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렵으로 엄니 큰 코끼리 90% 솎아내자 암컷 절반에서 엄니 없어져

엄니 없는 코끼리 생존율 5배 높아…관련 유전자 2개 확인, 암컷에만 나타나

 

모잠비크 고롱고사 국립공원에서 엄니가 없는 무리의 우두머리인 암컷 코끼리가 두 마리의 새끼를 데리고 있다. AP/ 연합뉴스

 

인도와 동남아를 비롯해 지중해 일대의 고대 전쟁에서 상대를 짓밟고 공포에 빠뜨리기 위해 종종 지상 최대 동물인 코끼리를 동원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모잠비크 내전(1977∼1992)에선 코끼리가 또 다른 비극적 역할을 맡았다. 양쪽 모두 코끼리를 밀렵해 상아를 팔아 군비를 조달했고 고기를 먹었다.

 

15년 내전을 거치면서 이 나라 고롱고사 국립공원에 2500마리가 넘던 코끼리는 90%가 줄어 200마리만 남았다. 살아남은 코끼리 무리에도 이상한 조짐이 나타났다. 암컷의 절반 이상이 코끼리의 상징이자 중요한 기관인 엄니가 없는 상태로 태어났다. 보통 암컷 아프리카코끼리의 90%는 길고 멋진 엄니가 자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어쩌면 자명했다. 큰 엄니를 지닌 코끼리를 집중적으로 솎아내다 보니 엄니가 없는 개체가 늘어났다는 설명이 나왔다. 그러나 추정일 뿐 증거가 제시되지는 않았다.

 

프린스턴대 등 연구자들이 고롱고사 국립공원에서 엄니가 없는 코끼리를 마취해 유전자를 얻기 위해 시료를 채취하고 있다.

 

고롱고사 국립공원 코끼리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유전적으로 분석해 엄니 없는 코끼리가 늘어난 직접 증거를 밝힌 연구가 나왔다. 세인 캠벨-스태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등은 22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에서 “사람이 큰 엄니를 지닌 코끼리를 집중적으로 선택해 죽인 결과 엄니가 없는 코끼리가 급속히 진화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에서는 또 왜 엄니 없는 형질이 암컷 코끼리에게서만 나타나는지도 유전자 연구를 통해 밝혔다.

 

연구자들은 이 국립공원 코끼리에 관한 통계 분석과 수치 모델링을 통해 내전 기간 엄니가 없는 코끼리는 엄니가 있는 코끼리보다 5배나 생존율이 높았음을 밝혔다. 엄니 유무가 이 동물의 진화에 강한 선택 압력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연구에 참여한 브라이언 아널드 교수는 “엄니는 코끼리가 살아가는 데 아주 유용한 기관이지만 (내전과 함께) 갑자기 골칫거리가 됐다”며 “밀렵이 엄니가 큰 암컷에 집중되면서 엄니가 없는 암컷은 엄청난 경쟁 이점을 누리게 됐다”고 이 대학 보도자료에서 설명했다.

 

엄니 없는 코끼리를 낳는 돌연변이가 드물었지만 대규모 밀렵으로 갑자기 흔해졌다.

 

엄니가 없는 암컷 코끼리의 돌연변이는 그 전에도 드물지만 나타났다. 내전 이전 그런 암컷은 전체의 18.5%를 차지했다. 대규모 밀렵이 이 돌연변이를 흔하게 만들어 50.9%로 늘었다.

 

연구자들은 이런 변화를 초래한 근본 원인을 찾기 위해 엄니가 없는 코끼리와 있는 코끼리의 게놈(유전체) 염기를 해독해 엄니 형성과 관련한 유전자를 비교했다. 그 결과 포유류의 이빨 형성과 관련한 2개의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사실을 확인했다.

 

이와 함께 암컷에게서만 엄니가 없는 형질이 나타나는 이유도 발견했다. 이 유전자 가운데 하나가 여성 염색체인 엑스 염색체 위에 위치해 암컷을 통해서만 유전됐다. 이 유전자를 넘겨받은 수컷은 임신이 유지되지 못해 죽었다.

 

내전이 끝난 뒤 고롱고사 국립공원은 코끼리 복원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강력한 밀렵의 효과는 여러 세대가 지난 뒤에도 여전히 가시지 않아 현재도 암컷의 30%는 엄니가 없다.

 

엄니로 밀어 나무를 쓰러뜨리는 코끼리. 엄니는 먹이 확보뿐 아니라 사바나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야신 크리슈나파,

 

엄니는 코끼리뿐 아니라 아프리카 사바나 생태계에도 중요하다. 코끼리는 엄니로 땅을 파헤쳐 물구덩이를 내거나 미네랄을 찾고 큰 나무의 껍질을 벗겨 먹거나 구멍을 내고 송두리째 쓰러뜨리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코끼리는 숲이 들어서는 것을 막아 사바나 생태계를 유지하는 ‘생태계 엔지니어’ 노릇을 한다.

 

연구에 참여한 라이언 롱 미국 아이다호대 교수는 “엄니가 없는 코끼리는 엄니가 있는 코끼리와 다른 먹이를 먹는다는 보고가 있지만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아직 미스터리”라면서 “코끼리는 핵심종이어서 이들이 무얼 먹느냐에 따라 전체 경관이 달라진다. 엄니 없는 코끼리가 많으면 생태계 전반이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크리스 다리몽 캐나다 빅토리아대 교수는 ‘사이언스’에 실린 논평에서 “큰뿔산양 등 많은 동물에서 선택적 사냥이 유전적 변화를 일으키는지는 매우 논란이 많은 문제”라며 “이번 코끼리 연구는 그런 선택적 사냥이 어떤 유전적 결과를 빚는지 보여준 드문 성과”라고 평가했다.

 

주 저자인 캠벨-스태튼 교수는 “진화는 긴 과정이지만 지금 여기 진행 중이기도 하다며 코끼리 사례에서 인간은 진화를 추동하는 주역”이라고 연구결과를 소개하는 동영상에서 말했다. 조홍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