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신자유주의 노선 전환해

“거대한 변화” 만들어낼 수 있을까

 

페루 대통령 당선인 가브리엘 보리치가 19일 당선이 확정된 뒤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우리는 더는 가난한 사람들이 칠레 사회의 불평등의 대가를 치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산티아고/EPA 연합뉴스

 

학생운동가 출신의 35살 좌파 정치인 가브리엘 보리치가 19일 칠레 대통령에 당선됐다.

 

칠레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날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보리치 후보가 55.9%를 얻어 안토니오 카스트 후보(44.1%)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승리했다고 밝혔다. 극우를 대변하는 카스트 후보는 곧바로 패배를 인정하고 보리치에게 축하 전화를 건넸다. 당락이 확정되자, 수도 산티아고 등 여러 도시에서 많은 칠레인이 거리로 몰려나와 보리치의 승리를 축하하는 구호를 외치고 경적을 울리며 자축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 등 외신이 전했다.

 

칠레 역사상 최연소 당선자가 된 보리치는 내년 3월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의 후임으로 취임해 4년간 칠레를 이끈다. 보리치는 이날 승세가 굳어진 뒤 “나에게 투표했던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모든 칠레인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보리치는 1986년 남극을 마주하는 칠레 최남단 푼타아레나스에서 태어났다. 2004년 수도 산티아고로 옮겨와 칠레대학에 다니며 학생연맹을 이끌었다. 그는 2011년 무상교육 확대 등 교육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학생시위를 주도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2013년 고향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돼 본격 정계에 입문했으며, 2017년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 애초 ‘다크호스’ 정도로 여겨졌다. 대선 출마에 필요한 서명도 3만5천명을 겨우 채워 등록했다. 그러나 좌파연합 후보 선거에서 유명한 공산당의 다니엘 하두 산티아고 레콜레타 구청장을 꺾으며 유력 후보로 부상했다. 지난달 대선 1차 투표에서도 카스트에 2% 포인트 차이로 뒤져 2위로 결선에 올랐으나, 막판 승부를 뒤집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보리치의 승리는 2년 전 칠레 사회를 뒤흔든 대규모 불평등 시위의 연장선에 있다. 2019년 10월 정부가 지하철 요금을 전격 인상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는 곧바로 교육·의료 등 극심한 불평등을 낳는 사회체제 전반의 개혁에 대한 요구로 번졌다. 칠레는 2018년 기준 1인당 지디피(GDP·국내총생산)가 1만6천달러가 넘는 등 라틴아메리카에서 경제 모범국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지니계수는 0.46(2017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을 정도로 빈부격차가 심하다. 시민들은 시위 과정에서 과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정권(1973~1990년) 시절 도입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거부감을 쏟아냈고, 이는 피노체트 시절 제정된 헌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13일 이뤄진 마지막 토론에서 보리치 당선자는 부자 증세를 통한 국가의 역할 강화, 카스트 후보는 감세를 통한 기업의 성장과 일자리 창출 등 작은 정부를 내세웠다. 두 노선 사이의 경쟁에서 칠레인들이 택한 것은 보리치가 내세운 “우리 정부는 거대한 변화를 추진할 것이다, 한걸음씩, 누구도 빼놓지 않고”라는 구호였다. 보리치는 민영과 공영으로 양분된 의료보험의 단일화, 민간에 맡겨진 연금제도의 공영화, 기초연금제 도입, 부자 증세, 노동권 강화 및 주 40시간 근무제 도입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제 2년 전 칠레 시민이 제기한 개헌과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 요구는 보리치 대통령이 수행해야 할 필생의 과업이 됐다. 그는 이번 선거 유세에서 “칠레가 신자유주의의 요람이라면 이제 신자유주의의 무덤이 될 것”이라며 사회복지 시스템 건설과 증세, 정부 지출 증가 등을 약속했다. 당선이 확정된 뒤 첫 연설에선 “우리는 더는 가난한 사람들이 칠레 사회의 불평등의 대가를 치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박병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