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명 조선인 태운 선박 폭발침몰’ 우키시마호 참사

기시다 방한 하루 앞두고 승선자 명단 일부 79년만에 공개하며 “인도적 차원”

 
 
             1945년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등을 태우고 교토 앞바다에서 폭침한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
 

일본 정부가 1945년 광복 직후 강제동원 노동자 등 재일 한국인들이 탔던 귀국선 ‘우키시마마루호’ 침몰 당시 조선인 명부 제공과 관련해 “한국 정부 요청을 받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명부 제공이 이뤄졌다”고 밝혔다.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정부 대변인 겸 관방장관은 6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 후생노동성이 보유하고 있는 우키시마마루호 침몰 관련 문서 가운데 정밀조사를 마친 (조선인 탑승자와 관련) 문서에 대해 5일 외교 경로를 통해 한국에 제공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 정부는 이제까지 과거 군속 관련 (한국인) 명부나 포괄적인 명부 전달과 관련해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가능한 성실하게 대응해 왔으며, 우키시마마루호 승선자 정보도 이런 과정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우키시마마루호 사건은 1945년 8월24일, 광복을 맞은 한국인들이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올랐던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마루호가 교토 앞바다에서 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한 사건이다. 일본 정부는 사건 당시 전체 승선자 3700여명, 이 가운데 한국인 희생자가 524명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한국인 생환자와 사망자 유족들은 일본이 고의로 배를 폭파했고, 승선자 8천여명 가운데 한국인 희생자만 수천 명에 이른다고 맞서 왔다.

한국 정부는 이전부터 우시키마마루호와 관련해 일본에 자료를 요구해 왔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사건 발생 이후 79년간 자료를 주지 않다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방한 일정을 하루 앞둔 지난 5일 처음 승선자 명단 일부를 내놨다. 이에 대해 우리 외교부는 “일본 정부가 내부조사를 마친 19건의 자료를 이날 도쿄 주일대사관에 우선 제공하고, 다른 승선자 명부 자료도 내부조사가 완료되는 대로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 정부도 우키시마마루호 관련 사망자 명부를 추가 제공할 예정이라는 입장을 확인했다. 하야시 관방장관은 “승선 명부를 한국에 전달한 과정에 대해 자세한 (협상) 경위는 답변을 삼가겠다”면서도 “후생노동성이 보유하고 있는 우키시마마루호 관련 다른 명부에 대해서도 향후 조사가 완전히 끝나는 대로 한국 정부에 제공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만 일본 정부가 확보한 자료 가운데 추가로 어느 수준의 자료를 제공할지는 불분명 하다.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마루호 승선 명부 관련 자료가 70종 안팎이라고 밝혀왔는데, 이번에 외교부를 통해 보내온 19건 안에 몇 명의 인적 정보가 들어 있는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 도쿄=홍석재 특파원 >

 

우키시마호 유족 “정부, 79년 기다린 유족에 명부공개·진상규명”

한영용 우키시마유족회 회장 인터뷰

 
 
한영용 우키시마유족회 회장(왼쪽)이 지난 7월 도쿄에서 최봉태 변호사(오른쪽)과 함께 후쿠시마 미츠호 일본 사민당 대표를 만나 우키시마 승선자 명부 사본을 전달받고 있다. 한영용 회장 제공
 

“일본에서 승선자 명부를 받았다는데, 정부에선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다. 79년을 기다렸다. 유족들한테 하루빨리 명부 전체를 공개해야 한다.”

한영용(82) 우키시마유족회장은 8일과 9일 한겨레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답답한 심정을 여러차례 이야기했다. 79년간 승선자 명부의 존재를 부인해온 일본 정부가 지난 5일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 일부를 외교부에 전달했지만, 유족들은 정부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외교부에서 듣기로는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승선자 명부 전체는 일본 정부가 공개를 거부했다고 한다. 유족들이 알아서 찾아오라는 얘기인데, 정부에 제대로 진상을 규명할 의지가 있는지 묻고 싶다.”

한 회장의 아버지 고 한석희씨는 1945년 1월 일본 아오모리로 강제동원됐다. 패전한 일본은 수많은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부산항으로 돌려보내겠다며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에 태웠다. 1945년 8월22일 아오모리항을 출발한 우키시마호는 부산항이 아닌 교토 마이즈루항으로 향했다. 8월24일 그곳에서 대규모 폭발이 일어나 배가 침몰했고 타고 있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세살이었던 한 회장은 1970년대부터 선친의 유해를 찾고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했다. 1991년 우키시마호 피해자 유족 가운데 처음으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해 배상 민사소송도 제기했지만, 일본 사법부는 정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1991년 한영용 회장 등이 도쿄에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며 설명회를 하고 있다. 한영용 회장 제공
 

한 회장은 일본이 이번에 내놓은 승선자 명부 일부 뿐 아니라 전체 명부를 조속히 받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이 75종의 명부 가운데 19종만 보냈다는데, 나머지는 언제 준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79년을 기다렸는데, 100년 동안 기다리란 말인가. 아버지를 (끌고가) 부려먹고 목숨을 빼앗은 것도 원통한 데, 79년 만에 내놓은 게 명부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니 기가 막힌다.”

 
 

승선자 명부 입수는 시작일 뿐 진상 규명과 유골 발굴·봉환 등 남은 숙제가 훨씬 많다. 그는 진상규명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정부 대신 지난 2012년 5월엔 자비를 들여 스쿠버다이버 2명을 데리고 일본 항만청 허가를 받아 우키시마호 폭침 현장 바닷속을 1주일간 조사하기도 했다. “유품과 유골이 침몰 현장 3m 펄 아래 묻혀있는 것을 확인했다. 어서 인양하고, 일본 도쿄 유텐지에 합골된 희생자 유해 275위도 고국에 돌아올 수 있게 해야 한다.”

한영용씨의 부친 한석희씨가 공부했던 책,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한 부친의 유일한 유품이다. 한영용 회장 제공
 

양국 정부 모두 사건조사를 공식적으로 하지 않은 탓에 희생자 규모부터 의문투성이다. 한 회장은 “일본 정부는 승선자가 3700명이라고 발표했는데,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1만2천명이고, 부산추모협회 조사는 8천명이다. 침몰 원인도 엇갈린다. 일본은 미국 기뢰 때문이라는데, 살아 돌아온 동네 어른은 분명히 배 안에서 폭발물이 터졌다고 한다”고 전했다.

진상규명을 위해선 정부 차원의 노력이 관건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외교장관 등에게 수많은 탄원서를 보냈다는 한 회장은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이 요즘 하는 얘기를 들으면 기가 막히다. 김문수 노동부 장관 말대로 ‘일제시대에 우리가 일본인’이었다면, 일본 정부가 유족들한테 원호금(군인·군속 등에게 주는 돈)을 주는게 맞지 않으냐고 따져묻고 싶다”고 했다.  < 박민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