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파괴 극단주의엔 국가가 적극 개입해야
민주주의 방어논리 약해지면 극우 언제든 부활
압도적 우세 보이지 못한 지선이 던지는 경고
민주공화정에 대한 철학적·제도적 인식 불충분
정권 획득 넘어 시민참여, 사회규범으로 다져야

 

2024년 12월 국회의사당 앞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 집회에 모인 시민들의 모습. 
 

2026년 2월 독일에서 열린 뮌헨안보회의는 세계가 이미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자리였습니다. 올해 포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표현은 ‘under destruction(파괴되고 있는)’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 80여 년간 유지되어 온 국제질서, 즉 국제연합(United Nations)을 중심으로 한 국제협력 체제와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을 근간으로 유지되어 온 국제규범 질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국제사회 지도자들의 입에서 공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Reuters, 2026.2.15 / Financial Times, 2026.2.16).

 

회의 전체를 지배한 분위기는 매우 냉혹했습니다. 협력의 시대는 빠르게 저물고 있었습니다. 규범과 질서, 타협과 협상을 통해 갈등을 조정하던 시대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미국 중심의 1극 체제는 흔들리고 있었고, 국제사회는 각국이 자국의 생존과 이익을 우선하는 다극체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진단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세계는 이제 공존보다 거래가 우선되는 시대로, 협력보다 각자도생이 강조되는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 주요 국가의 외교·안보 책임자들 스스로 인정한 셈입니다(Politico Europe, 2026.2.15).

 

문제는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가 외교와 안보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국제규범과 협력의 질서가 흔들릴수록 민주주의와 인권, 공동체 가치 역시 함께 위협받기 시작합니다. 특히 경제 불안과 정치적 혼란이 심화될수록 극우세력은 빠르게 성장합니다. 미국의 MAGA 세력을 비롯해 유럽과 남미, 아시아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닙니다. 극우는 언제나 불안과 공포를 먹고 성장합니다. 그리고 차별과 혐오를 조직하고, 조롱과 음모론을 확산시키며 공동체의 규범과 공공성을 잠식합니다.

 

오늘날 한국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한국 극우는 2000년대 초반 ‘뉴라이트(New Right)’라는 이름 아래 전국적 조직체계를 갖춘 이후 보수·극우정권 형성의 핵심 기반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이들은 식민지근대화론과 시장근본주의, 강한 반공주의를 결합하며 기존 보수세력을 더욱 우경화시켰고, 이후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 윤석열정부를 거치며 정치·언론·종교·온라인 플랫폼 영역 전반으로 영향력을 확대해왔습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과 기무사가 주도한 댓글공작과 온라인 여론조작 구조는 오늘날 한국 극우 생태계 형성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극우세력은 유튜브와 온라인 커뮤니티, 일부 종교세력과 결합하며 거대한 정치 생태계로 성장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MAGA 세력과 사실상 수직계열화되며 중국 혐오와 선거 음모론, 혐오정치를 본격적으로 유통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극우는 혐오와 음모론, 조롱과 공포를 플랫폼 알고리즘 안에서 끊임없이 증폭시키며 대중의 감정을 조직하는 새로운 정치기술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번 6·3 지방선거 역시 이러한 현실을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중국이 선거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과 부정선거 선동은 선거기간 내내 반복되었고, 혐오와 조롱은 정치적 동원 수단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국 시민사회는 윤석열의 12·3 내란을 가까스로 저지했고, 이재명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

 

현재 한국은 내란세력 청산과 민주공화정 회복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실제로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후 코스피 9000선 돌파와 사상 최대 무역수지 기록, 비교적 안정적인 외교 성과와 실용 중심 정책을 바탕으로 전국 단위 국정지지율 60%를 상회하는 강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진영은 압도적 우위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서울시장 선거를 근소한 차이로 내주었고, 경남지사 선거 역시 아쉽게 놓쳤습니다. 한때 앞서가던 대구시장 선거도 끝내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평택을 선거에서는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협력 대신 상호 비방 속에 선거를 치르며 결과적으로 국민의힘 후보 당선을 허용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왜 내란을 극복하고 높은 국정지지율과 경제성과를 확보한 정부 아래에서도 민주진영은 정치적 헤게모니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극우는 반복해서 재조직되고 공론장을 잠식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민주공화정의 토대를 허물려는 극우세력으로부터 민주공화정의 가치와 제도를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 것일까요. 협력과 공존, 공동체 가치와 시민정신은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어렵게 발전시켜온 정치적 자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도적으로 구현된 형태가 민주공화정입니다. 민주공화정은 시민들이 서로를 시민으로 존중하며 공공성과 사회규범을 유지하고, 권력을 감시하며, 혐오와 차별이 공동체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막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공존 질서입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민주공화정이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대한민국 안에서 근본적으로 도전받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민주공화정을 선언하는 일이 아닙니다. 극우의 공격으로부터 민주공화정의 가치와 제도를 실제 사회규범과 제도 속에 뿌리내리고, 시민의 힘으로 그것을 지켜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이 칼럼은 바로 그 문제를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보려는 시도입니다.

 

■ 왜 민주진영은 압도적 승리를 만들지 못했는가

 

이번 6·3 지방선거는 여러모로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는 기묘한 선거였습니다. 숫자만 놓고 보면 민주진영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거의 내용과 결과를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결코 가볍게 넘기기 어려운 장면들이 곳곳에서 드러났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는 매우 특수한 정치적 조건 속에서 치러졌습니다. 한국 시민사회는 불과 1년 전 윤석열의 12·3 내란을 가까스로 저지했습니다. 내란세력 청산과 민주공화정 회복은 국민적 과제가 되었고, 시민들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위기와 중요성을 다시 절실하게 경험했습니다. 이후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안정적인 외교 성과와 실용 중심 정책, 경제 회복 흐름을 바탕으로 높은 국정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코스피 8000선 돌파와 사상 최대 무역수지 흑자 기록은 한국 경제가 다시 안정과 성장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한 상징적 장면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최근 한국은 경제·외교·국방·문화 전반에서 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주요 외신들 역시 윤석열 내란 사태 이후 짧은 시간 안에 국가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복원해낸 한국 사회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는 한국 민주주의가 “심각한 정치위기를 제도적으로 흡수해낸 보기 드문 사례”라고 평가했으며(Financial Times, 2026.5.18),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 역시 한국이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경제·기술·문화 경쟁력을 드러내며 민주주의 회복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The Washington Post, 2026.5.22). 반면 국민의힘은 내란세력과 명확히 결별하지 못했습니다. 윤어게인 세력과의 모호한 공존 속에서 극우와 거리두기에 실패했고, 선거기간 내내 중국 음모론과 부정선거 프레임, 혐오정치에 의존하는 모습을 반복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민주진영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도 이상하지 않은 선거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선거 결과는 기대와 판이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번 선거 결과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민주개혁세력 내부의 이완된 분위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차기 권력을 둘러싼 경쟁과 계파적 이해관계, 몸 사리기식 선거 캠페인, 장기적 민주개혁 비전의 부재, 민주진영 전체를 아우르는 연대 유지의 실패 등을 우려하는 평가가 나옵니다. 특히 평택을 선거는 이러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시민들이 기대했던 것은 내란 청산과 민주개혁의 연대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선거판은 민주진영 내부 경쟁과 상호 비방으로 흐르며 본래의 정치 의제를 약화시켰습니다. 타 지역에 비해 낮은 투표율 역시 이러한 시민들의 피로감과 실망을 반영합니다. 그 틈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은 국민의힘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선거전략 실패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입니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단순한 지지율 문제가 아닙니다. 내란을 극복하고도, 높은 국정지지율과 경제성과를 확보하고도 민주진영이 압도적 정치 지형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민주공화정의 사회적·제도적 토대 자체가 여전히 취약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민주개혁세력이 오랜 시간 ‘생존 중심 정치’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가능합니다. 물론 민주당계 정치세력의 역사적 공헌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군부독재와 국가폭력, 지역주의와 색깔론, 검찰권력과 보수언론 카르텔 속에서도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축적했습니다.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 문재인정부를 거쳐 결국 이재명 정부까지 네 차례의 민주정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은 분명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성취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민주공화정에 대한 철학적·제도적 인식은 충분히 깊어지지 못했습니다. 민주공화정은 단순히 선거를 통해 정권을 획득하는 체제가 아닙니다. 시민주권과 권력 견제, 공공성과 사회규범, 시민참여와 숙의민주주의를 끊임없이 제도화해가는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특히 혐오와 차별, 극단주의와 권위주의가 공동체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민주주의 스스로를 방어하는 구조까지 포함합니다. 민주공화정은 선거의 승리가 아니라 시민공동체의 자기방어 체제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서 민주공화정은 종종 ‘정권 획득’의 문제로 축소되어왔습니다. 독재와 싸워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시민참여와 사회규범, 권력기관 개혁과 민주주의 자기방어 체계로 끝까지 제도화하는 데는 반복적으로 실패해온 것입니다.

 

민주공화정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시민의 참여와 감시, 공론과 연대가 멈추는 순간 민주주의 역시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촛불혁명 이후였습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혁명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민적 성취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수백만 시민이 광장을 지켰고,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시민 스스로 지켜냈습니다. 문재인 정부 역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복지 확대, 검찰개혁 논의의 본격화 등 일정한 역사적 성과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촛불혁명이 요구했던 구조개혁은 끝내 완결되지 못했습니다.

 

촛불은 광장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권력기관 개혁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은 반복적으로 지체되었습니다. 권력기관 구조개혁 역시 부분적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국민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반민주 세력의 구조적 문제를 끝까지 도려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윤석열 검찰권력의 집권이라는 역설적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개혁은 멈췄습니다.

 

극우는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극우세력은 조직을 재정비했습니다. 플랫폼 알고리즘과 혐오정치, 음모론과 감정동원을 결합하며 민주주의의 공론장 자체를 잠식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일부 정치세력 내부에 존재했던 안이한 현실 인식이었습니다. 검찰과 사법권력, 보수언론과 극우세력을 구조개혁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일정 수준 관리와 통제를 통해 공존할 수 있다는 인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민주공화정은 권력기관의 자율적 절제를 기대하는 체제가 아닙니다. 시민주권 아래 권력을 구조적으로 제한하고 감시하는 체제입니다. 그러한 민주공화정에 대한 철학적 인식과 실천 의지가 충분히 강고하지 못했던 결과가 결국 윤석열 검찰권력과 극우세력의 재등장을 허용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 바로 천주교정의평화연대의 성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번 6·3 지방선거 직후 발표한 성명서 「민주당 지도부는 답하라 — 왜 내란 의혹 핵심 인물들을 기소하지 못하게 방치했는가」(천주교정의평화연대, 2026.6.4)에서 민주당 지도부를 향해 다음과 같이 직격했습니다. “개혁은 느리면 실패한다. 정의는 지연되면 조롱당한다.”그리고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민주주의를 파괴한 세력에게 시간을 주면 그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직을 정비하고, 얼굴을 바꾸고, 다시 권력을 향해 돌아온다.”이 성명이 던지는 경고는 분명합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면 언제든 다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여러 차례 민주개혁의 기회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개혁은 반복적으로 지체되었습니다. 그 사이 극우세력은 다시 조직되었고, 민주주의는 내부에서 잠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역사는 반복되어왔습니다. 김대중 정부도, 노무현 정부도, 문재인 정부도 ‘국민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반민주 세력의 구조적 뿌리를 끝까지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검찰권력과 극우정치, 보수언론 카르텔은 반복적으로 부활했고, 결국 윤석열 정권과 12·3 내란이라는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공화정의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권력의지는 정치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문제는 그 권력의지가 무엇을 지향하는가입니다. 민주공화정에 대한 철학적 인식과 제도적 실천 의지가 분명하다면, 권력의지는 시민주권 확대와 권력분산, 당원민주주의 강화와 참여민주주의 확대 방향으로 이어져야 합니다.특히 민주공화정에 대한 의지는 당원민주주의를 대하는 태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시민과 당원의 참여를 확대하고 공론과 숙의를 강화하려는 노력 없이 민주공화정을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권력의지가 시민주권 확대와 참여민주주의 강화로 이어질 때 그것은 민주공화정의 힘이 됩니다. 그러나 공적 가치보다 권력 재편 경쟁이 우선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쉽게 계파정치와 붕당정치로 추락하게 됩니다.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파당정치가 강화될 경우 시민주권과 공공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이 복잡해질수록 민주공화정에 대한 더 투철한 인식과 제도화 노력이 요구됩니다. 국제질서가 흔들리고 경제 불안과 극우 포퓰리즘이 확산될수록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방어할 제도적 구조를 더욱 강하게 요구받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선거제도 개혁 역시 민주공화정의 중요한 과제로 등장합니다. 민주공화정이 단순 다수결 체제가 아니라 공존과 숙의의 질서라면, 선거제도 역시 극단적 적대정치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재설계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승자독식 구조는 극단적 진영대결을 반복적으로 강화하고 있습니다. 정치세력은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지지층을 극단적으로 결집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습니다. 혐오와 공포, 음모론 정치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유럽 여러 국가들이 결선투표제를 유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선거의 경우 결선투표를 통해 과반의 사회적 동의를 확보하도록 강제하고 있습니다. 이는 극단주의 세력의 일방적 집권을 억제하는 민주공화정의 안전장치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BBC, 2025.7.8 / Le Monde, 2025.7.9).

 

특히 프랑스에서는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질 때마다 공화주의 연합이 결선투표 과정에서 형성되어 극단주의 확산을 억제해왔습니다. 민주공화정은 단순 승패의 체제가 아니라 사회적 공존을 유지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결선투표제는 단순한 선거기술이 아닙니다. 연합정치와 타협, 공론과 사회적 합의를 제도적으로 촉진하는 민주공화정의 장치에 가깝습니다. 비례대표 확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한국 정치는 지나치게 거대 양당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청년과 노동, 지역과 환경, 시민사회와 소수자의 다양한 요구가 실제 정치 구조 안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시민들은 정치를 거대한 진영 싸움처럼 인식하게 되고, 그 틈을 극우 포퓰리즘이 파고들게 됩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2018)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한다』(2023)를 통해 민주주의 붕괴는 군사쿠데타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민주주의는 극단주의 세력을 정상 정치세력처럼 방치하고, 제도개혁을 지연시키며, 정치엘리트들이 민주주의 자기방어를 포기할 때 내부로부터 서서히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는 단순한 정권 유지나 선거 승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민주공화정을 실질적 사회질서로 뿌리내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 시민들이 서로를 시민으로 존중하며 공공성과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다시 구축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방치될 때 가장 먼저 내부에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시민의 참여와 감시, 공론과 자기방어의 제도가 멈추는 순간 민주공화정 역시 언제든 다시 위기에 놓일 수 있습니다.

 

■ 민주공화정은 왜 스스로를 방어해야 하는가

 

— 뉴라이트, 인지전(認知戰), 그리고 전투적 민주주의의 시대

 

극우 문제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현실인식입니다. 왜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시민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민주화를 진척시켜왔음에도 민주공화정을 여전히 안정적으로 제도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극우는 반복해서 부활하는 것일까요. 왜 시민들은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냈지만 혐오와 차별, 음모론과 역사왜곡은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국제질서 변화와 한국 사회 내부 변화의 유기적 흐름을 충분히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를 뒤덮은 신자유주의 흐름은 한국 사회의 극우정치에도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냉전 시기 한국 극우의 핵심 기반은 반공주의였습니다. 군사독재와 국가주의, 반북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나 냉전이 붕괴하고 세계질서가 급격히 재편되면서 기존 극우세력 역시 새로운 언어와 전략이 필요해졌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극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극우는 시대의 언어를 바꾸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바로 뉴라이트(New Right)였습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등장한 뉴라이트는 스스로를 “합리적 보수”, “시장주의 개혁세력”, “선진화 세력”으로 포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핵심에는 여전히 냉전적 반공주의와 권위주의적 국가관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다만 표현 방식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기존 극우가 노골적인 국가주의와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뉴라이트는 여기에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와 친재벌 정책, 식민지근대화론과 역사수정주의를 결합했습니다. 노동과 복지, 공공성의 가치는 비효율과 반시장 논리로 공격받았고, 시장 경쟁과 효율 중심 질서는 절대적 가치처럼 제시되었습니다.

 

협력과 규범의 국제질서가 흔들릴수록 민주주의와 공동체 가치 역시 함께 위협받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뉴라이트의 세계관은 단순한 보수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가 축적해온 민주공화정의 역사적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시민공동체보다 시장과 경쟁, 자본의 논리를 우위에 두려는 흐름에 가까웠습니다. 이들에게 시민은 공동체의 주권자라기보다 경쟁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개별 단위에 가까웠습니다. 연대보다 경쟁, 공공성보다 효율, 시민주권보다 시장질서가 우선되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흐름은 한국 사회를 세계자본주의 질서 속 하위 생산기지와 시장체계에 더욱 깊게 편입시키려는 방향과 결합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민주공화정의 역사적 기반 역시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단순한 학술논쟁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법통, 항일독립운동과 민주공화정의 역사적 정당성 자체를 약화시키는 작업에 가까웠습니다. 5·18광주민주항쟁왜곡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극우세력은 민주주의 역사 자체를 흔들어야만 자신들의 권위주의 정치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이명박정부 시절을 거치며 훨씬 조직적 단계로 진입하게 됩니다.

 

특히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과 고 노무현대통령 서거 당시 폭발했던 시민사회의 집단적 애도와 분노는 보수권력 내부에 강한 위기의식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선거경쟁만으로는 시민사회의 민주주의 열망을 억누르기 어렵다고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시기부터 극우정치는 본격적인 ‘인지전(認知戰·cognitive warfare)’ 단계로 이동하게 됩니다. 인지전의 핵심은 정치 자체를 혐오와 조롱의 놀이문화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유튜브 플랫폼을 중심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희화화와 세월호 조롱, 여성혐오와 지역혐오, 중국혐오와 난민혐오 등이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치는 토론과 숙의의 공간이 아니라 분노와 조롱, 혐오를 빠르게 소비하는 감정시장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조롱과 혐오가 놀이가 되는 순간 시민은 더 이상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아니라 제거하고 비웃어도 되는 대상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공동체는 공존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를 의심하고 공격하는 생존경쟁 체제로 변해갑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러한 흐름이 미국 극우정치와 매우 유사한 경로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미국 MAGA 정치가 보여준 음모론 정치와 문화전쟁 전략은 빠르게 한국 극우정치 안으로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반PC주의와 부정선거 프레임, 언론 불신 선동 역시 같은 흐름 위에서 확산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이 시기부터 한국 극우세력이 미국 극우의 전략과 문법을 빠르게 학습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형성된 극우 문화는 극우 개신교 세력과 뉴라이트 세력, 보수언론 일부와 결합하며 훨씬 거대한 정치생태계로 성장하게 됩니다. 국정교과서 논란은 그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그리고 윤석열정부 시기 이러한 흐름은 훨씬 노골적 단계로 진입했습니다. 극우는 더 이상 거리의 구호만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교육과 역사, 플랫폼과 종교 영역 안으로 훨씬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리박스쿨 논란(2025)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리박스쿨은 뉴라이트 성향 역사교육 콘텐츠와 강연 등을 통해 청소년층에 극우 역사관을 조직적으로 확산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한겨레, 2025.8.12 / 경향신문, 2025.8.14). 단순한 역사교육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국가권력과 연결된 장기적 ‘극우 진지전’ 시도라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신호였습니다. 역사기관 장악 시도 역시 같은 흐름 위에 있었습니다. 윤석열 정부 시기 독립기념관과 국사편찬위원회 등 역사 관련 기관 인사를 둘러싸고 뉴라이트 편중 논란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습니다(오마이뉴스, 2025.9.3 / 한겨레, 2025.9.5).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하거나 왜곡하려는 시도가 반복되었다는 비판 역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관과 국가관으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정신 자체를 압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윤석열의 내란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극우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극우세력의 전면적 제도화 시도는 제동이 걸렸지만, 그들은 잠시 청와대와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을 뿐입니다. 여전히 온라인과 종교, 플랫폼과 지역조직 속에 기반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조직과 네트워크, 플랫폼과 자금, 종교적 기반과 국제적 연결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특히 한국 극우와 미국 MAGA 세력의 연결은 여전히 매우 강고합니다.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모스 탄(1958– )이 한국에 들어와 극우 집회와 선동 활동을 벌인 사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뉴스민, 2026.5.29 / 한겨레, 2026.5.31). 한국 극우는 더 이상 단순한 국내 정치세력이 아닙니다. 글로벌 극우 네트워크와 연결된 국제적 정치현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승리감보다 훨씬 냉정한 현실인식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왜 일부 시민들이 이러한 극우적 감정정치에 쉽게 끌려가는가 하는 문제 역시 함께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기화된 경제 불안과 청년세대의 좌절, 고립감과 경쟁 피로, 플랫폼 중독과 인정 욕망의 확대는 사람들을 점점 더 감정적 정치에 취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혐오와 음모론, 단순한 적대 구도는 복잡한 현실에 지친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감정적 해방감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극우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현대사회 구조 위에서 함께 바라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까지 무제한 허용해야 하는가. 혐오와 차별, 역사왜곡과 내란선동, 음모론과 극단주의를 방관하는 것이 과연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20세기 유럽이 이미 보여주었습니다. 카를 뢰벤슈타인은 1930년대 나치의 집권 과정을 분석하며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에 대해 무기력하게 방관할 경우 결국 스스로 붕괴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이를 ‘전투적 민주주의(wehrhafte Demokratie)’라고 불렀습니다. 이 개념은 이후 독일 민주주의 질서의 핵심 원리가 됩니다.

 

독일은 나치 찬양과 홀로코스트 부정을 처벌하고, 극단주의 조직과 반헌법 세력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왔습니다. 혐오표현 제한과 반헌법 정당 해산 역시 민주주의 방어 원리로 제도화했습니다.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 공화주의는 단순한 다수결 체제가 아닙니다. 공화국의 가치와 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려는 극단주의에 대해서는 국가가 적극 개입할 수 있다는 인식 위에서 운영됩니다.

 

즉 민주공화정은 단순한 방관 체제가 아닙니다. 시민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방어하는 체제입니다. 한국 역시 이제 민주공화정을 스스로 방어할 제도적 원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도 무기력한 중립주의가 아닙니다. 민주공화정을 스스로 방어하려는 전투적 민주주의(wehrhafte Demokratie)의 원리입니다. 극우의 세계관은 공동체의 공존과 협력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혐오와 배제, 음모론과 권력독점을 통해 공동체 규범 자체를 파괴합니다. 결국 그 끝에는 시민주권이 아니라 특정 세력의 권력독점과 전제정치가 자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우에 대한 대응은 단순한 정당정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가 오랜 시간 쌓아온 공동체적 가치와 민주공화정의 유산을 지키는 문제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개혁 과제들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문제는 무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무엇이 필요한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계산과 기득권 논리, 눈치보기와 안이한 타협 속에서 개혁이 반복적으로 미뤄져왔을 뿐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막연한 경계심이 아닙니다. 민주공화정을 실질적으로 방어할 제도적 개혁입니다. 시민적 감시와 공론, 그리고 민주주의 자기방어의 원리가 흔들리는 순간 극우는 언제든 다시 권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다음의 마지막 글에서는 한국 민주공화정의 안착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개혁과제가 우리 눈 앞에 제시되고 있는지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 민들레 이병권 인문연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