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위 수뇌부 인사가 명품백 종결 밀어붙였다"
"생각 달랐지만 반대 못 해…양심에 반해 괴로워"
부패 방지 업무만 20년 이상 수행한 핵심 국장
윤석열 정권 들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듯
직속 상관이 정승윤 부위원장…윤 대선 캠프 출신
김건희‧류희림에게 면죄부, 이재명엔 '특혜' 낙인
야권 "실무자들이 말 못 할 고초" "정치적 타살"
"윤 정권이 권익위 망가뜨려…공무원들에 모멸감"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청렴‧부패 관련 실무를 총괄하던 50대 고위 공무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부패 방지 업무만 20년 이상 수행해 왔지만 윤석열 정권 들어 김건희 씨 명품백 수수 사건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의 응급헬기 이송 건,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의 민원 사주 의혹 등 여권의 직간접적 압박이 심했던 사안들을 다루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온 것으로 전해졌다. 원칙과 기준이 무너지고 정상적인 사고로는 견디기 어려운 환경에서 양심에 반하는 일을 수행하느라 고통을 겪었을 그를 결국 현 정권이 죽음으로 내몬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세종남부경찰서와 세종소방본부 등에 따르면 8일 오전 9시 50분쯤 세종시 종촌동 한 아파트에서 권익위 소속 김모 국장이 안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현장을 목격하고 신고한 사람은 동료 직원으로 김 국장이 출근하지 않고 연락도 닿지 않자 아파트를 찾았다가 소방 당국에 신고했다. 김 국장은 서울에 가족을 두고 세종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아파트에 다른 사람이 침입한 흔적이나 타살 흔적이 없는 점 등으로 미뤄 김 국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
김 국장은 권익위에서 청렴 정책과 청렴 조사 평가, 부패 영향 분석, 행동 강령, 채용 비리 통합 신고 업무 등을 총괄하는 부패방지국의 국장 직무대리로 일해왔다. 2023년 8월 김홍일 권익위원장 재임 당시 부패방지국장에 선임된 안준호 국장이 지난 2월 권익위 기획조정실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김 국장이 3월부터 부패방지국장 전담 직무대리를 맡았다. 3급 부이사관인 그는 1999년 제43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며 연말쯤 2급 이사관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고 한다. 김 국장은 청탁금지법을 담당하는 권익위 핵심 부서의 운영 책임자로서 특히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던 김건희 씨 명품가방 수수 사건과 류희림 방심위원장의 '청부 민원' 사건,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의 헬기 이송 건 등의 조사를 지휘했다.
앞서 권익위는 지난 6월 10일 김건희 씨의 명품가방 수수 사건에 대해 "대통령 배우자는 청탁금지법상 제재 규정이 없다"며 '위반 사항 없음'으로 종결 처리해 엄청난 국민적 질타를 받은 바 있다. 6개월을 조사하고도 상식 밖의 면죄부만 내주자 그 과정에서 야당 추천 권익위원이 반발해 사임하기도 했다. 더욱이 최근엔 용산 대통령실 현장 조사도 못하고 '퇴짜'를 맞았던 사실까지 드러나 "명품백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대체 뭘 조사했다는 거냐"는 야당과 언론 등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권익위는 또 지난달 8일 류희림 방심위원장의 '민원 사주' 의혹과 관련한 이해충돌방지법 위반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며 사건을 도로 방심위로 송부한다고 발표해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류 위원장의 '셀프 민원'을 입증할 증거가 차고 넘치는 데도 방심위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라고 넘긴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이었다. 이 역시 정권 비호를 위해 권익위라는 기관의 존재 이유를 송두리째 부정한 처사였다.
이와는 정반대로 권익위는 지난달 23일 이재명 전 대표의 7개월 전 응급헬기 이송 사안을 공식적으로 '특혜'라고 규정해 상대에 따라 극과 극의 정치적 행위를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대표가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 방문 중 테러범 김진성에 의해 좌측 목 부위를 칼로 찔리는 치명상을 입고 부산대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부산대병원은 이권 개입 및 알선 청탁, 소방본부와 서울대병원은 특혜 제공으로 '공무원 행동 강령'을 위반했다는 황당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 세 가지 사건 처리 결과를 대외에 발표한 건 김 국장의 직속 상관인 정승윤 부패 방지 담당 부위원장 겸 사무처장이었다. 정승윤 부위원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일했던 검사 출신으로, 윤 대통령의 대선 공약집에 여성 경찰관이 범죄 현장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오또케'라는 여성혐오 표현을 써 물의를 빚고 선대본에서 해촉됐다가 다시 차관급인 권익위 부위원장으로 기용된 인물이다. 장관급인 유철환 권익위원장은 윤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79학번 동기다.
이런 상관들 밑에서 김 국장이 얼마나 심적 부담과 압박을 느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지난달 24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단상에 나와 김건희 씨 디올백 사건 등에 관한 의원들의 질의에 직접 답변하기도 했다. 경찰은 김 국장의 사망 현장에서 그가 남긴 메모 형식의 짧은 유서를 확보했는데 여기에도 '너무 힘들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한다.
JTBC 등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김건희 씨 명품백 사건이 본인 의사와 달리 무혐의로 종결된 이후 주변 지인에게 전화 통화 및 문자 메시지를 통해 "권익위 수뇌부 인사가 이 사안을 종결하도록 밀어붙였고, 내 생각은 달랐지만 반대할 수 없었다" "최근 저희가 실망을 드리는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이다. 참 어렵다. 심리적으로 힘들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해 괴롭다" 등의 하소연을 해왔다.
권익위 직원들도 충격 속에 술렁이고 있다. 권익위 관계자는 "허망하다. 훌륭한 공무원이었다"고 안타까워했고, 다른 관계자는 "최근 업무로 힘들어했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김 국장이 우울증 같은 건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권익위 측은 공식적으로는 출입기자단에 "경황이 없어 취재에 응하지 못하고 있는데 양해를 부탁드린다"며 "경찰이 사건을 조사 중"이라고만 했다.
야권에서는 김 국장이 실무 책임자로서 상부의 부당한 압력에 고초를 겪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정치적 타살'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더불어민주당 노종면 원내대변인은 서면브리핑에서 "믿기 힘든 비보를 들었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고 비통한 심정을 가누기 어려울 유가족과 권익위 동료들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고인은 권익위 국장으로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 사건을 담당했고, 이재명 전 대표의 응급헬기 이송 사건도 맡았다. 이들 사건에 대한 권익위의 처리는 많은 비판을 낳았다"면서 "일련의 과정에서 권익위 내부 실무자들이 말하지 못할 고초를 당한 것은 아닐지 의문이 든다"고 짚었다. 또 "혹여나 고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고백하고 사과해야 한다"며 "더불어민주당은 고인의 죽음을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고인의 유가족과 동료들이 2차 가해를 당하지 않도록 힘쓰겠다"고 했다.
조국혁신당 김보협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조국혁신당은 고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을 들여다보겠다. 고인이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면서 자랑으로 여겼을 국가권익위라는 조직을 윤석열 정권이 망가뜨렸다"며 "윤석열 대통령의 측근이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맡으면서 권익위의 권위는 추락했다. 김건희 씨의 디올백 수수에 대해 '제재 규정이 없으므로 위반 행위도 없다'는 황당한 결정을 내린 이후 권익위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씨 한 사람을 위해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 공공의 이익을 실현해야 하는' 공무원들에게 고통과 모멸감을 안긴 사람들은 고인의 죽음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며 "조국혁신당은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더는 정치적 타살에 가까운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조금만 더 견디자"고 전했다. < 김호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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