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 한마당]
왜 아파들 하는가?
3.9 대선이 끝난 후에 한국 국내는 물론 해외에 사는 많은 동포들이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것 같다. 국적을 가지고 있어서 직접 투표를 한 ‘재외국민’은 말할 것도 없고, 투표권이 없는 한인들도 만나는 사람마다 깊은 한숨에 탄식들을 쏟아 놓는다. 왜 그렇게들 아파하는가?
선거가 워낙 치열한 접전이어서 다들 신경이 곤두선 승부였다. 차라리 표차가 컷다면 덜했을지도 모른다. 겨우 0.73%포인트 간발의 차는 그만큼 극적인 충격과 실망을 패자 측에 안겼을 수 있다.
하지만 아예 승자들 얼굴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는 사람들, 그들이 희희낙락하는 TV화면이나 유튜브, 뉴스도 보지않겠다고 꺼버린 사람들, 심지어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례가 없었던 후유증이고 트라우마다.
어차피 선거란 다수결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요, 단 1표로도 승부가 갈리고, 거기에 승복하는 게 민주주의의 원칙이며 아름다운 전통일진대, 패자가 즉시 승복선언을 했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심적 고통이 유례없이 강한 이유는 무엇인가. 차라리 TV화면도 뉴스도 안보는 게 낫겠다고 할 정도의 충격 여진(餘震)을 본다면, 단순한 초접전 패배나 간발의 표차 때문이었다는 풀이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개표결과에 따르면 해외에 있는 국민들이 참여한 재외선거는 승자와 패자에게 3.6대6 정도로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에 살고있는 동포들과 주재원, 유학생들의 평균적 판단으로는 승자에게 3.6점, 패자는 6정도의 점수를 주었다는 이야기다. 재외선거 결과가 가장 합당하고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내의 격한 선거마케팅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혼란스런 시각보다는 좀더 객관적이고 차분한 시야의 평가였다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숲 밖에서 숲 전체를 볼 수 있고, 장기판의 훈수자가 판을 더 잘 읽듯이, 매사가 한걸음 떨어져 보면 윤곽이 더 선명해 보이는 이치다.
선거 와중에 양측은 상대후보 이력과 행적을 놓고 엄청난 양의 비난과 공격을 가하고 또 받아쳤다. 믿거나 말거나 헐뜯기에 바빴고, ‘인격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거기에 ‘되치기와 물타기, 덮어씌우기’로 유권자들은 사실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후보자를 검증하여 정확히 알리고 판단하도록 유도해야 할 언론은 그토록 떠벌리는 ‘알권리’나 ‘정론직필’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자사 이익에 몰두해 편파보도와 눈치보기로 일관했다. 눈과 귀가 가리워진 유권자들은 답답한 나머지 “다 같은 X들, 추잡한 선거판”하며 정치혐오에 기권과 외면으로 피해갔다. 사상 최고를 예상했던 투표율이 77.1%에 머문데서 그 증상을 읽는다.
하지만, 선거를 한두 번 치른 것도 아니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민족의 고난사, 보수-진보의 속성과 정치행적, 그리고 장래 걸어가야 할 공동체의 비전과 국가 사회의 미래상을 잠시만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향학열 높은 국민들이 판단 못할 바도 아니다. 무엇보다 후보자가 걸어온 길과 그 주변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아무리 흑색 마타도어로 가리고 덮어씌운다고 해도,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후보자 됨됨이에 대한 분별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투표란 나 개인만의 손익에 앞서 공동체의 유익에 참여하여 함께 누리는 행위라는 인식과 전제가 있을 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선거결과는 그런 이타적(利他的) 선택의 기대는 한낱 이상론에 불과함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국가미래라는 거시적 안목이나 후보 함량 따지기는 제쳐놓고, 내 재산, 내 이권, 내 권력 챙기기에 매몰된 졸부성향의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투표가 판세를 좌우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른바 부촌의 오불관언(吾不關焉) 묻지마식 쏠림이 그걸 말해준다.
불행히도 선거 후 열흘동안 당선자가 보여준 모습은 예상이 맞아 떨어지는 불길한 앞날을 예고해 준다. 이른바 ‘윤핵관’의 권력 핵심등장을 비롯해, 청와대엔 죽어도 들어가지 않겠다는 샤머니즘적 고집불통, 엿새 전에 국방부에 통보하고 건물을 비우라고 했다는 졸속과 군림, 국방본산을 흔들어 놓고 안보 지장없다는 억지, 현 정부와는 한마디 상의없이 수천억 이전을 결정해놓고 예산 내놓으라는 무법과 생떼…,
선거 후 사람들 가슴앓이가 왜 깊고 오랜가. 너무도 뻔했던 자질과 함량에도 표를 던진 손가락들이 한심해서 일 것이다. 후회하며 고통을 감내할 선량한 시민들이 안쓰러워서다. 곳곳에서 무너지고 뒤틀릴 공적 시스템, 뒷걸음질 민주질서와 거꾸로 갈 역사가 안타까워서다.
아무려나 이제 투표자들은 그 선택의 후과를 기다려야 한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가전회사의 구호도 되씹어야 한다. 검증에 눈감고 비리와 의혹을 가짜로 치부했었다면 뽑힌 자의 일탈에 대해 참회하며 공동책임을 져야한다. 사회갈등이 심화하고, 민족간 대립이 격화하거나 국제적 위상이 타격을 입어도 감내해야 한다. 민주주의 역행과 역사 퇴보에 대비해 후손들에게 사죄할 준비를 해야한다!.
고난을 딛고 역사는 진전한다지만, 순간적 방심과 착시의 댓가는 혹독한 법이다. 다만 간절한 소망은 되돌리기 힘든 추락만은 절대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의혹은 당락에 덮여선 안된다
[한마당 칼럼] 대선 에서 불거진 의혹들은 당락에 덮이면 절대 안된다.
국내외 한인은 물론 세계인의 주목을 끈 한국 대통령선거의 요란한 레이스가 마침내 승자와 패자를 내고 막을 내렸다. 열광도 깊은 탄식도, 이제는 감정을 달래고 정리하며 추스릴 시점이다.
싸움이 원체 격렬했기에 승자든 패자든 충격의 여진이 오래 갈 테지만, 대개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에, 혹은 패배의 분노와 억울함을 누르는 데에 만 관심이 쏠려버린다. 모든 게 결판났고 끝나버렸다는 ‘종결의식’이 대중의 뇌리와 심중을 휘감아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선거레이스 도중 불거졌던 일들에 대해서는 “선거 때면 의례 그런거야”라는 습관적 관용으로 덮거나 묻어버리고, 거론조차 거북해 하며 잊혀지곤 한다. 이긴 자는 권력의 힘으로 뭉개고, 진 자는 유구뮤언으로 삭이는 악습이 되풀이 되는 점도 있다.
선거 때마다 그런 악습의 전통을 잘 아는 자들은 당연히 오직 승리만을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무차별 공격과 선동전에 몰입한다. 자신의 의혹은 극구 부인하며 덮고 상대의 의혹은 부풀려 기를 쓰고 악선전한다. 물타기, 덮어씌우기, 뭉개기, 되치기 등 별별 술수를 총동원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저 우기며 내질러서 이기면 그만인 사생결단의 기싸움 판이다. 남녀노소 지역불문 맹위를 떨치는 SNS는 그 악폐의 효과적인 첨단병기가 되었다. 유권자들도 선거 때면 늘 그러려니 무신경해져서 사실인지 아닌지, 누구 말이 맞는지 헷갈려 이성은 마비되고 귀중한 표를 감정에 빼앗긴다. 결국은 사회가 답보하고 역사 또한 그만큼 퇴보하니 국가적 손해가 막심하지만, 뒤늦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그렇게 ‘승자의 종결’로 덮이고 ‘습관적 관용’에 묻혀온 선거사가 얼마나 나라와 국민 삶에 손실을 끼쳤을지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만도 아니다. 후보자의 중대의혹이 나중에 되살아나 진실이 밝혀지고 징벌에까지 이른 과거 이명박 씨의 BBK 비리처럼 강하게 경종을 울린 사례도 있다.
그런데 이번 선거가 다시 BBK 전철을 밟을 가능성을 남겼다. 그런 악습이 되풀이 되는 선거전을 차단해야 한다는 강력하고도 절실한 과제를 던졌다. 설령 당선이 되어도 대통령 취임여부와 상관없이 후보자의 비리의혹과 선거전에 악용한 거짓과 음해, 악랄한 선동에 대해서는 철저한 수사와 규명으로 진실을 가려 당선무효 혹은 탄핵을 강제토록 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첨예한 대결에서 여러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하나, 이번 선거는 그 도가 지나쳤다. 선거과정에 드러난 수많은 의혹과 비리 사안은 결코 ‘습관적 관용’으로 용납해서는 안될 국가적 해악을 끼칠 심각한 것들이다. 후보자를 급조한데다 그마저 수준미달인 함량을 커버하느라 무리수를 남발한 까닭일 것이다.
이제 선거는 끝났으되, 반드시 사실과 진위를 따져서 응분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냥 유야무야 지나간다면 앞으로 또 다시 반복될 터요 그 정도가 무한 악화할 것이며, 그만큼 정치는 추잡해지고 사람들의 도덕과 가치관은 타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표적 규명 사안은 거의 당락을 좌우한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대장동’건이다. 검찰이 수사하고 당사자의 육성녹음이 나왔어도, 시장 책임인지 사법 부패카르텔의 한탕이었는지, 그야말로 되치기와 덮어씌우기로 뭉개져 버렸다. 어차피 서로가 동의했으니 특검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려 거악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후보자 일가의 비리의혹과 권력형 축재의 실상도 낱낱이 밝혀져야 할 중대 사안이다. ‘물타기’와 검찰의 뭉개기로 선거판은 넘겼으나, 앞으로 대통령 후보자의 무자격을 규정하기 위해서라도 명백하게 가려서 범죄와 처벌여부 결론을 내려야 한다. 마찬가지 손바닥 王자로부터 촉발된 후보자 일가를 둘러싼 사이비 무속논란도 실체가 규명돼야 한다. 유세장에서 굿을 한다는 의혹과, 일상사를 무당의 지시에 의존한다는 사람이 국정을 좌우한다면 나라 꼴이 무엇이 되겠는가. 아울러 이단종교로 취급되는 신천지와 통일교가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도 그냥 넘어가선 안된다.
그밖에도 많다. 온갖 가짜 흑색선전에 동원된 불법 SNS 조직과 댓글 알바 운영 실태, 검찰의 음습한 사찰자료 악용의혹 역시 수사를 통해 밝혀서 처벌해야 마땅하다. 방송토론과 유세장에서 막무가내로 내뱉은 허위사실들의 불법성 여부, 하루아침에 돌변해 배신감을 주며 사퇴한 후보자의 사연과 흑막도 궁금하다. 그리고 대다수 언론은 왜 의혹들을 모른 체 하며 편파와 비호에 급급했는지도, 진상을 밝혀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일국의 최고지도자를 뽑는 선거에서 어떻게 이런 부당한 일들이 횡행하고 덮힌 채 무감각하게 투표를 하고, 왜곡없는 표심이 반영됐다고 말할 건가. 선거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축제가 되고, 참된 민의의 대변자를 뽑아 국가사회가 발전하려면 이런 불합리·불의한 일들이 사라져야 함은 물론이다. 따져보면 극한으로 치달은 선거에서 그런 ‘습관적 악습’을 자행한 자들이 바로 원인과 호기를 제공했다. 이들 혐오세력부터 청산하는 작업이 바로 그 해결의 첫걸음이 아닐까.
[한마당] 제20대 대통령선거... ‘실제상황’, 위기구할 한 표
조국을 떠나 사는 우리가 왜 조국의 대통령선거에 관심을 갖고 흥망성쇠 여부에 가슴을 조리는가. 저마다 이유들이 있을 테지만, 역시 ‘뿌리’로 요약되지 않을까. 혈연(血緣)과 민족혼이 우리들 가슴과 뇌리에 스며있고 핏속에 흐르는 때문일 것이다.
세계 각국에 널리 퍼져 사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놀라운 역량과 단결력으로 막강한 응원군이 된다. 단순히 ‘고향나라’여서 그런가?. 그들은 수천 년 민족의 수난과 이합집산 속에 겪은 쓰디쓴 고난의 경험이 뼈에 사무쳐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 선택받은 민족’임에도 그들은 무려 2천여 년을 찢기고 짓밟히고 흩어졌고, 히틀러에게는 6백만 명이 학살을 당하는 참상을 겪었다. 불신앙과 동족의 분열이 초래한 파멸과 약육강식의 냉혹한 비애를 절감했기에 다시는 그런 악몽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투지로 뭉쳐있는 것이다.
민족사로 보자면 대한민국은 이스라엘 보다는 형편이 나았지만, 일천 번에 가까운 외침(外侵)과 식민의 고통, 내전(內戰)과 분단의 아픔,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와 학살에 이념대결 등 숱한 고난을 겪었다. 시련 속에 단련되고 강해지련만 아직 그 고난의 경험과 통증이 깊숙이 체화(體化)되지 않은 탓일까.
1백년도 안된 일제치하의 수치와 고통은 잊혀져가며 오히려 미화하는 일도 벌어진다. 전쟁의 참화를 잊은 듯, 선제 타격에 대결과 색깔론이 난무한다. 사찰과 고문 협박의 독재 공포정치를 되살리려는 움직임도 있다. 국가권력을 돈벌이 수단으로 써먹은 자들, 무속측근의 비선권력에 국정이 농락당한 일도 언제 있었느냐는 듯하다. 하기는, 세계를 놀라게 한 2천만 촛불혁명에 동참했던 국내외 동포들의 기억도 벌써 흐릿해져 가고 있으니 무엇을 탓하랴만.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둔 지금 걱정스러운 바도 다른 게 아니다. 우리 민족의 기억과 망각이 걱정이고, 고통의 역사가 다시 반복될까 조바심 나고 두려워서다. 근대 들어서만도 동학혁명과 3.1운동, 4.19와 5.18. 6.10 등 실패를 거듭하며 피와 눈물로 수난을 극복한 민족사였다. 이제는 촛불혁명으로 성공의 대로를 열겠지 믿었다. 그렇게 모처럼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데, 어쩌랴! 그마저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릴지 모를 위기를 만나 몸살을 앓고 있다.
70여년 권력을 쥐고 군림하며 영화를 누렸던 작폐세력이 촛불로 입은 중화상을 싸매고 다시 권좌를 노리면서 구태가 되살아나고 있어서다. 친일 반공 독재세력의 후예라는 오명을 씻기는 커녕 버젓이 수구본색을 드러내 철지난 옛 노래를 복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뿌리깊은 기득권으로 법-언-정-재(法言政財)의 강고한 카르텔을 형성해 진격의 나팔을 불어대고 있다.
건강한 민주주의 국가라면 보수와 진보정치가 양 날개 균형을 이루며 국정운영 실적에 따라 정권이 교대되는 정치시스템을 이룬다. 하지만 보수 같지 않은 보수가 압도하는 기형적 상황에서 정권교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권력놀음에 그치는 것이다.
문제는 태생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한국 ‘보수’의 안중에는 백성의 안위나, 민족의 장래보다 오로지 권력 쟁취만 보인다는 사실이다. 정당의 이름이 바뀔 수도 있겠으나 도대체 몇 차례 개명인지, 전혀 민의와 상관없이 난관돌파의 정략으로만 급조한데서 유독 잦았던 그 속셈이 드러난다.
당내 지도자감은 도태시키면서 항상 밖에서 인물을 조달한다. 아무리 인기영합이라 해도, 검찰중립을 뭉갠 도중하차 총장을 대통령 후보로 세운 졸속부터 영혼없는 무뇌(無腦)정당의 자백 아닌가. 그런데, 인물을 둘러싼 하자는 양파껍질처럼 줄을 잇고 저질함량은 갈수록 태산이다. 국정에 대한 비전이나 철학, 준비도 없을 뿐더러 아는 게 없다. 그런데도 지지율이 높다니 걱정과 염려가 커지는 것이다.
사람이 완벽할 수 없고, 대통령에 도덕군자를 뽑는 것도 아니지만, 몇 가지 단순한 예만 보아도 평균적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된다. 유세장의 굿판 소문처럼 무당과 사이비에 너무 의존한다는 증거들이 나돈다. 본인과 가족의 비리를 덮고 남에게 가혹하다는 전형적 내로남불 소리를 듣는다. 스스로 검찰신뢰를 무너뜨리고도 ‘검찰왕국’을 장담하고 있다. 토론을 꺼리면서 불리하면 거짓으로 공격한다. 그럼에도 공정과 상식과 정의를 입에 달고 산다. 거기에 온갖 악담과 독설에 색깔론 까지 입에 올려 국민감정을 긁고 갈라치기하며 수구회귀의 불안과 위기를 키우고 있다.
재외투표는 이미 진행 중이고, 3.9선거도 코 앞이다. 그렇다. 실제상황이다. 조국이 또다시 회복의 고통을 감내해야 할 어둠의 시대로 갈지, 미래로 전진할지, 민의의 한 표 한 표가 결정한다. 간절한 호소의 외침이 들린다. “동포들이여 깨어나라! 분별의 지혜로 시대와 인물을 가려 역사와 후손 앞에 떳떳한 한 표로 대한민국을 구할 때다”
[신년논설] 위기에 빛나는 디아스포라의 조국사랑 해법
[한마당 칼럼] 분수령에 선 조국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캐나다는 2백에 가까운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 사는 다민족 사회다. 지구촌 곳곳에서 이웃나라들이 적대시하며 서로 치고받고 으르렁대는 현실을 보노라면, 이 나라에 그 많은 이민족이 모여서도 큰 탈없이 서로 품고 어울려 사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크고 작은 차별과 소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국가공동체를 이루어 그럭저럭 잘도 굴러간다. 이웃 미국에 비하면 얼마나 유순하고 너그러운 편인가.
그렇다고 그 많은 국가와 민족 출신들이 이 나라에 완전 동화되어 자기들의 태생적 문화와 색깔을 잃어버리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그렇듯이, 저마다 자기들끼리 고향풍습과 전통문화를 지키며 후손에게도 말과 음식을 가르치고 전통 옷을 입힌다. 같은 맛과 정서, 비슷한 얼굴의 은근한 동질성이 구심력이 되고 공통관심사를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이민 삶에 매달리면서도 고향사람들 소식에 궁금해 하며 모국의 대소사에 신경을 쓴다.
전세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든든한 ‘뒷배’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스가 IMF 체제에 고통당하자 캐나다의 그리스출신들은 고국 돕기에 나섰다. 자국민을 학살한 쿠데타에 미얀마인들은 주모자들을 규탄하고 국제사회에 대응을 호소했다. 시리아 전쟁 난민이 발생했을 때나 아프간 사태 때도 자기 고향사람 더 많이 구해 데려오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아프리카계들은 미국에서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거셀 때 캐나다에서 동조시위에 나섰고, 아시안과 그 친구들은 아시아인 혐오 규탄 캠페인에 힘을 보탰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월드컵 응원 때처럼, 어쩌면 더 극성은 아닌가. BTS·기생충·K한류에 흥이 나고, 손흥민·고진영의 선전에 자랑스러워 한다. 경제·국방력과, 유엔기구가 선진국 공인을 했다는 고국 소식에 뿌듯해 했다. 엄청난 홍수피해가 났을 때 너도나도 성금을 보냈다. 글자그대로 ‘동족상련’(同族相憐)이고 모국 사랑의 발현이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모국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 이민자들의 생생한 발자취를 본다.
삼국시대 백제는 탁월한 문물을 왜국에 전해 준 문화 선진국이었다. 많은 백제인들이 스승나라 사람들로 숭앙받으며 일본 땅에 거주하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갑자기 패망하자, 그들은 왕족인 부여풍 등과 함께 귀국해 부흥운동에 기꺼이 목숨을 내던져 싸웠다.
가까이는 대한제국이 망했을 때, 하와이와 멕시코 등지 한인 이민자들의 애국애족 열정과 눈물겨운 독립운동은 한인 디아스포라 이민사에 훈장처럼 빛난다.
조선 왕국이 기울어진 1902년 최초의 한국인 이민으로 하와이를 향한 인천 ‘내리교회’ 교인들은 101명이 현지에 도착했다. 그 뒤 조국이 망하고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질 때, 겨우 정착한 한인들은 사탕수수밭 노역으로 번 쌈짓돈을 모아 3·1 운동 당시 3만4,034달러 5센트를 만주 독립군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후 상해 임시정부에는 하와이 국민회 모금으로 30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의 독립자금을 전했다. 1905년 멕시코에 속아서 건너가 ‘애니깽’(Henequen) 농장에서 비참한 노동에 시달린 한인들, 그리고 쿠바로 탈출해 정착한 코리안들도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후원자 명부에 올라있다.
이들 미주 한인들은 모국 기근 구제성금, 독립신문 후원금, 광주학생 후원금까지 보냈고, 단체들을 만들어 직접 독립투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새해를 맞으며 모국 사랑의 장광설을 늘어 놓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설령 싫어서 떠나왔고, 잊고 살겠다 결심했어도 뼈와 살에 스며있는 디아스포라의 ‘피와 물’을 속이고 덮을 수가 있겠는가. 모국이 쇠하면 부끄러워 주눅들고, 흥하면 나 한사람도 절로 흥이 솟는 게 부인할 수 없는 우리들의 속성이다. 이 시대 해외 이민자로 사는 우리 모두 모태를 향한 귀소본능(歸巢本能)을 저버릴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살진대, “이왕지사 사랑이라면” 조국에 선하고 의로운 영향력을 끼치며 사는 게 현명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올해 한국에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해외거주 국민을 위한 재외선거 예산 수백억원을 투입해 투표를 독려하고 있다. 중앙선관위 직원이 파견나와 애타게 등록을 권한다. 하지만 오는 8일 마감을 앞두고 전체 대상자의 겨우 10%선만이 유권자 등록을 한 상태라고 한다. 아직 90%는 투표참여에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다.
모국 참정권 부여의 필요여부는 논외로 치고, 일단 주어진 권리라면, 그리고 형제 자매가 사는 고향 땅이 염려되며 애정이 있다면, 내 소중하고 비싼 한 표가 의미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 보다 당당한 권리의 선택으로 조국의 공의로움과 흥성을 북돋우는 수고쯤이야 뭐가 그리 어렵겠는가.
올해 모국 대선은 실로 중차대한 국민적 선택의 기로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뽑힐 새 지도자가 중요한 것은, 그가 이끌 5년이 나라의 도약과 정체 혹은 퇴락을 가름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만큼의 반열에 오른 국가적 함량과 수준을 더 끌어올리느냐, 아니면 일개 중진 권위주의국으로 후퇴시킬 것이냐를 국민의 한 표 한 표가 결정한다. 감옥에 간 전직 대통령들이 그걸 입증해주었다. 브라질이 이른바 합법적 검찰쿠데타로 대통령을 쫒아내고 보소우나루라는 극우 망나니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후 쇠락을 면치 못하는 양상 역시 대표적인 사례다.
한인 이민사 초기 미주동포들의 애절했던 독립운동처럼, 캐나다 동포들도 이미 40여년 전 조국의 민주화를 열정적으로 성원했던 값진 족적이 살아있다.
반세기를 넘긴 캐나다 이민사를 빛내고 그 선배들의 업적을 기릴 뜻깊은 일들을 나부터 주변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소소한 것 같지만 캐나다 삶의 비교 경험을 나누고 전해주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다.
가령 ‘교통신호 절대 준수와 음주운전 엄벌의 관행’에서 부터, “무상의료가 좋아 보이지만 한국 의료체계가 부러운 이유”라든가, “‘세금폭탄’ 운운 말고 세금 많이 내 혜택을 누리라”, 또 “COVID-19 봉쇄 대신 넉넉한 지원으로 피해가 적다”…. 좀더 나아가면 “일제에 부역한 자가 아니면 어떻게 친일후예가 되어 일제 때가 좋았다고 감히 떠드나?.” “민주주의를 향유하면서 군부독재 무리들을 편 들 수가 있단 말인가.” “여야가 대립해도 너 죽고 나 살기 식 막말과 발목정치는 없다” “종교인들이 친일과 독재정치를 미화하고 극우정당을 만들어 성조기를 흔들다니 참 불가사의다” “본인과 가족비리로 재판받는 후보의 흥행이란 상상못할 일이다,” “민족 통일의 대화가 필요한가, 대결과 전쟁을 불사해야 하나”….
이런 담론은 맹목을 깨우치고 모국 사람들과의 대화에 도움이 될 상식과 보편의 재료가 아닐까.
올해가 검은 호랑이의 해라고 한다. 흑호(黑虎)는 정상적인 개체가 아닌 근친번식 반복으로 인한 DNA 돌연변이의 일종이라니, 어쩌면 세태의 비정상과 위험 도래의 신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는 한국의 대선판, 정치판을 보면서, 한국 호랑이의 용맹과 호쾌한 기상 이면에 그런 비정상의 야누스적 일면을 보는 듯한 감이 들어서다. 제발 온 겨레가 하나되어 ‘기형 호랑이’가 아닌 비범한 위용의 호랑이 해로 장식하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우리 조국만 기로에 선 것이 아니다. 세상은 새해에도 암울하다. 상서로움의 기대와 달리 코로나19 팬데믹 2년여, 우리 주변을 맴도는 오미크론의 위세는 불안을 더해준다. 기후변화와 폭증하는 자연재난, 미-중 대결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충돌의 위기, 차별과 불평등의 심화 등 인류 모두와 바로 우리에게, 호혜상생(互惠相生)의 지혜를 요구하는 변곡점이 마주해 있다.
조국에도, 글로벌 공동체에도,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의 선택과 분별로 그 활로를 열어가야 할, 깨어서 행동하는 열정의 시대정신이 절실한 때다.
올해는 시사 한겨레가 어려움 속에 16살로 자란 해, 미운 정 고운 정으로 감싸 주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리며, 삭풍을 헤치고 청년의 기백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변함없는 성원을 부탁드려 마지 않는다.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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