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전쟁’ 피하겠다는 바이든의 ‘대북 신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4일 취임 뒤 처음으로 국무부 청사를 찾아 외교정책에 관한 연설을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4일 ‘정상 통화’와 관련한 백악관 발표문에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DPRK·디피아르케이)라는 이례적 표현이 쓰여 눈길을 끈다. ‘디피아르케이’는 북한의 공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문 약칭이다.
북-미 관계에서 미국 정부가 디피아르케이를 쓴 사례는 ‘제네바기본합의’(1994년 10월21일)가 처음이고,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의 정상회담 합의문인 ‘싱가포르 공동성명’(2018년 6월12일) 등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역대 미국 정부는 “North Korea”(북한)라고 부를 때가 많았고, 이따금 ‘깡패국가’ ‘악의 축’이란 비유적 표현을 쓰기도 했다.
북-미 관계는 ‘무시하려는 미국’을 상대로 한 북한의 처절한 인정투쟁의 역사인 까닭에, 북한은 미국 정부의 ‘말’에 아주 민감하다. ‘바이든 백악관’이 “두 정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관련해 긴밀하게 조율하기로 합의했다”며 ‘북한’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적은 게 범상치 않은 이유다. 세 문장짜리 발표문에 북한을 공격·비난하는 표현은 없다.
지난달 28일 미-일 정상 통화와 관련한 백악관 발표문의 “complete denuclearization of the Koerean Peninsula”(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란 문구는 더 의미심장하다.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관련 문구와 똑같다. 역대 미국 정부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뜻하는 ‘시브이아이디’(CVID)를 사실상 공식 용어로 써온 데 비춰, ‘바이든 백악관’이 “완전한 비핵화”를 ‘일부러 골라’ 썼다고 볼 여지가 있다. ‘에이비티’(ABT·anything but Trump, 트럼프 정책은 빼고)를 지향하는 ‘바이든 백악관’이 민감한 외교 사안에서 ‘트럼프 용어’를 회피하지 않은 사실은 그 자체로 ‘대북 신호’로 볼 수 있다.
여러 전직 고위관계자는 5일 “매우 흥미롭고 주목할 만한 일”이라며 “가장 낮춰 봐도 대북정책 재검토가 끝날 때까진 ‘말의 전쟁’을 피하겠다는 정책 의지의 표현”이라고 짚었다. 이제훈 기자
바이든 “예멘 내전 개입 끝낼 것”… 외교 변화 신호탄
국무부서 대외정책 연설.. ‘친사우디-반이란’ 기조 선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4일 국무부 청사에서 외교정책에 관한 연설을 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4일(현지시각) 예멘 내전에 대한 지원과 독일 주둔 미군 철수를 중단시키는 것을 포함한 새 정부의 대외정책 청사진을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 우선주의’ 정책들을 파기하고 미국의 국제적 역할과 위상을 복원하는 내용들이 담겼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취임 이후 첫 부처 방문으로 이날 국무부를 찾아 대통령으로서 첫 대외정책 관련 연설을 했다. 그는 “내가 오늘 세계에 들려주고픈 메시지는 ‘미국이 돌아왔다. 외교가 우리 대외정책의 중심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라며, 세계 전역에 걸친 대외정책 기조를 설명했다. 취임사에서 언급했던 ‘동맹 회복’과 ‘세계 관여’의 내용을 구체화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특히 “예멘에서 전쟁은 끝나야만 한다”며 “우리의 약속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는 예멘 전쟁에서 관련 무기 판매를 포함한 공격적 작전들에 대한 미국의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동 전문가이자 외교관인 팀 렌더킹을 새로운 예멘 특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이는 국외 분쟁 개입과 관련된 기존의 미국 대외정책뿐 아니라 중동정책을 수정한다는 신호다. 예멘 내전 개입을 주도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재설정하겠다는 뜻이어서, 역으로 미국과 이란 관계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미국 등 서방은 이란의 후티 반군 지원을 예멘 내전 개입의 명분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사우디 주도 8개 아랍 수니파 국가 연합군은 2014년 예멘 내전이 일어난 뒤 정부군 편에서 후티 반군 진압작전을 벌이고 있으며, 미국·영국·프랑스가 이를 지원하고 있다. 사우디는 시아파 후티 반군이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미국도 중동 최대 동맹국인 사우디를 지원하는 한편 이란을 봉쇄하기 위해 예멘 내전 개입을 지원해왔다. 하지만 사우디가 후티 반군과 이란의 관계를 과장해 내전 개입을 정당화한다거나, 사우디의 개입이 후티 반군에 대한 이란의 지원을 촉발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중동 주둔 미군 감축 등을 진행하면서도 예멘 내전 개입은 축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트럼프는 취임한 뒤 사우디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반이란 정책을 격화시켜왔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시했던 독일 주둔 미군 철수도 중단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는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 전세계 미군의 태세에 대한 검토를 이끌 것”이라며 “검토가 진행되는 동안 독일로부터 어떤 병력의 철수도 중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트럼프 시절 해외 주둔 미군 감축을 지렛대 삼아 동맹을 금전거래의 대상으로 취급한 대표적 정책을 뒤집겠다는 의미다. 트럼프는 독일의 국방비 지출이 적다며 “채무 불이행”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해 비난했고, 지난해 7월 당시 3만6000명이던 주독 미군을 2만4000명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주독 미군 감축 계획을 독일에 미리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발표해 독일 등 유럽 우방들의 반발을 샀다. 주독 미군 감축 중단 결정은 바이든 대통령이 ‘동맹 회복’ 공약을 실천하는 가시적 조처로 볼 수 있다.
2만8500명 규모인 주한미군의 경우, 트럼프 행정부에서 감축 지시가 실제로 내려진 적은 없고, 이날 바이든 대통령도 주한미군을 언급하지 않았다. 트럼프 시절에는 방위비분담 협상과 연동해 주한미군 감축 카드를 꺼낼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바이든 정부에서 당장 주한미군 감축 카드가 되살아날 가능성은 줄었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다만 미군의 전세계 태세 검토 결과에 따라 장기적으로 주한미군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울러 미국의 난민 프로그램을 복원하기 위해 난민 수용 한도를 연간 12만5000명으로 상향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이 한도를 연간 1만5000명으로 줄인 바 있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는 공세적인 외교정책을 예고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의 번영과 안보, 민주적 가치의 가장 심각한 경쟁국인 중국의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할 것”이라며 “중국의 부당한 경제활동과 인권 유린, 지식재산권 침해 등에 공세적으로 반격을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와 관련해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선거 개입, 사이버 공격, 독살 등 러시아의 공격적 행동 앞에 미국이 나가떨어지는 시절은 끝났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며 트럼프 시절의 대러시아 저자세 외교에서 탈피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경시했던 국무부 외교관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발언도 잊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나는 여러분의 전문성을 소중히 여기고 여러분을 존중하며, 당신들의 뒤를 받쳐줄 것”이라며 “이 정부는 당신들을 겨누거나 정치화하는 게 아니라 당신들이 일할 수 있게 권한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정의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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