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든 이방인’가운데 “믿어 순종”을 낳게된 기독교 신앙고백자 들이다. 곧 마침내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그리고 오직 이 사람들만이 <믿음의 순종>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롬1:5). 바로 <복음>의 역사성은 의의 태양을 맞아들이는, 아침 햇살이 되는 ‘복음’을 두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주하나님께 감사할 일은 우리에게 다른 길이 열려져 있으나, 곧 <복음>안에서 “율법 외에 주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칭의’를 얻을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곧 이것을 가리켜 “주하나님의 의” 바로 예정 하시고 공급하시며 영접해 주시는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것은 마치 크리스쳔의 갑옷을 가르켜 “하나님의 전신갑주”(엡6:10) 라고 하는 말씀과 같다. 곧 ‘칭의’는 모두에게 곧 전체 일반에게 제공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주하나님을 구주로 섬기는 것이니, 그를 의지하고 영접하여 매달리는 면에 있어서 모두 그러해야만 한다. “신앙은 우슬초 다발이요, 그리스도의 보혈은 흩어 뿌리는 피다”. 우리가 죄악의 현장에서 붙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주하나님의 인내의 덕분이다. 즉 주 하나님의 참으심으로 인해, 집행유예가 바로 <속죄>함 받은 우리 들이다.


열매 못맺는 포도나무가 포도원에 남겨진 이유는 그 주인의 인자함과 정원사의 조정 때문이다. 중재자와 속재물이 없이는 용서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한 시도 참으실 수 없다는 점에서 볼때 이 양자에 있어서 밝히 들어나는 것은 ‘주하나님의’ <의>다. “바로 이것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 하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는 뜻은 율법의 지위와 기초를 확고하게 하고, 율법은 아직도 우리의 과거를 확신 시켜주고, 미래를 향하게 하는데 효용가치가 있다는 말 이다. 물론 <율법>이 직접 우리를 구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율법을 <중보자(주하나님)>의 손에 들린것으로 알고 그걸 소유하고 거기에 복종하며 “은혜의 율법(사랑)”에 순종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폐기하는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멀고 오히려 이 ‘율법’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서로가 도덕률의 이행을 부정하거나 부정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된다. ‘칭의의 열매’ 즉 우리가 의롭게 됨이 우리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주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의지 때문이요, 이것을 조건으로 우리의 무죄와 구원에 대한 원리를 주장 할 수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은혜와 타락의 갈등’에서 머뭇 거리지 말자! 즉 주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걸 행하지 않는 영혼이요, 보다 더 탁월한 것이 된 줄 인정하며 주님의 교훈을 받으면서도 한결같이 그걸 어기며 사는 영혼들이다 (롬2:17-23). 즉 자신의 욕정의 지배에 짓눌려 사는 노예로 머무는 자들인 것이다. 율법에 의해서 확신은 되었으나 <복음>에 의해서 변화되지 않은 그런 자들이다. 더러움을 지적은 하면서도 씻어 없애지는 못하는 것이다. 곧 일반적인 확신으로 머리가 깨어 있으면서도 자책하는 양심을 가지고 악마를 섬기는 것이다. 즉 주하나님의 법도 알기를 즐거워하기도 하고, 마음 속의 죄를 반대하고 성결의 편을 드는게 있으면서도, 죄에 대한 지배적인 애착에 이 모든 것이 압도 되고 마는 것이다. 참된 <은혜>는 이러한 죄와 타락을 상대로 투쟁하지, 그것을 허용치 않으며 그걸 증오하며 슬퍼하고, 짐 같이 여기며 꿍꿍대고 있다는 사실 또한 확실한 말씀이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5:17). 이 말씀이 바로 <성화의 특성>이고 <성화의 목적>이 되는 것이며, 경건 생활의 실천에 대한 강조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도에 항상 힘쓰며” 기도는 소망과 인내의 친구요, 우리는 기도 가운데 주님을 섬겨야 한다. 즉 <기도>의 열정과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 <기도>임무에 냉담하거나 싫증 내어도 안되고 ‘기도’는 주하나님을 중히 여기는 우리의 임무다. <기도>를 등한히 하는 것은 게으름이요 교만이고, 교만이란 우리 모두가 천성으로 타고난 ‘죄’이다. 진지한 기도로 더 없이 귀한 영적 은사를 행사하는데 있어서 이 온전하고 겸손한 배려를 우리는 본 받아야 겠다.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롬12:16절 하반). 우리 주하나님은 심판보다는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즐겨하신다. ‘자비’를 구하려고 하는 자는 자기 죄를 먼저 회개(자백)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주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의 선하심 그리고 그의 존엄과 자비를 결합해서 바라보아야 한다. 개개의 신자들에게 선행이 풍부하며 주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증가 하며 온갖 선한 은사가 늘어날 때는 그들의 가지가 퍼진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때는 속 사람이 날로 새롭게 된다. 선한 일을 할 수있는 기회를 포착하려고 서성대는 마음씨야 말로 고결한 <마음>이 아닐수 없다. “주하나님은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베푸신다.”(시21:4).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