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진로교육이라는 이름의 폭력

● 칼럼 2018. 5. 23. 13:10 Posted by SisaHan

요즘 아이들은 꿈이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똑같은 질문을 자꾸 받으면 정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마련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진짜 꿈을 이야기하다가(‘마법학교에 다니고 싶다’) 점점 어른들의 기대에 맞추어 대답을 바꾼다(‘해리 포터를 뛰어넘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아이들의 꿈의 세계를 이렇게 식민화하는 일이 진로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은 한술 더 떠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려면 초등학생에게 창업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진로를 일찍 결정하는 것이 과연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될까? 4차 산업혁명이 예고하는 변화의 핵심은 직업구조의 전면적인 재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직업의 40%가 사라질 거라는 비관적인 예측도 있다. 그 말은 특정한 직업을 준비하는 데 청소년기 전체를 바치는 것은 위험한 전략이라는 뜻이다.


만일 어떤 학생이 통역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고등학교 내내 준비했는데, 졸업할 무렵 이 직업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장래 희망을 3년 내내 통역사로 적어 냈고 동아리 활동과 봉사활동도 모두 거기 맞춰서 했다. 그가 뒤늦게 진로를 수정한다 해도, 이런 학생부를 가지고 ‘학종’으로 원하는 과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은 평생 5~6개의 직업을 갖게 되리라고 한다. 현재의 진로교육은 그중에서 첫번째 직업에만 초점을 맞출 뿐이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여러 나라는 교육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은 우리와 크게 다르다. OECD 국가들의 일반적인 전략은 기초교육, 특히 수학, 과학 교육을 강화하고 성인의 재교육을 쉽게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수학 시간이 전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트래킹이 약화되고 있다. 트래킹(tracking)이란 실업계와 인문계, 영재 코스와 일반 코스 등으로 트랙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트래킹은 학업성취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독일은 2000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OECD 국가 중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냈는데, 인문계와 실업계의 구별이 너무 일찍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폴란드는 15세에 이루어지는 트래킹을 16세로 늦추는 것만으로도 PISA 점수가 크게 올랐다. 핀란드는 영재코스를 따로 만들지 않고 앞서가는 아이가 뒤처지는 아이를 도와주게 하는데, 덕택에 핀란드 아이들은 다들 수학을 잘한다.
한국은 세계적인 추세와 반대로, 수학 시간을 줄이고(현재 OECD 국가 중 한국이 제일 수학 시간이 적다) 트래킹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수능에서 기하를 뺀 것이 그 예다. 다른 나라의 고등학생들은 기하를 배우는데 우리나라 고등학생들만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여기에 대한 교육부의 대답은 이렇다. “수학은 똑똑한 애들만 하면 된다.” 사실 수능은 ‘영재 트랙’에 들어가지 못한 평범한 학생들을 위한 제도로 바뀐 지 오래다. 수능을 치지 않는 영재고 학생들은 이러나저러나 기하를 공부할 것이다.


한국의 교육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1%의 영재가 99%를 먹여살린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나는 부디 그들이 이 말을 한 사람이 이건희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수학 공부를 1%의 영재에게 맡기는 한 진보적인 정치인들은 기술관료주의에 종속될 수밖에 없으며, 최종 심급에서 ‘삼성의 지배’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핀란드가 어떻게 노키아 없이 살아남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 김현경 - 문화인류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