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에는 나라를 지키려 했고,
오늘은 우리말을 지키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면우 곽종석 선생의 후손이
30년 가까이 이어 온 ‘우리말 독립운동’

 

남상락 자수 태극기, 한국독립운동인물사전

 

독립운동가 남상락 선생께서 손수 만드신 자수 태극기가 물결치는 광복절입니다. 올해로 광복 81돌을 맞았습니다. 81년 전 우리는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겼던 겨레가 다시 나라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광복절을 맞을 때마다 저는 한 가지 물음을 던져 보게 됩니다.

 

나라의 '광복'은 이루어졌는데 우리말의 '광복'도 이루어진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도 수많은 어려운 한자말과 외래어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정기관의 문서도, 학교의 배움말도, 언론의 기사도, 새로운 기술의 이름도 많은 사람에게 낯선 말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제는 생성형 인공지능까지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달라진 세상에서 만들어지고 퍼지는 말 가운데 우리말의 자리는 얼마나 든든하게 지켜지고 있을까요?

 

저는 그래서 오래 전부터 ‘우리말 독립’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우리말 독립'은 한자말이나 외래어를 모두 몰아내자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의 말과 문화를 닫아걸자는 것도 아닙니다. '토박이말'을 바탕으로 우리말을 튼튼하게 가꾸고, 필요한 말은 우리 힘으로 살펴 받아들이며, 우리 생각과 삶을 우리말로 당당하게 펼칠 수 있는 언어의 주권을 세우자는 뜻입니다. 저는 그 일을 서른 해 가까이 해 오고 있습니다.

 

면우 곽종석 선생상, 유림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공가의 후손, 교실에서 우리말 독립을 시작했습니다

 

저의 외증조부는 을사늑약 뒤 항일 의병을 일으키고 유림 독립운동인 파리장서 운동을 이끄셨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이십니다. 증조부께서도 일제강점기에 단발령과 창씨개명을 거부하시며 겨레의 자존을 지키며 사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선조들의 이야기는 제게 단순한 집안의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는 이 물음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아왔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 답을 조금씩 찾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어려워하는 까닭이 정말 아이들의 능력이 부족해서일까요? 혹시 교과서에 나오는 낯선 말 때문에 배우기도 전에 겁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교실에서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말을 옛날 교과서에서 썼던 쉬운 우리말로 풀어 주었습니다.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맞모금', '약분' 같은 낱말을 아이들이 그 말의 뜻과 생김새를 바로 떠올릴 수 있도록 '포유류'는 '젖을 빨리니' '젖빨이짐승', '양서류'는 '물에도 살고 뭍에도 사니' '물뭍짐승', '파충류'는 '기어 다니니' '길짐승', '대각선'은 '마주보는 금끼리 이은 금이니' '맞모금', '약분'은 '분모와 분자를 똑같이 줄이니' '맞줄임'과 같이 풀어 설명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말을 쉽게 바꾸었더니 생각이 살아났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말을 살리는 일은 말만 살리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구나. 그것이 제가 평생 해 온 우리말 운동의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문해력 위기는 어려운 한자말이나 외래어를 몰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쉬운 토박이말을 바탕으로 생각의 뼈대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제 굳은 믿음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30년을 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저는 서른 해 가까이 학교 안팎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토박이말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수업도 하고 강연도 하고 글도 써 왔습니다. 언론과 방송을 통해 우리말의 가치를 알렸고, 시민들과 함께 토박이말을 배우고 나누는 일도 이어 왔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의 책임자들, 국회의원과 지방의원, 도지사와 시장, 교육감, 정치인과 유명 방송인들에게도 수없이 제안하고 도움을 부탁드렸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많지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체감할 만큼의 응답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뜻을 같이해 주시는 교사와 학부모, 시민의 수도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임인 (사)토박이말바라기의 참모람(정회원) 수를 보면 그런 현실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때로는 가까운 분들에게서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남들처럼 승진 점수나 챙겨 교감·교장이나 되지, 왜 돈도 안 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데없는 일에 돈과 시간과 힘을 낭비하느냐?,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그림8)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이 현충사를 방문하고 찍은 기념 사진이다. 표준어사정위원회에는 서울 출신 26명, 경기 11명, 각 도 대표 36명 등 73명의 위원이 참여해 표준어의 어휘를 사정(司正)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가운데 검은 안경테 안경을 쓴 이가 민세 안재홍이다. 출처: 한글학회

 

영화 《말모이》에서 주인공 아버지가 주인공을 보고 "조선이 독립될 것 같으냐? 조선이란 나라가 없어진 지 삼십 년이다, 삼십 년! 삼십 년을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라는 대사가 떠올랐고 영화 속 인물들이 품었던 ‘이 일이 정말 가능하겠느냐’는 의심이 오늘날 제 주변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0년 가까이 했는데도 세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것일까요? 저는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30년을 했는데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둘 이유가 아니라, 아직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제가 혼자 바라는 것만으로는 우리말의 큰 흐름을 바꾸기 어렵습니다. 정치인과 학자, 교육자와 시민 가운데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많아도 이루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모습은 때로 캄캄한 어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또 한 걸음을 내딛고자 합니다.

 

독립운동에도 이름 없이 함께하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 독립운동가들 곁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자신의 형편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독립운동 자금을 보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내놓고, 독립운동가들을 도와주셨습니다.

 

토박이말바라기 누리집

 

우리말 운동에도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토박이말바라기에는 해마다 회비를 꼬박꼬박 내주시는 참모람(정회원)도 계시고 일이 있을 때 마다 돈 또는 물품으로 우리말 독립운동을 이어 갈 힘을 보태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도 않고 특별한 보상을 받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도움에 보답하는 길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차가운 외면 속에서도 우리말의 가치를 믿고 손을 잡아주시는 그분들의 마음에 보답하는 길은, 어떤 비바람이 불어도 뜻을 굽히지 않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임을 굳게 믿기 때문에 이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자연 환경운동'이 이룬 기적처럼, '말 환경운동'의 새길을 열어야 합니다

 

저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을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종 큰 임금님처럼 백성의 말을 살피고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지도자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힘들게 이룬 부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내놓으셨던 분들처럼 우리말의 앞날을 위해 마음과 재산을 내놓으시는 훌륭한 기업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젠가는 많은 국민께서 이 일의 가치를 알아주시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가능성을 환경운동에서 보고 있습니다.

 

환경운동이 그랬듯, 우리말 운동도 언젠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환경을 지키자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합니다. 쓰레기를 줄이고, 물과 공기를 지키고, 생태계를 보전해야 한다는 데 많은 국민께서 공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수십 년 전 환경운동이 처음 태동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먹고살기 바빠 죽겠는데 무슨 환경 타령이냐", "당장 공장 돌려 돈 버는 게 급하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밥 먹여 주느냐"며 차갑게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일찍부터 환경의 소중함을 깨달은 분들이 계셨고, 그분들과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이 하나둘 모였습니다. 학교에서는 환경교육이 이루어졌고, 법과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신문과 방송은 끊임없이 환경 문제를 알렸습니다. 기업도 환경을 중요한 과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환경운동은 우리 사회의 큰 흐름이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말 운동도 그렇게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말을 좀 편하게 쓰면 어떠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우리가 생각하고 배우고 서로의 느낌과 생각을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환경입니다. 자연환경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 애쓰듯이, 언어환경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우리말 환경 지킴이’로 키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저는 교육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토박이말을 배우고 익혀 마음껏 부려 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토박이말을 옛날에 쓰던 낡은 말로 여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쓸 수 있고, 새로운 생각을 담아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살아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토박이말을 잘 알고 부려 쓸 수 있게 된다면 그 아이들은 미래의 ‘우리말 환경 지킴이', '우리말 환경 운동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쓸모를 알고, 어려운 말을 만나면 왜 어려운지 묻고, 더 알맞고 쉬운 말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문해력의 한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해력은 어려운 낱말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을 듣고 읽어 뜻을 제대로 헤아리고, 자기 생각을 알맞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힘입니다.

 

앞으로 개정할 교육과정에는 누리과정부터 고등학교까지 넉넉하면서도 촘촘하게 토박이말을 어릴 때부터 즐겁게 배워 익혀 부려 쓸 수 있도록 성취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말의 바탕을 알고, 우리말로 생각하고, 우리말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우리말 도로 찾기-국립중앙박물관

 

글자는 지켜 왔지만, 말은 충분히 지키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되찾은 뒤 우리는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을 비롯해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우리 글자를 갖고 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글자는 말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릇을 잘 지키는 일만큼 그 안에 담긴 말의 삶을 돌보는 일도 중요합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말의 광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우리말의 민주화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행정과 교육과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여러 정책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겨레가 오랜 세월 이어 온 고유한 말, 토박이말을 가꾸고 살리는 정책은 어디에 있을까요?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정책과 운동이 있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언어환경을 건강하게 가꾸기 위한 사회적 노력은 충분할까요?

 

인공지능(AI) PG. 연합

 

이제는 이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습니다.

 

지은슬기(인공지능, AI) 시대, 우리말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무엇보다 지은슬기(인공지능, AI) 시대에는 이 문제가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아이들은 사람뿐 아니라 지은슬기(인공지능, AI)와도 말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은슬기(인공지능, AI)가 우리말의 뜻과 결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의 토박이말을 얼마나 풍부하게 알고 있는지도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저는 토박이말 자료와 옛말 자료를 살펴 지은슬기(인공지능, AI) 시대에 우리말의 바탕을 어떻게 넓혀 갈 수 있을지 연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낯선 외국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우리말로 그 뜻을 헤아리고 알맞은 이름을 찾아보는 일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은슬기(인공지능, AI)가 우리말을 가르치는 시대가 아니라, 우리도 지은슬기(인공지능, AI)에게 우리말의 깊이와 결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새로운 언어 주권입니다.

 

광복 81돌, 이제는 함께 걸을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저는 지난 서른 해 가까이 혼자 앞장서 온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혼자는 아니었습니다. 학교와 강연장에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신 분들이 계셨고, 글을 읽어 주신 독자들이 계셨습니다. 토박이말을 함께 배우고 쓰자며 손을 내밀어 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무엇보다 말 없이 회비를 내며 토박이말바라기를 지켜 주신 참모람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이 계셨기에 저는 지금도 이 길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광복 81돌을 맞아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나라를 되찾은 지 81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말의 광복도 함께 생각해 주십시오.

 

정치인들께는 토박이말 정책을 고민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교육자들께는 아이들의 배움 속에 토박이말의 자리를 넓혀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학자들께는 우리 토박이말의 가치를 더 깊이 연구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언론과 방송인들께는 쉬운 우리말을 쓰는 일이 얼마나 큰 사회적 힘을 갖는지 보여 주고 쉬운 토박이말을 바탕으로 한 말글 나눔을 일상화 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기업인들께는 돈이 되는 일만큼 다음 세대의 말과 문화를 위한 일도 가치 있다는 것을 살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는 하루에 한마디라도 토박이말을 더 살펴 써 보자고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서로 만나 힘과 슬기를 모을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일이 한 사람이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모이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광복은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나라를 되찾은 뒤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가꾸며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100년 전 독립운동가들께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으셨다면, 오늘 우리는 다음 세대가 살아갈 말의 터전을 가꾸어야 합니다.

 

​방탄소년단(BTS)의 월드투어 '아리랑' 지난 11일과 12일 독일 뮌헨 공연 모습 @빅히트뮤직 X(트위터)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문화에 열광하는 오늘, 그 문화의 가장 깊은 곳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써 온 말이 있습니다. 노래도, 드라마도, 영화도, 음식도, 이야기도 결국 말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 고유의 말인 토박이말을 문화의 바탕으로 다시 바라볼 때입니다. 먹고사는 일도 중요합니다. 돈을 버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음 세대가 어떤 말을 배우고, 어떤 말로 서로 생각을 나누며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을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우리 고유의 글자인 '한글'을 지키는 일만큼이나, 그 글자에 담기는 알맹이인 우리의 고유한 말인 '토박이말'을 지키는 일에 국가적 힘을 쏟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말을 쓰느냐가 내일 아이들이 살아갈 언어의 풍경을 만듭니다.

 

광복절에 태극기를 다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우리 토박이말 한마디를 더 살펴 써 보시면 어떨까요? 그리고 저와 같은 뜻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이제는 혼자 걷지 말고 함께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서른 해 가까이 걸어왔습니다. 아직 세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이 길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100년 전에는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고, 오늘은 우리말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을 함께 걸을 한 분 한 분을, 저는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 이창수 기자 >

 

이승만이 지워버릴 뻔한 귀한 한글 이름 ‘서울’

 

한성→ 경성→ 서울, 이름 변천사에 아롱진 사연들

조선 때부터 백성들은 한성 보다 서울 더 즐겨 써
80년 전 서울시 헌장, 미군정 법령으로 서울 확정
미국 유학파 김형민 초대 서울시장이 강력 주장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자유시→ 서울특별시
이승만 호 딴 우남시로 바꾸려다 반발 크자 철회
중국어 표기는 수교 이후 ‘汉城’에서 ‘首尔’로 변경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경성부(京城府)를 서울시라 칭하고 차(此)를 특별자유시로 함. 서울시의 관할 구역은 현 중구, 종로구, 동대문구, 성동구,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영등포구로 하되 금후 법률에 의하야 차를 변경함을 득(得)함.”

 

1946년 8월 10일 미군정장관 아처 린 러치 소장이 공표한 서울시 헌장의 제1조 조문이다. 미국의 도시자치 헌장을 본떠 만든 7장 58조의 서울시 헌장은 경성(京城)이란 수도 명칭을 서울로 바꾸고 경기도에서 분리해 도(道) 수준으로 승격시킨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는 그해 9월 18일 공표되고 10일 뒤부터 시행된 미군정 법령 제106호에 의해 확정됐다. 서울특별자유시가 서울특별시가 된 것은 지방자치법이 발효된 1949년 8월 15일이었다.

 

1946년 8월 10일 미군정청 관보에 실린 서울시 헌장 한글 공포문 표지(왼쪽)와 영문 공포문 본문 첫 장(오른쪽), (서울시)

 

서라벌 소부리 쇠벌… ‘서울’의 어원은 무엇일까

 

서울이란 이름이 공식화된 지 올해로 80주년을 맞았다. 훨씬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서울이라고 불렀으나 법령으로 정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어서 그때부터는 글로도 모두 서울이라고 썼다. 마을이나 도로에 한글 지명을 쓰는 경우는 있지만 도시명을 우리말로 지은 것은 서울이 유일하다.

 

사전적으로 ‘서울’은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첫 번째는 보통명사로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곳’이고, 두 번째는 고유명사로 ‘한강 하류에 위치한 면적 605㎢의 도시’를 가리킨다.

 

서울의 어원은 신라 수도 서라벌(徐羅伐·경주)에서 비롯됐다는 학설이 다수다. 소수설은 백제 수도 사비(泗沘·부여)를 일컫는 소부리(所夫里·소벌)나 후고구려(태봉) 수도 철원(鐵原)의 우리말 쇠벌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도성의 범위를 놓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논쟁을 벌이다가 눈 녹은 자리를 경계로 삼았다는 일화를 들어 ‘눈울타리’를 뜻하는 ‘설(눈)울’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일찍이 백제가 서울의 한강 남쪽에 위례성(慰禮城)을 쌓고 도읍을 삼았다가 고구려가 점령해 남평양성(南平壤城), 혹은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 불렀다. 통일신라 때는 한산주(漢山州)에 속한 한양군(漢陽郡)이었다. 고려에 들어와 양주(楊州)로 바뀐 뒤 문종 때인 1067년 남경(南京)으로 승격했다. 숙종은 비기(秘記) 예언에 따라 1104년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짓고 천도를 추진하기도 했다.

 

260년 전 서울 경계는 중랑천(동), 불광천(서), 한강(남), 북한산(북)

 

조선 태조 이성계는 개국 2년 만인 1394년 한양으로 천도했으니 올해로 정도(定都) 632주년이다. 왕자의 난을 거치며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환도했으나 1405년 태종이 다시 옮겨오면서 지금까지 수도의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자 2004년 헌법재판소는 관습헌법을 내세워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인왕산의 서울 성곽. 조선 태조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뒤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따라 도성을 쌓았으나 한성부 권역은 성밖 10리까지였다. (이희용 촬영)

 

한양 도성(한성)은 내사산(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 마루금을 따라 쌓았지만 한성부 구역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해서 도성 밖 10리까지였다. 지형에 따라 경계가 일정하지는 않아 동북쪽에는 ‘5리를 더했다’는 가오리(加五里)란 지명도 있다. 일설에는 미아리고개에서 장사 지내는 곡소리가 임금에게 들리지 않도록 5리를 더 가라고 했다고 한다. 1765년(영조 41년) 간행된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 따르면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불광천, 남쪽은 한강, 북쪽은 북한산까지를 경계로 삼고 벌채나 매장 등을 금했다.

 

1820년경 한양 도성과 주변의 모습을 그린 실측 지도 수선전도(首善全圖).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벼슬 이름은 판한성부사와 한성부윤을 거쳐 예종 때 한성판윤으로 개칭했다. 품계는 판서와 같은 정2품이었다. 조선 왕조 512년 동안 한성판윤이 2012대를 내려왔으니 평균 재임 기간은 3개월에 불과했다. 특히 고종 재위 43년간은 429명이나 됐다.

 

한성부 청사는 이조와 호조 사이 지금의 KT 광화문빌딩 자리에 있었다. 행정구역은 5부(部) 52방(坊)으로 구분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양주군 고양주면 일부(중곡동 일대)와 고양군 하도면 일부(수색 일대)가 각각 한성부 두모방과 연희방에 편입되고 5부가 5서(署)로 개편됐다.

 

1904년의 한성부 관아 정문. KT 광화문빌딩 자리에 있던 한성부는 조선 말기 들어 여러 군데를 전전했다. (서울역사박물관)

 

19세기 독립신문도 발행처를 서울로 표기

 

일반 백성은 공식 명칭인 한성보다 서울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덕무의 『앙엽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는 각각 ‘徐蔚(서울)’, ‘徐兀(서올)’, ‘徐鬱(서울)’로 표기했다. 서양인들도 서울로 불러 나라 밖에 그렇게 알려졌다.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은 국문판과 영문판에서 발행처를 각각 ‘조선 서울’과 ‘Seoul Korea’로 표기했다.

 

1896년 8월 27일 자 독립신문(62호) 한글판(위)과 영문판(아래). 발행처를 각각 ‘조선 서울’과 ‘Seoul Korea’로 표기했다. (독립기념관)

 

일제는 1910년 8월 27일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뒤 10월 1일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개칭하고 경기도 소속으로 격하시켰다. 성저십리 가운데 대부분을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시키고 일본인 거류지가 있는 용산 일대와 동대문·서대문·서소문 밖 일부만 경성부에 남겨놓았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5서는 5부로 환원되고 각 방은 동(洞)과 면(面)으로 바뀌었다. 일부 지역에는 통(通), 정(町), 정목(丁目) 등의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을 도입했다.

 

1936년 조선총독부가 대경성계획을 추진하면서 북쪽은 정릉천,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홍제천, 남쪽은 안양천과 대방천까지 경계가 늘어났다. 한강 이남의 영등포도 비로소 서울로 편입됐다. 1943년에는 구제(區制)를 실시해 7개구로 나누고 이듬해 마포구를 신설했다. 경성부 기관장은 초창기에 사무관급이었다가 1933년 이후 장관급으로 격상됐다. 18명 모두 일본인이었고 평균 재임 기간은 23개월이었다.

 

1930년대 경성(서울) 중심부 모습. 왼쪽의 경성부청(서울시청)에서 세종대로가 뻗어 있고 오른쪽 위에 지금은 철거되어 없는 조선총독부가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을지로 충무로 등 이름 붙인 2대 경성부윤 김형민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이뤄지자 금산 군수와 전남도청 관리를 역임한 김창영이 쓰지 게이고 경성부윤으로부터 업무를 인계받았다. 9월 9일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업무가 이원화됐다. 군정부윤은 제임스 킬러프 소령에 이어 제임스 윌슨 중령, 민정부윤은 총독부 관리 출신 이범승에 이어 김형민이 각각 맡았다. 각각 1대와 2대로 치지만 김창영을 초대 경성부윤으로 보기도 한다.

 

김창영과 이범승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수록된 인물인 반면 김형민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다.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와 미시간대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할 때 친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됐다. 해방 직후 3·1석유상사를 운영하다가 웨슬리언대 인맥으로 주한미군 사령관 존 하지 중장에게 발탁돼 경성부윤이 된 데 이어 1946년 9월 28일 서울특별자유시 초대 시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나이 39세로 최연소 기록이다.

 

광복 후 2대 경성부윤이자 초대 서울시장인 김형민. 최연소 서울시장인 그는 일본식 지명을 우리 식으로 바꾸고 서울시 이름을 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독립기념관)

 

김형민은 1946년 6월 30일 부임하면서 일제 잔재인 정, 통, 정목을 각각 동, 로(路), 가(街)로 바꾸면서 한국사의 위인 이름을 붙였다. 황금정통(黃金町通·고가네마치도리)은 을지로, 본정통(本町通·혼마치도리)은 충무로, 죽첨정(竹添町·다케조에초)은 충정로, 원정(元町·모토마치)은 원효로가 됐다.

 

미군정이 서울이란 이름을 정할 때도 김형민이 강력하게 서울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도 식자들은 한성 등 한자식 옛 명칭을 선호했다. 각계 인사 90명으로 구성된 경성부 고문회의는 “한성시라고 쓰고 서울시라고 읽는다”는 어정쩡한 결론을 냈다. 그러나 미군은 영문 표기 ‘Seoul’과 일치하는 서울을 선호해 미국 유학파인 김형민과 의견이 일치했다.

 

김형민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로도 넉 달 더 시장에 재직하다가 윤보선에게 물려줬다. 3·1석유상사로 돈을 벌어 대한극장도 세웠으나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낸 국쾌남에게 넘겼다. 1998년 5월 2일 별세해 고향인 전북 익산에 묻혔다가 2003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미군정청 주요 인사들. 왼쪽부터 민정장관 안재홍, 사령관 존 하지 중장, 부사령관 앨버트 브라운 소장, 김형민 서울시장, 고문 서재필. (국가기록원)

 

서울시 명칭까지 우남 이승만에게 바치려던 아첨꾼들

 

서울이란 명칭은 법제화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아 도마에 올랐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5년 9월 18일 개정을 제안하는 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서울이 수도를 일컫는 보통명사이지 땅 이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성 이름을 묻는 프랑스 선교사의 질문에 사람들이 서울이라고 답하자 프랑스 사람이 소리낼 수 있는 음을 취해 쓴 것이 외국에 잘못 알려졌으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뜨거운 논쟁이 펼쳐졌다. 이승만에게 아부하려는 권력 추종자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당대의 지식인들도 가세했다. 한글 전용론자인 최현배는 ‘큰 벌판’을 뜻하는 ‘한벌’을 제안했다. 국무위원과 정부위원 등으로 수도명칭제정연구위원회가 발족했고 서울시도 수도명칭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여론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이승만 호인 우남(雩南)이 1423표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한양 1117표, 한경(韓京) 631표, 한성 353표였다.

 

당시는 파고다공원(탑골공원)과 남산공원 등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지고 남산 정상의 팔각정과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건설 중이던 시민회관을 각각 우남정과 우남회관으로 명명하는 등 이승만 우상화가 한창일 때였다. 이승만시라고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1950년대 후반에 촬영한 서울 남산 정상의 팔각정. 우남정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수도 이름을 살아 있는 집권자의 호로 바꾸려는 시도는 거센 반발을 불렀다. 결국 이승만은 1957년 1월 20일 한도(韓都)가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하며 “내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서울의 이름을 우남특별시로 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여러 사람이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렇게 될 것(우남시로 바뀔 것)이니 그냥 둬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내가 강권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4·19혁명이 일어나 없던 일이 됐다.

 

서울대 총장 모시려다 한성대 총장 잘못 초청

 

80년 전 서울이란 명칭이 확정됐어도 한자 문화권에서는 한동안 옛 명칭대로 불렀다. 그래도 일본은 일찍부터 가타가나를 써서 ‘게이조(京城)’ 대신 ‘ソウル(소우루)’로 바꿔 부르고 있는 반면 중국은 늦게까지 ‘한청(汉城·漢城)’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서울과 한성을 다른 도시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한성상회와 서울상회를 구분하지 못하고 서울신문과 서울방송을 한성신문과 한성방송이라고 불렀다. 서울대 총장을 초청하려다가 한성대 총장에게 초대장이 잘못 가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인왕산 범바위에서 남산 쪽으로 내려다본 서울시 야경. 서울시는 세계인들이 가장 방문하고 싶은 도시의 하나가 됐다. (이희용 촬영)

 

정부는 1992년 한중 수교 직후부터 개선 방안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나와 좀처럼 결론을 내지 못했다. 2005년 1월에야 중국식 발음으로 ‘서우얼(Shouer)’인 ‘수이(首尔·首爾)’로 확정하고 중국과 대만 정부에 협조를 요청했다. 관공서나 공항 등을 시작으로 바꿔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기존 명칭대로 부르는 사례가 간혹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지형 특성을 반영하고 주요 관광명소를 시각화한 서울 일러스트 관광지도. (서울관광재단)

 

서울은 80년 전 이름이 법제화됐을 때보다 면적은 4배 이상, 인구는 10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1970년대 영동 지구 개발이 서울의 팽창을 가속화했다.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이란 의미였으나 1975년 성동구에서 떨어져나올 때 강남구로 명명되면서 차츰 사라지고 영동대교, 영동대로, 영동시장, 영동고등학교 등 일부에만 지명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서울의 구가 25개에 이른다.

 

서울의 발전은 외형적 성장에만 그치지 않았다. 1988년 올림픽 개최 이후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가 됐고 경제 성장, 민주 혁명, 한류 등으로 세계인이 가장 방문하고 싶어하는 도시의 하나가 됐다. 만일 그 이름이 서울이 아니라 우남이었어도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누릴 수 있었을까?                                                                                                < 이희용 기자 >

 

남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본 서울시 전경. 고층빌딩이 빼곡한 가운데 왼쪽부터 인왕산, 북악산, 낙산이 감싸고 있고 뒤로 북한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이희용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