출권 반대)라는 대통령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이렇게 결정됐다. 국회 개헌특위가 1년간 활동하며 시·도별 토론회를 열긴 했지만, 정치인·학자들이 주제발표와 토론을 하는 세미나 형식이었다.


토론을 전후한 시민들의 의견 변화를 살펴보는 건 흥미롭다. 국회의원 임기 중에 국민이 그 직을 중단시킬 수 있는 ‘국민소환제’에 대해선 토론 전과 후 모두 찬성 의견이 70%를 넘었다. 하지만 토론 전에 비하면 토론을 거친 뒤에 ‘반대 의견’이 10%포인트 늘어난 게 눈에 띈다. 반면에 국무총리 선임 방식에 대해선, 자유한국당이 요구하는 ‘국회의 총리 선출’에 반대하는 의견이 토론 전보다 토론 후에 월등히 높아졌다. 토론 전엔 절반 못 미치는 시민(48.3%)이 ‘국회의 총리 선출’에 반대했지만, 토론 이후엔 그 비율이 68.3%까지 솟았다.
국회가 총리를 선출하면 장관 제청권을 총리가 쥐고서 사실상 이원정부제와 같은 형태로 권력이 양분될 수 있다. 반대로 총리 임명권을 지금처럼 대통령에게 주는 건, 앞으로도 국무총리를 대통령의 바람막이 또는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즘엔 보기 힘들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문 정치면엔 ‘방탄 내각’이니 ‘친위 내각’이니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했다.


극단적 예시이긴 하지만, 두 사례 중 어느 게 더 바람직한가. 숙의 토론의 결과는, 숱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제왕적 대통령’의 손에 권력을 쥐여주는 게 국회에 권력을 넘기는 것보다는 낫다는 시민들의 판단을 담고 있다. 국민의 국회 불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난 26일 문재인 대통령은 개헌안을 정식 발의했다. 이제 공은 다시 국회로 넘어갔지만, 전망이 밝지는 않다.
현재 의석 분포에서 대통령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을 내세운 3일간의 개헌안 설명이 ‘정치 쇼’라는 야당과 보수언론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대통령 발의가 의미있는 건, 1년 넘게 물밑에서만 떠돌던 ‘개헌 문제’를 국민의 관심권으로 끌어올렸다는 점 때문이다. 3일간의 ‘정치 쇼’로 개헌안 주요 쟁점이 비로소 국민의 시야에 명료하게 들어왔다. 국회와 헌법을 무시했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정식 발의하지 않았다면 ‘개헌’은 지금도 여의도 의사당 주변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개헌안과 관련해 국회가 극적인 타협을 이룬다면, 그 고리는 아마도 ‘국회의 국무총리 추천권’ 문제일 것이다. 정부형태의 핵심인 총리 선임 방식에서 여야가 합의하면, 토지공개념을 비롯해 다른 쟁점 사안들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며 타결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국회의 ‘총리 추천제’를 단지 여야 정치협상으로만 풀려고 해선 곤란하다. 그런 식의 타협은 여론이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시간은 있다. 국회가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서, 이 사안에 관한 사전 정보를 제시하고 시민 의견을 수렴하는 건 어떨까 싶다. 선거구제 개편을 비롯해 국회 신뢰를 높일 수 있는 방안들과 연계해서 ‘총리 추천제’를 시민 토론에 부치는 방식이다. 국회의원 국민소환제에 관한 의견이 토론을 거치면서 상당히 변했듯이, 충분한 정보 제공과 토론은 어느 쪽이든 의미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28일 공개된 한국갤럽의 ‘주요 기관 신뢰도 여론조사’를 보면, 국회 신뢰도는 15%였다. 조사 대상 17개 기관 중 최하위다. 행정부(41%)와 비교해선 물론이고 개혁 1순위로 꼽히는 검찰(31%)에 비해서도 월등히 낮다.
언제까지 정치가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댈 것인가. 국회와 정치권은 지금 당장 ‘국민 뜻’에 기반해서 뭐라도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 박찬수 - 한겨레신문 논성위원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