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돌 맞은 정의구현사제단, 명동서 시민과 함께 미사
함세웅 신부 "50주년, 정의 실천하는 은총의 시간"
사제단 "정의구현은 본연의 직무…다시 초심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알린 안유·전병용에 감사패 전달도
한국 민주화와 인권의 상징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이 창립 50주년을 맞아 기념 미사를 갖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사제단은 "다시 한번 민주의 이름으로 크게 일어설 때가 왔다"면서 "순수하고 절실했던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사제단은 창립 50주년을 사흘 앞둔 23일 오후 3시부터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문규현 신부 주례, 사제단 공동 집전으로 5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했다. 명동성당은 기념 미사에 참석한 신자와 각계각층에서 온 시민들로 가득 찼다.
미사는 50년 전 '그날'을 상기하듯, 1974년 9월 26일 오후 5시 사제단이 처음 미사를 봉헌할 때 명동성당에서 불렀던 입당 성가(聖歌)로 문을 열었다. 성가와 함께 사제단 신부들이 십자가를 따라 성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50년 전 유신독재에 맞서 정의를 울부짖었던 30대 젊은 신부는 어느덧 80대 원로 사목자가 되어 후배 신부들과 함께 십자가를 따랐다.
강론을 맡은 함세웅 신부는 "아픈 역사가 많은 명동성당이 제 자리를 찾은 건 1974년이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을 풀어주라는 절절한 탄원의 기도를 올렸을 때 성소가 됐다"면서, "오늘날 명동성당은 생동감을 상실했다. 슬프고 안타깝고 때로는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그러면서도 "오늘 50주년 기념 미사는 우리 모두 '정의의 옷'으로 갈아입는 시간"이라며 "정의를 실천하는 은총의 시간"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함 신부는 특히 "구원신앙의 핵심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빚졌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며 "이 빚은 예수처럼 오직 희생과 헌신, 사랑으로만 갚을 수 있다"고 했다. 함 신부는 "오늘의 검찰 독재정권에서도 박은정 검사나 임은정 검사와 같이 (희생·헌신으로) 검찰을 정화하고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의로운 검사들도 들고 일어서라"고 했다. 의로운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정의의 옷'을 입고 나서라는 원로 사목의 외침이었다. 미사 현장에는 실제 임은정 검사가 참석해 시민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미사에서는 정의에 대한 외침과 함께, 각계각층에서 지난 50년을 되돌아보며 당부하는 말을 전했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제단은 늘 정의 구현의 중심에 서서 언제나 약자 편이었고 공격 받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권의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며 현장과 길거리에 함께 있어 든든했다"면서 "사제단의 50년은 우리 모두의 50년이고, 새로운 다짐의 해이다. 앞으로도 좋은 말씀과 실천으로 인도해달라"고 당부했다.
정강자 전 참여연대 공동대표는 축사에서 "사제단 시민들이 함께, 때로는 따로, 지켜온 50년의 힘이 80년 광주, 87년 6월 항쟁, 평화통일운동, 효선·미선 촛불, 세월호 참사, 2016년 박근혜 퇴진 운동, 이태원 참사를 보듬고 그 어두운 터널을 걸어나올 수 있게 했다"면서도 "돌이켜보면 우리는 멈추지 않고 행진해왔으나, 매듭짓지 못한 일이 많다"고 말했다.
정 전 대표는 "윤석열 정권 들어 그 악들은 '검은 흙탕물'로 세를 키워 우리를 통째로 집어 삼키려 한다. 친일청산, 검찰개혁, 정치개혁, 언론개혁, 노동개혁, 성평등, 기후위기 등이 다 그런 거 같다. 우리 선배들이 놓쳤고 우리 또한 다르지 않다는 점을 통감한다"면서 "오늘 신부님이 강론에서 정의를 향한 빛의 길을 열고 다시 50년을 시작하겠다라는 말씀을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 주교는 축하 메시지를 보내 "사제단은 산업화 과정에서 일어난 수많은 인권유린 사태와 사회적 부패현상을 좌시하지 않고 정의로운 예언자의 목소리를 냈다"며 "이념과 구호에 그치는 신앙이 아닌 사회 속에서 그늘진 이들과 함께하며 야전병원으로서 교회의 사회복음화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사제단 여러분의 노고와 헌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전했다.
이 주교는 "앞으로도 하느님의 사제로서 성교회의 복음 정신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정진하시기를 바라며, 무엇보다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여러 계층의 소외된 이들을 돌보며, 구체적 사랑을 전하시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또 "매우 긴급하고 절박한 과제인 하나뿐인 공동의 집, 지구를 살리는 생태환경 보존을 위해서도 힘을 모아주시기를 빈다"고 했다.
50주년 미사를 통해 감사 인사를 전하는 시간도 가졌다. 사제단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조작의 전모를 세상에 밝히는 데 힘쓴 안유 당시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과 전병용 당시 교도관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들은 당시 수감 중이던 이부영 전 동아일보 기자에게 사건을 알리고 외부와 연락할 수 있도록 했고, 이 사실이 사제단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사제단은 감사패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가 감옥에 갇혀서 몸부림칠 때 한마음으로 슬퍼하고 아파하시며 예수님 맞아주시듯 따뜻이 돌보아주신 은혜, '진실'을 세상에 알려서 군사독재를 끝낼 수 있도록 해주신 놀라운 용기와 의로운 수고를 기억하며 경의와 함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전했다. 미사에는 이부영 전 동아일보 기자(현 자유언론실천재단 명예이사장)도 참석해 축하해줬다.
이 밖에 미사에서는 사제단 50주년을 맞아 박노해 시인이 보낸 축시 '다시 새벽에 길을 떠난다'도 현장에서 낭독됐다.
"제 몸을 때려 울리는 종은 / 스스로 소리를 듣고자 귀를 만들지 않는다 // 평생 나무와 함께 살아온 목수는 / 자기가 살기 위해 집을 짓지 않는다 //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서 기도하는 어머니는 /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 우리들, 한 번은 다 바치고 돌아와 / 새근새근 숨쉬는 상처를 품고 / 지금 시린 눈빛으로 앞을 뚫어 보지만 / 과거를 내세워 오늘을 살지 않는다 // 긴 호흡으로 흙과 뿌리를 보살피지만 / 스스로 꽃이 되고 과실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 내일이면 모두가 웃으며 오실 길을 / 오늘 젖은 얼굴로 걸어갈 뿐이다 // 다시 새벽에 길을 떠난다 / 참 좋은 날이다"
지난해 사제단의 시국기도회에서 성가를 연주했던 시국미사 밴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리더 신상훈 씨와 그의 형 신상옥 씨는 축가 공연을 해 미사 참가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두 사람은 1986년 고(故) 김수환 추기경에게 불러줬다는 <임 쓰신 가시관>이라는 곡과 MBC 대학가요제 수상곡인 <꿈의 대화> 등의 노래를 불렀다. 신자와 시민들은 노래를 따라부르며 박수를 쳤다.
사제단은 미사를 마치며 성명서를 통해 창립 50주년의 다짐을 밝혔다. 사제단은 "우리가 '제1시국 선언문(1974년 9월 26일)'에서 천명했던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 국민 생존권과 기본권 존중, 서민대중을 위한 경제정책 확립은 지금 짓다만 밥처럼 이도 저도 아니게 돼 버렸다"며 "애국청년학생, 노동자와 농민, 양심적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살벌하고 교활하고 악랄했던 독재 권력에 맞서 피눈물로 이룩한 성취가 시시각각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으니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다시 한번 민주의 이름으로 크게 일어설 때가 왔음을 말씀드린다"고 했다.
사제단은 "이참에 세상을 치명적으로 병들게 만드는 사회적 현상 하나를 말씀드린다. 그것은 종교가 공정을 외면하고 정의구현이라는 본연의 직무를 팽개치는 태만"이라며 "7,80년대 교회가 그나마 떳떳하고 듬직했던 것은 공정의 집행인 정의를 최소한의 애덕으로 여기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른바 '대붕괴의 시대'를 맞이한 오늘, 교회마저 세상의 슬픔과 번뇌를 외면한다면 사람들이 서러운 눈물을 어디서 닦겠는가"라며 "우리부터 사제단을 결성하던 때의 순수하고 절실했던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 민들레 김성진 기자 >
다음은 사제단 창립 50주년 성명서 전문.
사제단을 일으켜 세운 순교자들
1. 50년 전 갓 서른을 넘긴 젊은 신부들이 안락한 성소를 박차고 서울로, 명동으로 집결했던 것은 주교 지학순의 수감 때문만도 아니요, 독재자 박정희의 폭압 때문만도 아니었으니 그것은 이곳 지하 묘소에 잠들어 계시는 순교자들의 비상호출 때문이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열린 세상을 꿈꾼 죄로 국가폭력에 희생되신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우리 강토 곳곳에 뼈를 묻으신 순교자들의 천둥 같은 부르심이 아니었으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은 출현할 수 없었으며, 반세기에 이르는 줄기 찬 실천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제단의 등장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마땅히 가야 했으나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새롭고 험한 길을 비로소 걷기 시작했습니다.
2. 그런데 우리가 <제1시국 선언문>에서 천명했던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 국민 생존권과 기본권 존중/ 서민대중을 위한 경제정책 확립"은 지금/ 짓다만 밥처럼 이도 저도 아니게 돼 버렸습니다. 애국청년학생, 노동자와 농민, 양심적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살벌하고 교활하고 악랄했던 독재 권력에 맞서 피눈물로 이룩한 성취가 시시 각각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으니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민주의 이름으로 크게 일어설 때가 왔음을 말씀드립니다.
3. 지난달 사제단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순례하였습니다. 조선의 첫 신학생들이 목숨을 내놓고 건너던 거기서 "진리의 찬란한 빛 담뿍 안고 한 떨기 무궁화로 피어나신" 선배들의 고결한 삶을 돌아보았으며, 손에 닿을 듯 가까운 북녘의 산하를 눈으로 어루만지면서 생나무 절반이 찢겨 나간 이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묻고 또 물었 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지나온 오십 년을 돌아보고 나아갈 오십 년을 내다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을 살고 있으니 우리는 두려움 없이 내일을 건설할 것입니다. 짐도 무겁고 길도 멀지만 주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이므로 우리의 멍에는 가볍고 편합니다.
4. 사나운 폭염 아래 줄곧 시달리다 한여름 못잖은 가을 더위로 지칠 대로 지쳐버린 모든 분에게 위로를 보냅니다. 먼 옛날부터 착한 사람들을 괴롭힌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의 길은 번성하고 성공하여 편히 살기만 하는가?"(에레 12,1). 성경의 대답은 단순하고 단호합니다. "악인들이 풀처럼 돋아나고 꽃피듯 피어나더라도 그것은 영영 멸망하기 위함이다"(시편 92,8), 당장은 악이 승리하는 듯 보여도 오래 가지 못합니 다. 악인들은 풀과 같고 의인들은 나무와 같습니다. 풀과 달리 나무가 자라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불의의 기세에 놀라지도 눌리지도 맙시다.
5. 이참에 세상을 치명적으로 병들게 만드는 사회적 현상 하나를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종교가 공정을 외면하고 정의구현이라는 본연의 직무를 팽개치는 태만입니다. 공정은 지상에 구현되어야 하는 하늘의 명령이고, 정의는 그것을 바르고 의롭게 펼치는 사람의 도리입니다. 7,80년대 교회가 그나마 떳떳하고 듬직했던 것은 공정의 집행인 정의를 최소한의 애덕으로 여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대붕괴의 시대'를 맞이한 오늘, 교회마저 세상의 슬픔과 번뇌를 외면한다면 사람들이 서러운 눈물을 어디서 닦겠습니까? 우리부터 사제단을 결성하던 때의 순수하고 절실했던 초심으로 돌아가겠습니다.
6. 투쟁은 쉽고 건설은 어렵습니다. 저항은 쉬우나 참여와 창조는 힘이 듭니다. 밤낮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는 데 일로매진하는 검찰독재의 등장은 민주화 이후 우리가 무엇을 고쳐서 무엇을 창조해 나갈 것인지, 그리하여 어떤 나라를 이룩할 것인지 그 목표와 의지가 흐릿해지면서 벌어진 변칙 사태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갈 길이 어느 쪽인지 정해야 합니다. 너도나도 하나에서 나온 '한생명'이니 살림도 '한살림'이어야 합니다. 저만 알아 저만 살려는 각자위심, 각자도생은 그 누구에게도 안전한 미래가 아닙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사이의 불신과 미움을 포용과 이해로 바꿉시다. 너와 나의 뜨거운 사랑을 상생의 에너지로 바꾸기만 하면 얼마든지 쳐낼 것을 쳐내고, 버릴 것은 태워서 거룩한 선열들이 꿈꾸던 나라를 향해 전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 기묘하게 일하시는
하느님께 찬미와 찬송을 드리며
2024년 9월 23일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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