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이어 슬로베니아도 대만 밀착 행보
얀샤 총리 “대만은 민주국가, 독립 선택하면 존중”
리투아니아 보복 조처…산업 공급망까지 영향 확대
유럽연합, 장기간 피해온 ‘중국이란 현실’ 앞으로
지난 20일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대만대표처 현판 앞에 양쪽 국기가 내걸려 있다. 빌뉴스/로이터 연합뉴스
지난해 리투아니아에 이어 새해 벽두부터 슬로베니아가 대만과 상호 대표처를 설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슬로베니아의 움직임은 리투아니아와 외교 관계를 격하하고 무역제재까지 가한 중국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잇단 ‘소국의 역습’에 중국식 ‘강압 외교’가 본격 시험대에 오른 모양새다.
지난 17일 인도 공영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대만에 대표처 설치와 관련해 야네스 얀샤 슬로베니아 총리가 쏟아낸 발언은 여러모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대만을 “민주 국가”라고 불렀고, “대만 국민이 독립을 원한다면, 슬로베니아는 그들의 ‘주권적 결정’을 존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고 수교한 나라는 바티칸을 포함해 모두 14개국에 불과하다.
얀샤 총리는 나아가 지난해 ‘대만대표처’ 설치 이후 중국의 전방위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이웃 리투아니아의 상황에 대해 “말도 안 된다”고 표현했다. 그는 “유럽 국가 상당수가 대만과 일정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명칭 사용에 차이는 있지만 리투아니아도 예외가 아니다”라며 “중국은 유럽 각국이 대만과 외교적 접촉을 할 때마다 항의를 해왔지만, 리투아니아 사례처럼 대응한 전례는 없다. 중국이 지난 30여년 동안 독립을 위해 싸워온 작은 나라를 고립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고 덧붙였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지난해 7월 ‘대만’의 대표처 설치 요청을 유럽에서 처음으로 승인했다. ‘대만’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타이베이’란 이름을 선호하는 중국을 자극했다. 리투아니아 쪽은 ‘하나의 중국’ 원칙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지만, 대만을 중국과 별개의 국가로 승인하는 첫걸음을 뗀 것이란 평가까지 나왔다. 리투아니아 등 발트 삼국은 러시아의 지배로 고통당한 역사가 길어 인권침해나 패권주의적 움직임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중국은 즉각 자국 대사를 소환하고 리투아니아 대사도 추방했다.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사업의 일환인 리투아니아행 화물 열차 운행도 중단시켰다. 이어 지난해 11월 대만대표처가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공식 개설되자 양국 관계를 대사급에서 대리대사급으로 격하했고, 리투아니아산 상품의 수입 통관도 봉쇄했다. 인구가 약 280만명에 불과한 리투아니아를 본보기 삼아 전체 유럽 국가에 던지는 일종의 경고였다.
그럼에도 ‘도미노 현상’을 막지 못했다. 인구 200만명 남짓한 슬로베니아가 리투아니아의 행보에 가세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이들이 중국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이유는 중국과 경제 관계가 깊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은행 통합무역정보(WITS)를 보면, 2019년을 기준으로 슬로베니아의 대중국 수출액은 약 2억9천만달러, 수입액은 약 23억3천만달러다. 각각 전체 수출액과 수입액의 약 0.8%와 6% 수준이다. 같은 해 리투아니아의 대중국 수출액은 약 3억달러로 전체 수출의 0.9%, 수입은 약 10억달러로 전체의 2.9%에 그친다. 중국의 ‘보복’으로 잃을 게 많지 않다는 뜻이다.
그에 따라 중국의 대응 방식 역시 달라졌다. 그동안 중국의 ‘보복 조처’는 주로 특정 국가를 겨냥해 이뤄졌다. 2010년 반체제 운동가 류샤오보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을 이유로 노르웨이산 연어 수입을 금지했을 때도, 코로나19 기원 조사 등을 둘러싸고 1년여 전부터 관계가 틀어진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무역보복에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리투아니아에 대해선 산업 공급망 전반에 대한 포괄적 제재를 시도하고 있다. 이를 두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지난 6일치에서 “냉전 시절 소련도 못 했던 일”이라고 표현했다.
실제 발디스 돔브로우스키스 유럽연합(EU) 무역대표는 지난달 24일 독일 <디벨트>와 한 인터뷰에서 “리투아니아산 제품에 대한 중국의 수출 봉쇄가 갈수록 여타 유럽 국가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며 “중국 관세당국은 리투아니아산 부품이 들어간 여타 유럽 국가의 제품에 대해서도 통관을 차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치·외교 채널을 동원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실패할 것에 대비해 세계무역기구 제소도 별도로 준비 중”이라고 덧붙였다.
중국은 얀샤 총리의 발언에 대해 “슬로베니아의 ‘트럼프’가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대만 카드를 꺼내 든 것은 충격적”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한다”고 밝혔다. 관심을 끄는 것은 유럽연합의 이후 행보다 그동안 말로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지지’의 뜻을 밝히면서도 구체적인 행동엔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산업 공급망이 흔들리는 터에 슬로베니아까지 중국의 ‘보복’ 대상이 되면, ‘무대응 기조’를 유지하기 쉽지 않다. 인구 200만명대의 두 소국이 마주한 상황이 ‘중국이란 현실’을 외면해온 유럽연합 전체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베이징/정인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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