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장수
퇴임 이후 더 빛난 대통령으로 기록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각) 100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카터는 2023년 2월 이후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돌봄을 받아온 고향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고 그의 가족이 밝혔다. 아들 칩 카터는 “아버지는 나뿐 아니라 평화, 인권, 사심 없는 사랑을 믿는 사람들 모두의 영웅이었다”고 성명을 통해 밝혔다.
카터는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장수했다. 정치적으로는 4년 단임(1977~1981년)에 그치면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불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악관을 나온 이후 중동과 한반도 등의 평화 문제에 적극 나섰다. 자원봉사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세계 평화를 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고 퇴임 이후가 더 빛난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카터는 1924년 조지아주의 시골 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 졸업 뒤 당시 개발이 본격화된 핵잠수함 분야에 배치돼 촉망 받는 장교였다. 그러나 1953년 땅콩 농장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군복을 벗고 가업을 물려받았다.
카터는 1960년대에 들어 조지아주 등 남부를 중심으로 흑인들의 권리를 위한 민권운동의 바람이 부는 가운데 흑백 통합을 주장하며 1962년에 조지아주 상원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에 입문했다. 1970년에는 조지아 주지사로 당선됐다. 이어 전국적 지명도가 높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당 후보로 대권에 도전해 1976년 선거에서 승리해 제39대 미국 대통령이 됐다.
선거 상대인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그늘에서 못 벗어난 것도 그의 승리에 기여했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부통령이었던 포드는 닉슨이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사임하자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는데, 이후 닉슨을 사면해준 게 여론의 반발을 불렀다.
카터는 재임기에 높은 물가와 이를 잡기 위한 고금리 정책 등의 탓에 인기가 높은 대통령이 아니었다. 특히 대선이 있던 해인 1980년에 발생한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 구출 실패 사건이 결정적으로 재선 행보의 발목을 잡았다. 이란 학생들은 1979년 11월에 미국대사관에서 직원들과 그 가족 등 90명을 인질로 잡았는데, 1980년 4월에 이들을 구출하려는 ‘독수리 발톱 작전’ 과정에서 헬리콥터와 수송기가 충돌해 미군 특공대원 8명이 숨졌다.
카터는 같은 해 11월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했다. 외교에서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카터는 재임 때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을 이유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는 등 박정희 정권과 대립하기도 했다.
카터는 퇴임 뒤 아내 로잘린과 함께 ‘사랑의 집 짓기’ 운동에 참여하는 등 봉사와 평화 정착 활동에 나섰다.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한 1994년에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그와 김 주석은 미국이 제재 추진을 중단하면 북한도 핵개발을 동결한다는 합의를 했고, 전쟁 발발 가능성까지 거론될 정도이던 한반도 긴장이 완화됐다. 이는 그해 10월 북·미가 제네바합의에 이르는 데도 기여했다. 또 카터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2개 국가 해법’ 실현을 위해 나서는 등 중동 평화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카터는 재임 때인 197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 협정(캠프데이비드협정)을 중재하고 퇴임 뒤에도 세계 곳곳의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카터는 말년에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을 걱정하기도 했다. 10월1일에 만 100살이 된 그는 8월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투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손자를 통해 밝혔다. 그는 생일 직후 사전투표를 했지만 해리스는 낙선했다.
카터의 동향인으로 그와 77년간 결혼 생활을 한 아내 로잘린은 지난해 11월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집에서 먼저 세상을 떠났다. <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
‘별세’ 지미 카터 전 대통령…냉전 승리와 미국 혁신 기반 만들어
퇴임 뒤 빛을 발한 전직 대통령 롤 모델
‘유약해 보였으나 가장 강한 대통령’
진보적 가치와 독실한 기독교 신념이 대중에 호소
퇴임 뒤에는 평화봉사로 존경받아
‘재임 때보다는 퇴임 뒤에 빛을 발한 대통령’
29일 100살을 일기로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흔히 퇴임 대통령의 ‘롤 모델’로 평가받는다. 그가 퇴임 뒤 펼친 분쟁 해소를 위한 평화 활동 및 지역 봉사 때문만은 아니다. 혹평을 받았던 재임 시절의 정책도 시간이 갈수록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1977년부터 81년까지 카터의 재임 동안 경제불황, 석유 위기,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사태 등으로 미국의 위상과 지위는 바닥을 쳤다. 이런 ‘미국의 위기’시기에 카터는 인권 외교와 도덕 정치만을 앞세운 ‘유약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정책과 대응은 미국을 혁신하고, 소련 붕괴의 씨를 뿌려 냉전에서 미국을 승자로 만든 기반을 조성했다는 평가를 뒤늦게 받고 있다. 이는 퇴임 뒤 그가 펼친 헌신적인 평화 및 봉사 활동과 맞물려, 가장 성공적인 전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조지아 플레인즈의 땅콩 농장 집안에서 1924년에 태어난 카터는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복음교단인 남침례교의 독실한 신자로 성장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잠수함 장교로 근무했다. 부친이 숨지자 퇴역해 가업을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빚과 형제 사이의 재산분할로 카터는 거의 물려받은 것이 없었지만 땅콩 농장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고향에서 땅콩 농장을 경영하던 1950~60년대, 미국 남부에는 민권운동이 몰아쳤다. 보수적인 고향 분위기에도 그의 양심적인 기독교 신앙은 흑백분리 반대와 민권운동 찬성으로 그를 이끌었고, 이는 그가 정계로 나가는 동기가 됐다.
그는 1963년 조지아 주의회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데 이어, 1970년에는 주지사로도 선출됐다. 카터는 민주당 주지사 후보 경선에서 소수인종을 위한 ‘어퍼머티브 액션’(배려 정책)에 기반한 흑백분리 반대를 내걸고, 현직 주지사를 물리쳤다. 그가 주지사로 재직하던 1970년대 전반은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전 후유증으로 정치권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실망이 절정에 오를 때였다.
무명의 시골 주지사였던 카터는 1975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자 출사표를 던지며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그는 참신했고 신뢰할 수 있는 경력이 있었고 그가 내세운 ‘인권과 도덕’은 좌우를 넘어 호소력을 발휘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 해군 장교, 땅콩 농장 경영주, 민권운동 정치인이란 경력을 가진 카터는 도덕성이 실추한 기존 정치권을 질타하는 ‘도덕과 인권’ 가치를 내세워, 진보와 보수 양 진영 유권자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진보적인 가치를 설파하는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 카터는 기독교 우파 세력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아냈다. 이에 힘입어 카터는 닉슨 사임 뒤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를 간발의 차로 누르고 1976년 당선됐다.
취임 뒤 그는 대외정책에서 인권 외교 및 분쟁 해소를 내세웠다. 친미 동맹국들의 인권탄압에도 강경하게 대처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당시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압력을 가했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주한미군 철수 공약까지 내걸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미 군부 내의 강경한 반대로 백지화됐으나, 카터의 압박은 유신체제 붕괴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중동에서 최대 친미 동맹국이었던 이란의 팔레비 국왕 체제에도 압력을 가해, 반정부 세력이 활성화됐다. 이는 1979년 팔레비 왕조를 타도한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과격파 학생들이 테헤란에 있는 주 이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해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삼는 사태로 이어져 카터의 재선을 무산시킨 부메랑이 되기도 했다.
재임 시절 카터는 대외정책에서 굴직한 치적들을 남겼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역사적인 평화조약인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중재했고,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인 파나마 운하를 반환했으며,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2(SALT2)를 타결지었다. 하지만, 오일쇼크에 이은 스태그플레이션이 지속되다가 임기 후반기에 들어서는 1979년 이란이슬람혁명으로 2차 오일쇼크가 엄습했다.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위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이 겹치며 지지율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특히,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위기와 구출작전의 실패는 재선을 앞둔 카터에게 치명적 타격이 됐다.
1980년 대선에서 카터는 강한 미국을 주장한 공화당의 보수파 로널드 레이건에게 대부분의 주에서 패배해, 압도적인 선거인단 표차로 참패했다. 공화당과 보수파들은 인권과 도덕이라는 이상주의만 내세운 카터가 소련 등 경쟁국에 무른 대응을 해서 미국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고 공격했고, 이런 평가는 공식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그의 국내외 정책은 미국을 혁신하고 냉전에서 승리하게 한 원동력으로 재평가받는다.
우선, 그는 소련의 인권문제와 관련해,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의 반체제 세력을 후원하는 정책을 강력히 밀어붙여 1980년대 후반 소련 및 사회주의권 붕괴의 씨앗을 뿌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맞서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을 주도하고, 소련을 아프간 수렁에 빠뜨린 무자헤딘 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보수파 및 군비확산론자들이 반대하던 전략무기제한협상2를 타결해, 방만한 미 국방비를 줄이면서도 군비 현대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는 미국이 1980년대 레이건 시절 소련을 압도하는 군사력 우위를 구축하는 바탕이 됐다.
1960년대부터 미국 대통령과 대외정책을 지켜보며 중앙정보국장 및 국방장관을 역임한 공화당 계열의 로버트 게이츠는 가장 유약하다고 평가받은 카터가 사실은 소련 붕괴의 씨앗을 뿌린 가장 강경한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카터 행정부의 선전과 비밀공작이 궁극적으로 소련 붕괴를 가져온 체제 균열을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또, 게이츠는 카터 시절에 린든 존슨 행정부 시절부터 추진해온 국방 현대화와 전략무기 세대교체가 본격적 결실을 맺었다고 강조했다. 오일 쇼크에 대처하기 위한 연비 효율화 및 대체에너지 개발 등도 카터 때 시작됐다. 이 모든 정책은 소련을 압도하는 미국의 경쟁력으로 나타났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유례없는 참패로 재선에 실패한 카터는 대중들에게 잊혔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정력적인 사회활동으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그는 1982년 카터센터를 세워 인권 신장에 나섰고, 세계 각국을 돌면서 평화협상, 선거감시, 질병퇴치 등의 활동을 이끌었다. 특히, 현재 활발한 국제적인 선거감시 활동도 그에 힘입었다.
1994년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폭격을 을러대던 1차 한반도 북핵위기 때 대담하게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통해 북-미 협상과 남북정상회담을 중재한 것도 퇴임 뒤 그의 대표적인 평화협상 행보로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 인권 보장을 주장하고 이스라엘의 평화협상 파기를 일관되게 비난해, 미국 보수파들의 공적이 됐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2002년 그는 이런 활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노숙인들과 무주택자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은 그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80살이 넘은 그가 망치를 잡고 집을 짓는 모습은 전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줬다. 그는 집짓기 노동으로 몇번이나 낙상해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 한겨레 정의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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