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신안’ 당권파 반발‥ 12일 중앙위가 분수령

4.11 총선에서 원내 3당으로 도약하고도 경선부정 의혹으로 내홍에 휩싸인 통합진보당이 획기적 해결책을 찾지 못해 안팎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전국운영위원회가 ‘대표단과 경쟁부문 비례대표 전원 사퇴’를 결의했으나, 당권파 쪽 비례대표인 김재연(32) 당선자(청년비례·3번)가 사퇴를 거부하는 등 사태가 여전히 격렬한 갈등 국면을 내달리고 있다.
 
비당권파가 과반인 당 전국운영위원회는 지난 5일 대표단(이정희·심상정·유시민·조준호)과 경선 비례대표 전원(14명)이 사퇴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 6월 말까지 새 지도부를 선출하는 내용의 쇄신안을 통과시켰다. 전국운영위는 회의장을 봉쇄한 당권파 지지 당원들을 피해 이날 밤 전자투표로 표결을 진행했으며, 운영위원 50명 가운데 28명이 참여해 전원 찬성으로 쇄신안을 통과시켰다.
운영위는 당권파 반발을 고려해 ‘조사위의 보고서가 당원의 명예를 지키고 구체적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데 일부 미흡함을 인정한다’는 문구를 쇄신책에 넣었으나, 당권파들은 ‘비당권파가 잘못된 조사를 근거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며 반발했다. 당권파인 이정희 대표 쪽은 운영위의 대표단·비례대표단 사퇴 결의에 대해 “정치적 권고일 뿐 강제력은 없다. 누가 부정을 저질렀는지 명확한 조사가 필요하다”며 전면 거부 뜻을 밝혔다. 당권파 쪽인 김재연 비례대표 당선자도 6일 오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진상조사위원도 ‘조작이라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하루아침에 수만명의 당원과 청년선거인단을 부정 행위자로 만들었다”며 사퇴를 거부했다.
 
경선 부정의 수습책을 둘러싸고 두 세력 사이의 갈등이 좀처럼 수습되지 않는 원인은 이번 사태를 보는 양쪽의 시각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비당권파는 이번 사안을 ‘투표부정뿐 아니라 진보정당을 운영했던 방식의 문제’로 보고 있다. 당권파를 포함해 모든 정파들이 전부 바뀔 각오를 하지 않으면 공당으로서 존립 기반이 위태로워진다고 보는 것이다. 비당권파인 유시민 공동대표가 6일 기자간담회에서 “당이 투명해지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렇지 못해 부족했던 부분들에 대해 혹자(당권파)는 관행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꼬집은 게 이런 상황인식을 보여준다. 
반면 당권파들은 ‘억울할 수 있지만 감당하라’는 주문은 문제해결 방식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사실관계도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자신들에게 모든 정치적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는 불만도 있다. 당권파의 한 핵심 인사는 “평생을 진보운동에 몸담았던 당원들을 모욕하는 문제해결 방식은 당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정확하지 않은 조사를 근거로 여론을 만들고, 다시 그 여론을 이유로 퇴장을 강요한다면 누가 승복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통합진보당 안팎에서는 12일 예정된 중앙위원회가 당의 진로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때까지도 수습책이 정리되지 않으면 양쪽의 갈등이 중앙위에서 폭발할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문제는 현재로선 양쪽이 내놓을 적절한 타협의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당 대표단 사퇴야 크게 이견이 없지만, 비당권파가 마련한 ‘경선 참여 비례대표 후보 전원 사퇴’는 한두 명을 예외로 하는 협상이 가능한 사안이 아니다. 당권파는 ‘추가 조사를 통한 진실 규명’을 주장하지만, 아무런 수습책 없이 추가 조사를 하는 것도 국민 눈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다만 양쪽이 대외적으로는 당이 쪼개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태도는 분명히 하고 있어, ‘정치적 해결책’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시민 대표는 이날 “대화를 해야 한다. 분당은 국민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강조했고, 당권파도 “중앙위를 저지하는 일은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전국운영위 회장앞에서 공동대표단과 운영위원을 가로막은 당권파 당원들.


당권파, 오랜 ‘패권·정파주의’가 문제
관건은 민주적 의사결정구조

진보당이 심각한 갈등국면에 바진데 대해 전문가들은 우선, 총선을 앞두고 옛 민주노동당과 옛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가 모여 당을 급조한 점을 지적한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진보당은 야권연대라는 정치적 기회를 통해 교섭단체까지 만들 수 있다는 전망 아래 만들어졌다. 그러니 이념과 정책·가치를 공유하기보다, 파벌이 연합한 정당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당권파의 뿌리 깊은 ‘패권주의’와 끼리끼리 모이는 정파주의가 원인으로 꼽힌다. 현재 통합진보당 당권파는 1991년 민중운동 진영이 만든 연대체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에서 출발한 경기동부연합과 광주전남연합 출신이 다수를 차지한다. 1997년 대선 당시 전국연합은 진보 후보인 권영길 ‘국민승리21’ 선거운동본부에 참여했는데, 정작 선거에선 다수가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를 지지했다. 이때 끝까지 권 후보를 지지하고, 평등파(PD)와 손잡고 민주노동당 창당까지 함께한 이들이 바로 경기동부연합이다.
 
그런데 창당 이후 전국연합이 뒤늦게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고, 당 규모가 커지면서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지며 패권주의와 정파 논란이 불거졌다. 추가로 입당한 자주파가 경기동부연합과 함께 빠르게 당을 장악하면서, 이전까지 다수였던 평등파는 6 대 4로 밀리게 된다. 경기동부연합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 수원지구당에서 활동했던 한 관계자는 “국가보안법에 의해서 언제든 붙잡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동료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했다. 하지만 같은 정파 동료 이외에는 자신들 사상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것이 결국 다른 세력을 전혀 인정치 않는 패권주의로 드러났다. 민주노동당 때도 자기 정파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대리투표를 하거나 투표함을 옮기며 표를 모으는 일을 했었다”고 밝혔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는 “당내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논의하면 자칫 보수 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게 되고, 그러면 당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고 판단해 문제가 있다고 여겨도 덮고 넘어갔다”고 말했다. 이번 부정경선 조사 결과를 놓고 당권파가 “조·중·동에 먹잇감을 던져줬다”고 비난하는 것은 이런 인식의 연장선이다. 김윤철 경희대 교수는 “이번 부정경선 파문을 진보정치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이제 국민들이 통합진보당의 정파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됐다. 각 정파들은 근본적인 혁신을 통해 당내 주도권이 아니라, 누가 더 시대적 상황과 국민적 요구에 부합하는 이념·정책·인물을 갖고 있느냐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고 말했다.